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32화 (232/925)

44. 악천후 뒤에 (3)

주수혁이 학교에 도착하기 전, 그의 전용 에어 스트레치드 리무진 안.

주수혁과 김철은 행선지를 은광고로 지정하고 리무진을 자동 주행 모드로 설정한 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의신이랑 같이 효돈이랑 윤섭이를 데리러 홍천으로 갈 생각이에요. 마중이 필요하면 다시 연락할게요. ……철이 형?”

주수혁이 부르자 김철이 뒤늦게 반응했다.

주수혁의 경호원 겸 비서 역을 수행하는 김철.

그는 젊은 나이에 연줄 없이 오로지 능력만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 회장 직계를 담당하게 된 인재였다.

그런 김철이 최근 이렇게 멍하게 있는 경우가 잦았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네! 오늘 오전엔 학교에 들러서 그동안 밀렸던 선도부 업무를 하고, 점심에는…….”

주수혁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다시 일정을 말했다.

김철은 디바이스에 메모를 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집중력이 떨어진 모습이었다.

‘철이 형, 또 그 의문의 휘파람에 관해 생각 중이신가.’

키모폴레이아 선상 파티 사건 이후, 김철은 종종 저렇게 생각에 잠겼다.

주수혁이 후미 쪽에서 에너미와 맞서 싸우고 있을 당시, 선미 쪽에서 자연 이능파가 배를 덮쳤다.

그때 자연 이능파에 대응한 게 주오와 TC 경호팀이었다.

‘SSR급 이상의 자연 이능파의 진로를 바꾸기 위해서 결계의 중심에서 철이 형이 아이템을 쓰고, 이능파를 조율했었다고 했지.’

경호팀의 팀장과 팀원들이 이능파를 끌어올리는 사이, 김철과 이능파에 민감한 경호원 몇몇이 어떤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휘파람 소리.

배를 덮친 이능파의 위협이 닥쳐오는 가운데, 그 휘파람 소리를 듣는 순간 평소보다 이능파가 증강되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때 이능파 폭발 규모를 고려하면, 자연 이능파를 다뤄 본 경험이 없는 데다 대비할 시간이 부족했던 경호팀이 그걸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없긴 해.’

하지만 경호팀은 기적을 이뤄 냈다.

비록 기적을 이룬 직후 경호팀은 전부 기절하긴 했지만,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자연 이능파의 여파로 장애를 일으킨 듯한 기록기기들이 전후 상황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김철은 저 기적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김철은 그날, 경호팀 뒤에서 이름을 숨긴 의인이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주오랑 TC의 경호팀장님은 상위 존재의 개입을 의심하던데. 철이 형은 키모폴레이아를 구한 진짜 영웅이 따로 있다고 믿고 있구나.’

그 사건 이후, 키모폴레이아에서 직접 이계 공략에 나선 재벌가 자제들만큼은 아니었지만 경호팀도 화제가 되었다.

금일봉도 억 단위로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금액을 밝히지 않는 게 금일봉의 원칙이나, 부주의하게 기자가 있는 자리에서 봉투를 연 팀원이 있었고 봉투 틈새로 1억 자리 수표가 보였던 탓이다.

그리고 강직한 성품의 김철은 제 몫이 아닌 부와 명예를 얻는 걸 내키지 않아 했다.

‘철이 형의 추측대로 누군가 그때 도움을 줬다 하더라도, 경호팀이 없었으면 피해가 훨씬 커졌을 텐데.’

그런 생각을 김철에게도 직접 말했지만, 김철은 납득하지 못했다.

김철의 진짜 영웅 찾기를 도와주고 싶어도 기록기기에 남은 흔적이 없으니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주수혁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실수를 하는 김철을 감싸 주는 것 정도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정중하게 인사한 김철이 다시 고민에 잠기는 게 문틈 사이로 보였지만 주수혁은 못 본 척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다. 셔틀 대신 보드를 타고 이동할까.’

태풍이 막 지나간 탓에 날이 선선해 에어보드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탁거산 사제 일행을 찾기 위한 홍천군의 야산 수색 루트의 후보를 세 개 정도 짰을 때쯤 주수혁은 선도부회관에 도착했다.

선도부회관 입구에서 출입 허가 코드가 입력된 학생증을 찍으니, 현재 선도부회관에 있는 인원수가 표시되었다.

숫자는 1 .

