44. 악천후 뒤에 (2)
밤사이에 태풍은 내륙을 지나가다 규모가 점점 작아져 예상보다 이르게 자연 소멸되었지만, 태풍이 남긴 피해는 아직 전부 집계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홍천은 피해가 컸는지 민가와 떨어진 야산의 상태까지 점검하진 않은 것 같았다.
주수혁이 보낸 기사 사진도 기자가 직접 찍은 게 아니라 위성 사진이었다.
[주수혁] 탁 할아버지랑 효돈이, 윤섭이 다 연락이 안 돼.
[주수혁] 탁 할아버지가 계셨으니까 큰일은 없었겠지만, 아직도 저 산에서 수련 중인가 봐.
저 개판이 된 산에서 수련 중이란 말인가!
탁거산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둘이나 제자를 받아 많이 들떠 있나 보다.
‘탁 도인이나 맹효돈은 그렇다 쳐도 방윤섭이 저런 곳에서 견딜 수 있을까.’
비바람에 뽑혀서 땅에 거꾸로 박힌 거목들이 눈에 띄었다.
곳곳에 부러진 나무들이 산재하고, 진흙탕이 된 산길은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아니었다.
[나] 오늘 데리러 가자.
[주수혁] 그래!
[주수혁] 언제 볼까? 선도부실에 들를 일이 있으니까 가능하면 점심쯤에 학교 주변에서 보고 싶어.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바이스로 메시지를 입력하는 사이에 올무도 깨어나 애교를 부렸다.
어제부터 계속 올무가 가까이에 있던 덕인지, 아니면 영약 덕인지 몸은 가뿐했다.
‘일찍 잠든 탓도 있겠지만…….’
어제 저녁 식사를 한 후, 은호의 후예들과 놀던 중에 황지호가 난입해 들어가서 자라고 권했다.
더 놀겠다고 후예들이 졸랐지만 황지호가 엄하게 말을 끊었다.
손님인 내가 가정 교육 방침에 뭐라 하기도 그래서 바로 객실에서 잠을 청했는데, 피로가 쌓였는지 눈을 감자마자 잠들었다.
‘생각보다 피로가 쌓여 있었나?’
몸단장을 마치고 거실로 나갔더니 황지호가 차를 마시고 있는 게 보였다.
황지호는 침대에서 얼리 모닝 티를 마실 것 같은 타입이었는데 아침부터 성실하게 교복을 입고 차를 즐기고 있었다.
“앉아라. 네 몫의 차를 준비하마.”
오늘의 모닝 티는 아쌈을 베이스로 한 스코티쉬 브렉퍼스트였다.
공복인 점을 고려했는지 밀크티로 만들어 줬는데, 스트레이트가 아닌 데도 실론과 운남의 향이 잘 살아 있었다.
“매일 이렇게 차를 마셔?”
“그래. 거의 거르지 않고 있다.”
황지호는 테두리에 푸른 유약을 입힌 도자기 잔을 소리 없이 기울이며 차를 마셨다.
‘한반도에 차가 들어온 건 삼국시대라는 말이 있는데…… 대체 언제부터 마신 걸까?’
아니, 한반도에 차가 들어온 시기와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이 호랑이는 한반도 밖의 존재들과도 교류를 가진 것 같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중국 신화 속 여덟 명의 시조 중 하나인 염제 신농.
중국에서는 신농이 차의 개념을 처음 고안했다는 설도 존재했다.
그렇다면 황지호가 아주 젊었을 때부터 차를 즐겼을 가능성이 있었다.
“언제부터 차를 마셨어?”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저 가장 존경하는 존재가 차를 즐기기에 시작했던 게 떠오르는군.”
황지호가 가장 존경했던 존재라니.
한반도를 다스린 신인을 칭하는 걸까?
전 우두머리였던 은호?
그것도 아니면 다른 존재?
황지호는 먼 곳을 응시하면서 차를 마시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내가 존경했던 존재가 누군지 궁금한가? 정 궁금하면 알려 줄 수도 있다.”
“됐어.”
황지호가 처웃으면서 말하니 호기심이 순식간에 죽었다.
“어제는 안색이 안 좋던데 괜찮군.”
그게 얼굴에 드러났나?
