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악천후 뒤에 (5)
주오 그룹 본사 건물 최상층, 임원 전용 VIP 라운지.
사전에 이동 루트를 조정해 둔 걸까.
비서의 안내를 받아 걷는 동안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룸 안으로 이동했다.
이동 중에 주수겸은 비서팀과 경비팀의 팀장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바빴다.
지시 대부분은 오혜정과 사월세민의 습격을 수습하는 것들이었다.
“기록기기는 팀장님이 직접 확인하세요. ……네, 그렇게 하세요. ……집무실 기록기기에 저장된 영상이 없다고 하셨습니까?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집무실 유리창 교체해 두세요.”
유리창이 아예 없어졌으니 교체한다기보다는 새로 한다는 표현이 맞을 텐데.
오혜정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수로 주오 그룹 본사에 쳐들어온 건지, 주수겸이 지적할 때까지 이상을 눈치챈 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사월세민의 곁에서 예비 신부로 지내는 몸이라고 하나 주오 그룹 일가의 플레이어다운 모습이었다.
‘그 정도 실력이 있으니 환몽 경매 때도 사월세음을 빼내려고 단둘이서 잠입한 거구나.’
주오 그룹 본사 잠입과 달리 정보가 부족했던 탓인지 운이 없던 건지 결국 잡혀서 변을 당했지만.
주수겸의 맞은 편, 주수혁의 옆에 앉았을 때였다.
“그래서, 오혜정을 부른 게 무명의 초신성인가?”
통화를 마친 주수겸이 갑자기 내 쪽으로 치고 들어 왔다.
주수혁이 뭐라고 변명하기 전에 주수겸이 입을 열었다.
“수혁이 너는 오혜정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지.”
주수겸은 간략히 근거를 설명했다.
약혼식장에서 오혜정이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 아는 주수혁이 위험한 자리에 친구를 부르는 게 이상했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눈치챌 줄은 알았지만, 막상 눈앞에서 주수겸에게 지적당하니 기분이 미묘했다.
간결하게 설명을 마친 주수겸은 시선을 주수혁 쪽에서 내 쪽으로 돌렸다.
“수겸이 형…… 그러니까…….”
“혜지를 위해서 그런 거겠지.”
착하고 정의로운 타이틀 히어로가 나를 위해 변명하기 전에 주수겸이 잘라 말했다.
오혜지를 위해서 그런 게 맞긴 한데 기분이 묘했다.
“혜지한테 은광고 교내 체스대회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그때 일을 계기로 알고 지내다가 상심한 혜지를 보고 오혜정의 연락처를 준 거겠지.”
주수겸의 말을 들을수록 미묘한 기분의 정체가 분명해졌다.
왜 오혜정은 성을 붙여서 부르고 오혜지는 그냥 혜지라고 부르는 건가.
주수혁은 피가 이어진 친척이긴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오혜지와는 그냥 아는 동생 사이 아닌가.
일의 정황을 거의 정확히 판단한 건 칭찬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냥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무명의 초신성 너는 어디에서 오혜정이랑 알게 됐지?”
그 계기는 ‘그 단어’가 연관된 사건과 긴밀히 이어져 있어서 말하기 곤란했다.
주수혁이 물어봐도 답하기 망설여지는 질문인데 주수겸에게 답할 의리는 없었다.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주수겸과 마주 보며 답하자 주수겸은 무표정에서 아주 조금 입가를 올렸다.
내가 긴장한 기색 없이 답한 게 의외인가 보다.
주오 그룹 로열패밀리의 중심에 있는 주수겸의 추궁을 받고도 이렇게 받아치는 인물은 드물긴 할 거다.
‘임시 출입증이 발급되기 전에 비서가 내 프로필을 전달했겠지. 대충 내 이력은 파악하고 있을 거야.’
같은 반에서 황명 그룹 총수가 돌아이짓을 하는 걸 매일 같이 본 나다.
주수겸의 시선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수겸이 형, 점심은 다음에 먹을까요?”
주수겸이 나를 가만히 보고 있자, 주수혁이 한마디 했다.
주수혁의 저 말을 해석하면 ‘더 추궁하면 자리를 뜨겠다.’가 될 거다.
같이 온 친구를 배려하는 타이틀 히어로다운 말이었다.
“됐다. 먹고 가라.”
주수겸은 보일 듯 말듯하게 입꼬리를 다시 당겼다가 하얀 테이블 크로스 위에 놓인 벨을 눌러 사환을 호출했다.
