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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33화 (233/925)

44. 악천후 뒤에 (4)

유상훈의 집.

유상훈의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장남욱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또 놀러 오렴.”

어제 태풍으로 인해 대중교통이 전부 끊겨 장남욱은 유상훈의 집에서 묵고 갔다.

유상훈의 가족은 점심도 먹고 가라며 장남욱을 잡았지만, 성실한 장남욱은 점심 전에 사관학교에 복귀해 오후 훈련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유상훈은 산책을 겸해 에어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겠다며 장남욱과 함께 집 밖으로 나섰다.

“다음엔 의신이도 같이 오고.”

“……네. 다음에 뵐게요, 상희 누나.”

현관을 나가기 직전 유상희가 한 말에 장남욱과 유상훈이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스피커 모드로 두 사람이 같이 들었던 조의신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그 꿈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희들이 다시 그런 꿈을 꾸지는 않을 거야.

—나중에 내가 설명할게. 미안해.

이 말을 끝으로 아직 조의신은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조의신의 말대로 어젯밤 두 사람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

아직 판단할 근거는 적었지만, 두 사람은 어렴풋이 자신들이 꾼 꿈과 조의신이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랑 상훈이가 꾼 꿈은 의신이가 입학시험 날에 없었다면 우리한테 일어날 일이었어. 그런데 왜 의신이가 그 꿈과 관계가 있는 거지……?’

장남욱은 조의신이 자신들에게 해를 입힐 의도가 있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장남욱은 조의신이 걱정되었다.

흔히 정신에 간섭하는 능력은 시전자의 정신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조의신이 만약 그런 이능을 갖고 있고, 무의식중에라도 발현하였다고 하면 어떤 식으로든 그의 내면을 헤집었을 게 분명했다.

“나중에 설명한다고 했으니까 말해 주겠지.”

장남욱이 어두운 표정을 하고 걷고 있으니 유상훈이 뜬금없이 말을 던졌다.

“뭔 일 있으면 유상희 씨한테 치료해 달라고 하면 되고.”

정신적 데미지는 아케아의 광림으로 낫게 하는 게 까다로울 텐데.

장남욱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유상훈도 그 사실을 알고도 그렇게 말했으리라 판단하고 입을 다물었다.

장남욱은 화제를 바꿀 겸 신경 쓰이던 것을 물었다.

“아, 상희 누나 말인데…… 요즘 환자들 많이 상대해?”

“잘 모르겠는데.”

“그래…….”

“왜.”

장남욱은 ‘별 처녀의 눈’을 숨기고 있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그냥. 사념의 잔해 같은 게 많이 보여서.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그런 흔적이 남기도 해.”

“그러냐.”

유상훈은 인상을 찌푸리며 뭔가 말하려고 하다 에어 버스 정류장이 보여 다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데, 아직 위화감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    *    *

오혜지는 대체 오혜정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주수겸을 죽이러 간다는 소릴 하는 건가.

물론 오혜정의 심정은 아주 잘 이해가 갔다.

아니,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도와야 하는 게 아닐까?’

전력을 고려하면 오혜정이 주수겸에게 밀렸다.

주수겸의 전속 경호원들을 차치하고, 1 대 1로 겨룬다는 가정하에서도 그랬다.

“의신아, 왜 그래?”

주수혁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잠깐이라고는 하지만, 타이틀 히어로의 친척 암살 계획에 가담할 뻔했다.

‘적어도 반죽음으로 끝나도록 말려야겠지.’

오혜정이 폭주해서 잡히기라도 하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오혜지는 물론이고 사월세음도 슬퍼할 테니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메시지를 받았는데…….”

주수혁에게 오혜정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보여 줬다.

메시지를 본 주수혁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주수혁은 예전에 약혼식 파토 사건 때 오혜정의 행보를 잘 알고 있으니, 저런 반응은 당연했다.

“난 수겸이 형한테 가 봐야겠다. 미안, 홍천은 내일 가자.”

사려 깊은 타이틀 히어로는 수라장을 수습하기 위해 직접 나서려는 것 같았다.

나는 주수혁을 붙잡았다.

“나도 같이 갈게.”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남의 집안싸움에 염치없이 끼어드는 꼴이 되었지만, 그래도 뻔뻔하게 말했다.

“그분께 연락한 건 나잖아. 일이 커지면 내 책임도 있어. 무슨 일이 있으면 나도 같이 말릴게.”

아직 말릴지 말지는 조금 망설여지긴 하지만.

다행히 주수혁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에어택시를 타고 주수혁과 향한 곳은 주오 그룹의 주오 본사와 핵심 계열사들이 밀집한 일명 ‘주오 타운’이었다.