주수혁이 아직 들어가기 전인데도 누군가가 있었다.

‘어? 누가 왔나?’

태풍의 영향인지 선도부 단체 메시지방에 오늘 오겠다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

주수혁도 태풍이 예보보다 일찍 소멸해 일정을 앞당기긴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선도부실로 들어갔을 때, 오혜지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혜지 누나. ……어?”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오혜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져 내렸다.

*    *    *

아직 와도 좋다는 말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에어보드에 올라타 도착지 입력 패널을 열어 중앙 구역의 선도부회관을 선택하고 있었다.

“오혜지 선배님께 무슨 일이 있었어? 아, 혹시 말하기 곤란한 문제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게……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도 혜지 누나 혼자 둘 수 없어서…….]

“함근형 선생님을 불러야 할 일인 거 같아?”

[선생님을 부를 일은 아닌 것 같아. ……아마도.]

선도부의 고문은 우리 1학년 0반의 담임이기도 한 학생부장 함근형 선생님이다.

학기 초에 함근형 선생님이 선도부에 들어오라고 권유한 적이 있었는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오혜지가 울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신문부와 겸임으로 선도부에 들어가는 건데!’

후회는 잠시 미뤄 두고 두뇌를 풀가동했다.

주수혁이라면 오혜지를 잘 달래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선도부회관에 도착하기 전, 돌파구가 하나 떠올랐다.

“오혜지 선배님께 전해 줬으면 하는 말이 있는데…….”

내 말을 전부 들은 주수혁이 놀란 목소리로 알겠다고 답했다.

주수혁이 말을 전하자, 곧 오혜지가 바로 나를 만나겠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내 말을 듣고 바로 마중을 나온 듯, 에어보드에서 내리자마자 주수혁과 오혜지가 마중 나온 게 보였다.

“의신아, 그 말 진짜야?”

오혜지의 눈은 그리 붓지도 않았고 목소리도 크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나 플마고의 고이고 썩은 물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나는 아직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를 숨기며 말했다.

“네. 우연히 기회가 닿아서요.”

“혜정이 언니는 건강하게 잘 지내지?”

내가 미끼로 삼은 건 사월 일족의 저택에서 만난 오혜지의 친언니, 오혜정이었다.

‘오혜정의 연락처를 아는데, 무슨 일이 있으면 상담해 보지 않겠냐’는 요지의 말을 전하자 오혜지는 바로 응했다.

본의 아니게 오혜정의 이름을 팔게 생겼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혜정도 오혜지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 달라고 했으니 이 정도로 써먹는 건 문제 없을 거다.

“네, 얼마 전에 뵈었는데 건강해 보이셨어요. 들어가서 이야기할까요?”

나는 두 사람과 선도부회관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여전히 주오 그룹 내에서는 주수겸과의 약혼을 파토 낸 오혜정을 찾는 이들이 많으니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을 거다.

오혜지도 내 뜻을 이해한 듯 곧바로 선도부회관 문을 닫고 선도부실로 안내했다.

“의신이가 혜정이 누나랑 알고 지내는지 몰랐어.”

“최근에 인연이 닿았어. 내가 은광고 소속인 걸 아시고 오혜지 선배님 안부를 물으셔서 알게 된 거야.”

“언니가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다.”

오혜지의 눈가가 다시 붉어지는 것 같아 나와 주수혁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아, 혜정이 언니는 아마 도청될 가능성을 염려해서 내 디바이스로 연락하지 않은 거겠지? 역시 언니는 똑똑해.”

입을 다문 우리를 보고 오혜지 쪽이 미안해하며 오히려 마음을 써 주며 말을 돌렸다.

선도부 휘장이 걸린 로비를 지나 도착한 곳은 대회의실이었다.

한쪽에는 오혜지가, 반대편에는 나와 주수혁이 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혜지 누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도울게요. 말씀해 주세요.”

오혜지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의신이는 혜정이 언니의 디바이스 코드를 알 정도로 가깝게 지내는 것 같고…… 시후 건도 도와줬으니까 말해도 될까.”

오혜지는 ‘주오의 난’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 후, 주오 그룹 측에서 주수혁과 오혜지를 이어 주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말했다.

“키모폴레이아 사건 이후로는 그런 게 덜하던데…….”

“……그건 나 때문이야.”

“네?”

주수혁의 말에 오혜지가 얼굴을 조금 붉혔다.