손이 좀 식어 있긴 했지만 표정 관리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조의신 네가 체스를 둘 때나, 적하고 대치할 때에는 표정도, 얼굴색도 잘 숨기지. 너는 ‘이겼다’고 생각할 때까지 표정을 바꾸지 않더군.”
다행히 싸울 때의 포커페이스는 건재한 모양이다.
그런데 저 말은 ‘이겼다’고 생각할 때에는 표정을 바꾼다는 뜻 아닌가.
“넌 무언가와 싸울 때가 아니면 얼굴에 드러난다. 크게 눈에 띄는 건 아니지만.”
고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황지호가 다시 처웃었다.
“하하하하! 딱히 고치라는 뜻에서 한 말이 아니니까 안심하도록.”
더 속을 읽히는 게 싫어서 차나 마시기로 했다.
품에 있는 올무에게 먹을 만한 다과를 주자 꼬리를 열심히 흔들며 기뻐해 나도 기뻐졌다.
반대편에 앉아 있는 황지호는 잊고 티타임을 즐기고 있으니, 이 대저택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어, 벌써 일어나셨네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은호의 후예들이 사이좋게 등장해 나와 황지호에게 인사했다.
뒤를 이어 백호군과 적호도 나타났는데, 아이들이 백호군한테 인사하는 목소리가 유독 기운이 없었다.
“…….”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적호가 묻자 백호군이 답했다.
“조의신의 방에 잠입하려던 걸 잡았다.”
내가 잠든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나.
푹 잤다고는 하지만 명색이 플레이어인데 눈치채지 못하다니.
후예들의 기척 숨기는 실력이 점점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
백호군의 말이 끝나자 아이들이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의신이 오빠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했는데!”
“형이랑 놀고 싶었는데…… 신수만 같이 놀다니 치사해요.”
“……사진 찍고 싶었어요.”
은호의 후예들이 투정을 부렸지만, 백호군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내 숙면을 지켜 주려는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마음씨에 다시금 감탄했다.
“조의신이 눈치채지 못한 걸 보니 기척을 잘 감추고 간 것 같군. 잘했다.”
“감사합니다, 황호 님!”
“정진할게요!”
황지호는 칭찬의 말을 한 번 던진 후,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조의신의 방에 숨어들자는 아이디어는 누가 낸 거지?”
“산령이요!”
“0반이라면 기척을 잘 죽여서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해야 한댔어요!”
또 범인은 산령이었나.
첫째 은서호와 둘째 은이호가 기운차게 덧붙였다.
“올해 말에는 은광고 입시가 있잖아요. 준비해야죠.”
“저희 힘으로 꼭 은광고의 0반에 들어갈 거예요!”
은호의 후예들은 산령과 장난을 치며 0반 입시의 꿈을 키우고 있나 보다.
백호군은 산령을 잡아 족치려는 듯 여기저기 둘러 봤는데 눈치 빠른 산령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그런 짓은 안 해도 된다. 원하는 반에 넣어 주마.”
찻잔을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누르던 황지호가 그렇게 말했다.
애들이 0반에 들어가겠다고 산령으로부터 미친 짓을 배우느니 그냥 반 배정에 압력을 넣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사장의 제안에 은서호와 은이호가 밝은 얼굴을 했다.
“아, 진짜요? 혹시 학년도 고를 수 있어요?”
“그럼 의신이 오빠랑 황호 님이랑 같은 반 하고 싶은데!”
“저도요! 저도 같은 반 할래요. 황호 님!”
이제 10살이 된 은재호도 손을 들며 고등학교 편입 의사를 밝혔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황지호 옆에 몰려들었는데, 기대에 찬 시선을 받은 황지호가 진지하게 말했다.
“……호적을 더 만들면 되지 않을까?”
진짜로 실행할 것 같아서 말리기로 했다.
“난 너희들이 입학식부터 차례대로 경험했으면 좋겠어.”
“입학식…….”
“그래. 상인관에서 입학식을 치르는데, 지금 편입하면 신입생으로서의 입학식은 못 하잖아.”
“의신이 형이 입학식 할 때는 어땠어요?”
중앙대강당 상인관에서 치렀던 입학식에 대해 말해 주고 사진 자료를 보여 주자 다행히 아이들이 마음을 바꾼 것 같았다.
“입학시험부터 열심히 준비할게요!”