일견 개방된 오피스 거리로 보였지만, 이 주변은 주오의 로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테이크아웃 전문 커피 체인점조차 주오 그룹 계열사에서 나온 브랜드 중 하나였다.

건물마다 붙어 있는 CCTV 설치 안내문과 경비 구역 범위를 알리는 로고도 주오에서 파생된 경비 업체의 것이었다.

‘……오혜정이 여기를 뚫고 올 수 있을까?’

그러나 주수혁이 걸음을 서두르는 걸 보니 괜한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수혁은 오혜정이 여기까지 오리라 확신하는 것 같았다.

‘오혜정도 주오 그룹의 주요 인물이기도 하니, 경비 상태에 대해서 꿰고 있겠지. 파토를 낸 약혼식장에서도 경비가 삼엄했을 텐데 오혜정은 그걸 뚫고 탈출했어.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주수혁의 안내에 따라 주오 타운 중앙의 주오 본사 건물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주수혁이 1층 데스크에서 인사를 하니, 곧바로 내 몫의 임시 출입증이 담긴 트레이가 내밀어졌다.

트레이를 내민 이는 척 봐도 평소에 데스크를 담당하던 직원이 아닌 듯했다.

사전에 주수혁이 내 몫의 출입증을 부탁한 덕에 비서팀 소속 인물이 직접 전해 주러 온 모양이었다.

그 짧은 시간 이동하면서도 철저히 준비해 주다니 역시 타이틀 히어로 다운 모습이었다.

주수혁은 임원용 엘리베이터를 부르다 중얼거렸다.

“……이 엘리베이터, 수겸이 형 집무실이 있는 층에 멈춰 있었어.”

설마 오혜정이 먼저 온 걸까.

사월 일가의 저택에서 주오 타운까지 거리가 꽤 있는데.

“연락은 드렸어?”

“메시지를 보냈는데 기독 처리가 안 됐어. 수겸이 형은 업무 시간에는 사적인 메시지 확인을 잘 안 해…….”

내 질문에 주수혁이 말꼬리를 흐렸다.

“방금 형이랑 점심 먹고 싶다는 말은 비서팀에 전하긴 했어. 다행히 오늘 점심 일정은 비어 있는 것 같더라.”

점심 약속에 날 부르는 건 좀 어색하지 않을까.

그렇게 고민했지만, 주수혁이 웃으며 말했다.

“의신이 너는 예전에 잠실 야구장에서 나와 싸운 적이 있잖아. 그 일로 우리 가족이 신세를 진 셈이니까 식사 자리에 널 불러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야.”

대화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주수겸의 집무실이 있는 플로어였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복도에 섰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평소에는 경비원이나 비서가 돌아다니는데…….”

벽의 일부가 유리창으로 된 중역 회의실도, 휴게실도 텅 비어 있었다.

주수혁은 불투명한 자동문 앞까지 서둘러 걸었다.

홍채 인식기와 카드 리더기가 달린 키패드 위로 ‘주수겸 전무 이사’라고 쓰인 명패가 보였다.

주수혁이 키패드의 호출 버튼을 누르려 했을 때였다.

위잉—.

아무 조작도 하지 않았는데 자동문이 저절로 열렸다.

“……수겸이 형?”

카앙! 키이이잉! 캉!

주수혁의 목소리가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에 묻혔다.

나와 주수혁은 서둘러 손님용 소파가 마련된 대기실을 지나 집무실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카앙!

문을 연 순간, 눈앞에 번쩍하고 섬광이 튀었다.

집무실은 개판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주수겸.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사월세민.

그리고 회칼을 들고 주수겸에게 달려드는 오혜정.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나와 주수혁은 한발 늦은 것 같았다.

“수겸이 형! 혜정이 누나!”

“수혁이 왔니? 주수겸 이 답 없는 골초 새끼야, 수혁이도 왔는데 그 짜증 나는 담배부터 끄지그래.”

오혜정이 환하게 웃으며 디스했지만, 주수겸은 필터를 입술에서 떼며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금연초다.”

키이잉!

오혜정이 회칼을 다시 휘둘렀지만, 다시 금속음과 함께 공격이 저지되었다.

언뜻 보기에 주수겸은 맨손으로 칼날을 막아 낸 것처럼 보였지만, 그 손에는 라이터가 쥐어져 있었다.

‘여태까지 라이터의 표면으로 공격을 방어한 건가!’

한 손으로는 담배를 피우고, 남은 한 손으로는 라이터를 들고 회칼을 막다니.

지나치게 여유가 넘치는 모습에 오혜정이 울컥한 게 보였다.