오혜지는 샌드핑크색 가죽 스트랩의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렸다.

“그 사건 때 수겸이 오빠가 나 감싸다가 다친 거 기억나?”

주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겸이 오빠가 다친 이후로 자주 만났어. 병문안도 가고, 식사도 하고……. 병문안이라고 해 봤자 회복 아이템을 썼으니 검사를 위해 하루밖에 입원하지 않았으니까 한 번 밖에 못 갔지만. 병문안 와 준 답례로 시계 선물도 받았어.”

그 시계가 느루에서 오더 메이드했다는 손목시계인가!

선물을 보낸 사람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는데, 선물을 보낸 이가 주수겸이었나 보다.

‘주수겸이라니!’

주수혁의 6촌 형이자, 오혜정과 약혼을 할 뻔했던 주수겸.

주수혁과 상당히 닮은 외모를 하고 있으니 외양으로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거기에 주수혁의 사형다운 실력을 갖추고 있어 이계 공략 때 오혜지를 감싸기까지 했다.

주오 그룹 현 회장의 직계 비속인 데다 전무 이사직에 있는 그는 스캔들 하나 없었고, 업무 실적도 우수했다.

그래도 인정할 수 없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피도 눈물도 없는 일벌레 골초’와 엮이다니. 오혜지가 아깝다!’

오혜정이 평가한 주수겸의 수식어를 떠올리며 주수겸에 대한 적의를 불태웠다.

한편, 주수혁은 그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는지 눈을 크게 깜빡이고 있었다.

“내가 수겸이 오빠를 자주 찾아가니까, 이번엔 그 노망난 인간들이 나랑 수겸이 오빠를 이어 주려 했어.”

주수혁이 아연실색한 얼굴을 했다.

“수겸이 형하고 혜지 누나랑 10살이 넘게 차이가 나잖아요! 게다가 누나는 아직 고등학생이고……. 이번 일은 저도 항의할게요. 혜지 누나, 미리 알고 대처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오혜지가 운 건 그 탓이 아닌 것 같은데.

주수혁은 완벽한 타이틀 히어로였지만 연애 문제에는 아주 둔한 것 같았다.

오혜지는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수겸이 오빠도 너랑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아.”

주수혁은 뒤늦게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저번 주에 마지막으로 같이 식사를 했을 땐, 몇 번이나 나보고 동생 운운했어. 그리고 오늘…… 다음 달에는 선을 본다고 하더라.”

오혜지는 고개를 숙여서 손에 착용 중인 시계를 봤다.

주수혁은 현재 상황이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아 혼란스러운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을 깬 건 오혜지였다.

“그러니까…… 음, 후배들한테 이런 말 하게 돼서 부끄럽네. 하하하,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죄송해요.”

주수혁에게 사과하지 말라며 밝게 웃은 오혜지가 내 쪽을 보며 말했다.

“혜정이 언니랑 연락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언니랑 이야기하면 기분도 좀 나아질 것 같아.”

“제 디바이스를 쓰세요.”

“고마워, 의신아.”

나는 개인적으로 구입한 예비 디바이스에 오혜정의 코드를 입력해 오혜지에게 빌려줬다.

그리고 통화를 시작한 오혜지를 두고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어…… 어디서부터 돌지 정해 둘까?”

“그러자.”

선도부회관 로비에 있는 소파에서 주수혁과 30분가량 지도를 보며 대화를 하고 나니, 오혜지가 등장했다.

오혜지의 얼굴은 홀가분해 보였지만,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혜지 누나, 바래다 드릴게요.”

“네가 그러면 그 노망난 인간들이 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혼자 있고 싶으니까 오늘은 가. 수혁이 네가 맡은 일도 내가 할게.”

“일찍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집에 있기 싫어서 선도부회관에 온 거야.”

오혜지가 그렇게 말하니 더 붙잡을 수가 없었다.

고집을 부려 같이 있기도 어려워서 결국 밖으로 나갔다.

주수혁과 선도부회관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의도가 어떻건 오혜지를 울린 주수겸과 무력한 나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솟았다.

자괴감에 빠져 있을 때, 디바이스가 메시지 수신을 알렸다.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떠오른 메시지창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오혜정] 의신아, 고마워. 덕분에 혜지랑 잘 대화했어. 혜지한테 또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

[오혜정] 지금 주수겸을 죽이러 갈 거야^^.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3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