“맞아요. 수석은 신입생 대표를 하죠? 저도 저 자리에 서고 싶어요!”
주수혁과 안다인이 나란히 선서를 하는 모습은 아이들 눈에도 인상 깊었나 보다.
올해 은광고 입학식 영상 기록을 보던 아이들이 의욕을 불태웠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0반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할게요.”
“응, 열심히 하자!”
황지호가 다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게 보였다.
적호는 열심히 하겠다는 아이들을 응원해야 할지 말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결국 백호군은 자리에 없는 산령을 잡으러 가고, 아이들은 다음엔 무슨 장난을 할지 작당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 맞다. 곧 토연 누나가 놀러 오시니까 누나한테도 그거 시험해 보자.”
“그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은호의 후예들은 옥토연을 대상으로 그 흉악한 시체놀이를 시전하려는 것 같았다.
잠깐이라곤 하지만 황지호와 적호도 속인 엄청난 술수였다.
이건 좀 제재를 해야 하나 싶었지만, 이번 건은 호랑이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듯했다.
“음, 그건 좋은 생각인 것 같군.”
“제가 가짜 피를 조달하겠습니다. 회토의 토끼를 속이려면 어지간한 수준의 가짜 피로는 안 되겠죠. ……진짜 피를 뿌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미로 정원에 걸려 있는 환술도 동원할까.”
옥토연의 정신 건강을 3초 정도 걱정한 후, 다시 아침의 티타임을 즐겼다.
* * *
아침 식사 후, 황명호 대저택 식구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맛없는 영약을 마셨다.
혼자 먹어야 했다면 많이 괴로웠겠지만, 옆에 백호군과 올무가 있으니 견딜 수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올게.”
“……방학 중인데 왜 의신이 오빠는 바빠요?”
“오늘 황호 님은 안 바쁘신 거 같은데 왜 의신이 형은…….”
끄응…….
은호의 후예들과 올무가 붙잡았지만, 선약을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해심 많은 아이들과 올무는 다행히 나를 보내 줬고, 꼴도 보기 싫은 영약 파우치가 잔뜩 들어 있는 금분 종이봉투를 기숙사에 둔 후 목적지로 향했다.
‘주수혁이 좀 늦네.’
중앙 구역, 선도부회관 앞.
주수혁과 나는 점심시간에 학교에서 만나 방학 중에도 운영 중인 학교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한 뒤에 이동하려 했다.
그런데 약속한 시각에서 5분이 지났는데도 주수혁이 보이지 않았다.
사전에 말도 하지 않고 늦다니, 주수혁답지 않은 태도였다.
‘그동안 일이 많이 밀렸나?’
주수혁은 청소년 수련회 사건 이후로 많이 바빴다.
재벌가 자제인 데다 장래가 지나치게 유망한 플레이어인 그가 방학 중에 바쁜 건 당연했지만, 큰 사건을 해결하며 화제성이 더해지니 더욱 바빠졌다.
게임 속 첫 방학 중에 주수혁이 해결하는 크고 작은 퀘스트가 몇 개 있었는데, 이 세계에서도 큰 사고 없이 무사히 해결해 더 이름이 알려졌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학교에 와서 선도부 일도 하다니, 역시 타이틀 히어로다운 행보였다.
플마고 타이틀 히어로의 행적을 되새기고 있을 때, 디바이스가 울렸다.
[발신자: 주수혁]
바로 오지 않고 전화를 하다니, 정말 무슨 일이 있나 보다.
전화를 받자 미안해하는 주수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신아,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정말 미안한데 오늘 약속은…….]
순간 목소리가 멎었다.
디바이스 스피커를 멀리하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희미한 음성이 들렸는데, 그걸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혁아, 난 괜찮으니까 가도 돼.]
[혜지 누나…….]
디바이스 너머로 희미하게 들리는 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인 3학년 선도부장 오혜지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오혜지가?’
오혜지는 강하고 단호한 성격의 캐릭터로, 어른들 앞에서도 조리 있게 제 의사를 전달하고 기죽는 일이 없었다.
게임 속에서 눈물을 보인 것도 유상희의 전사 소식이 들렸을 때뿐이었다.
아직 대상도 모르는데 분노가 밀려들었다.
대체 무엇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울린 건가.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