덩달아 나도 울컥해졌다.

지금 오혜지가 우울한 얼굴로 선도부회관에서 일하고 있을 걸 생각하니 더 그랬다.

‘주수혁이랑 얼굴은 닮았네.’

가까이에서 보니 주수겸은 주수혁 판박이였다.

상당히 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어 인상은 많이 달랐지만 이목구비가 복사해서 붙인 수준이었다.

‘주수혁이 안다인을 만나지 못하고, 세태에 찌든 상태로 성장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성인이 되지 못한 채로 죽음을 맞이했던 게임 속 주수혁을 생각하니, 주수겸을 상대로 호감도가 아주 조금 올랐다.

“수혁이 너도 혜지 건으로 왔나 보군.”

주수겸이 주수혁을 보다 입을 열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울린 주제에 주수혁과 오혜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주수겸에 대한 호감도가 곤두박질쳤다.

“하하하, 반은 맞아요. 혜정이 누나가 형을 죽이러 온다니까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요.”

“수혁아, 협공할래?”

“……대화로 해결하면 안 될까요?”

카아아앙!

주수혁의 시도는 다시 들린 금속음과 동시에 무산되었다.

오혜정이 허공에 은색의 잔상을 남기며 회칼을 그었지만, 다시 주수겸의 라이터에 공격이 막혔다.

오혜정은 그 이후로도 맹공을 퍼부었지만, 그 칼끝이 주수겸에게 닿지 못했다.

칼날과 금속 라이터가 부딪칠 때마다 충격파가 터져 나와 집무실만 점점 엉망이 될 뿐이었다.

‘오혜정이 약한 건 아니야. 주수겸이 너무 강해!’

주오 그룹의 자제들은 검을 배웠다.

주씨는 쌍검을.

오씨는 일검을.

장단점이 존재하는 두 계파에 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현시대의 주씨 자제가 지나치게 강했다.

내후년에 오씨 가문에서 인재가 등장하긴 하지만, 아직 중학생에 불과했다.

“오혜정, 넌 날 못 이겨. 더 상대하면 비서팀이 와서 네 행방이 밝혀질 뿐이다. 원하는 걸 말해.”

주수겸이 무뚝뚝하게 말하자 오혜정이 여전히 회칼을 겨눈 채로 말했다.

“혜지 마음 알고 선을 보네 마네 하면서 지랄 떠는 거 알아. 혜지는 아직 마음 못 접었고.”

“…….”

주수겸은 답하지 않았다.

더 말해 보라는 듯, 턱짓을 한 번 했다.

“그러니까 일단 둘이 하루, 1시간, 아니, 30초 정도 사귀다가 혜지가 차서 헤어지는 걸로 하자.”

……천잰데?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로 들렸다.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친언니답게 현명했다.

그런데 30초는 좀 길지 않나?

3초나 1초 정도로 줄였으면 좋겠다.

주수겸은 금연초의 연기를 한 모금 삼키고 답했다.

“혜지가 원한다면.”

지나치게 담백한 대답에 화가 났다.

주수겸은 아무 미련도 없다는 태도였다.

오혜정이 쌍욕을 퍼부을 기세로 입을 열었지만, 문밖에서 사람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오혜정이 처리했던 비서팀과 경호팀이 돌아오는 듯했다.

사월세민이 오혜정의 어깨를 잡자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멍청이 같은 선부터 일단 때려치워. 어차피 결혼할 생각도 없는데 혜지 떼어 내려고 한 개소리잖아. 선 자리 세팅하는 분이나 상대한테 실례야.”

“……그만 가라. 네가 잡히면 그 선 상대가 네가 될 테니까.”

저 말본새를 보니 진짜 오혜지를 포기시키려는 목적으로만 보는 선이었나 보다.

내 마음속에서 주수겸의 호감도가 바닥을 쳤다.

문이 열리기 직전, 두 사람은 뭔 짓을 한 건지 몰라도 통유리가 사라진 창문 앞에 섰다.

“가요, 세민 씨.”

오혜정이 사월세민에게 폭 안기자 사월세민이 얼굴을 붉히며 그녀를 안아 들더니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창밖 저편으로 날아오르는 사월세민이 보이는 게 비행 스킬을 사용한 듯했다.

잠입할 때는 엘리베이터를 사용한 것 같은데 탈출은 대범하게 하기로 한 듯한 모양이다.

한편, 저 답 없는 골초는 저들이 나가는 순간에도 끝까지 금연초를 입에 물고 있었다.

오혜정과 사월세민이 완전히 사라지자 주수겸이 한마디 했다.

“수혁아, 점심 먹으러 가자.”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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