호출된 사환은 내 옆에서 무릎을 낮춰 눈높이를 맞추고 알레르기가 없는지, 기피하는 소재는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후 물러갔다.
‘주수겸은 그렇다 쳐도, 주수혁도 본사 건물에 자주 방문하는가 보구나.’
사환은 주수겸과 주수혁에게 기존 사항에서 변동 여부가 없는지 확인만 했다.
확인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음식은 바로 서빙되었다.
죽순과 흑후추가 들어간 산라탕.
블랙빈 소스, 사천 소스로 각각 볶아 낸 코끼리조개.
전복과 은행의 맛이 잘 어우러진 전가래복.
서빙되는 것들 전부 전문 레스토랑 수준의 일품들이었다.
‘주오 그룹에 미식가들이 많은가.’
전채와 메인 메뉴가 나오는 동안 대화는 주수혁이 이끌어 갔다.
내가 겉돌지 않도록 공통 화제를 찾아 대화를 이끄는 화술이 아주 절묘했다.
내용을 깊게 따지고 보면 피상적인 말들만 나눈 대화였지만, 분위기를 어색하지 않게 유지하는 데에는 유효했다.
이야기의 주된 화제는 은광고였다.
‘주수겸도 은광고 졸업생이었나 보네.’
주수겸은 플레이어로서도 상당히 우수하니까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오혜지를 울린 놈이 선배라고 생각하니 그리 내키지 않았다.
살구씨를 곱게 갈아 차갑게 식힌 행인두부가 디저트로 나올 때쯤.
주수혁이 입을 열었다.
“수겸이 형이 혜지 누나랑 친하게 지내는 줄은 몰랐어요. 혜지 누나한테 잘해 주신 것 같던데요.”
처음으로 주수혁이 민감한 화제를 꺼냈다.
주수겸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이다 말했다.
“……‘주오의 난’ 이후로 혜지와 이야기한 적이 없었지.”
갑자기 왜 ‘주오의 난’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주씨와 오씨 사이에 교류가 잠깐 끊긴 원인이 ‘주오의 난’이긴 한데.’
주수겸의 낮은 목소리가 한 톤 가라앉았다.
주수혁의 변성기는 끝났을 텐데 주수혁에 비해 주수겸의 목소리가 한참 낮았다.
“‘주오의 난’이 일어난 계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네? ……경영 방침에 관한 의견 충돌로 알고 있어요.”
주수겸이 고개를 저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오씨 집안의 불운’이다.”
“불운이요?”
“오씨 집안에는 유독 단명하는 이들이 많다. 그중에는 주오 그룹의 차기 총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오 그룹은 주씨와 오씨가 함께 만들었지만, 총수는 늘 주씨 쪽에서 배출되는 게 관례라고 생각했다.
주수혁도 이 이야기는 처음 들은 건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씨 집안에서는 손이 귀하다. 거기에 급사하는 인물들이 많아 명줄도 짧으니 이사회에서는 아무도 오씨를 요직에 올리고 싶어 하지 않아. 오씨를 제외하고선.”
“네? 하지만…… 지금 계열사 요직엔 오씨 성을 가진 분들도 많은데…….”
“‘주오의 난’의 결과물이지.”
주씨와 오씨가 대립해 그룹 해체까지 몰린 사건의 진짜 원인은 저거였나 보다.
“그래서 두 집안은 혼인으로 맺어지고자 했다. 한집안이 되려 했어. 그리고 그다음 대부턴 성도 둘로 합쳐 ‘주오’로 바꿀 계획까지 짰더군.”
“네? 성까지 바꾼다고요!”
그런 계획까지 짰단 말인가!
오혜정의 말대로 노망에 걸린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오씨 쪽에선 또 죽는 사람이 나오기 전에 두 집안이 하나가 되길 바라고 있다. 주씨는 다소 소극적으로 응하고 있고 내가 있으니 너한테는 이야기가 안 가고 있겠지.”
“수겸이 형…….”
“하지만 오혜정이나 혜지는 달라.”
주수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지금 눈앞에서 담배를 피울 생각은 없는지 쥐고 있기만 했다.
“현재 오씨 집안에서 결혼이 가능한 나이의 미혼자는 오혜정과 혜지뿐이다. 상당히 압박을 받고 있을 거다. 미성년자인 혜지한테도 그럴 줄은 몰랐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꽤 고생하고 있더군.”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오혜지가 뒤에서 그런 일을 겪고 있다니.
스트레스가 상당할 텐데도 곧고 바르게 자란 오혜지가 참으로 대견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순간,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니, 오혜지가 1학년 때 조금 엇나갔다는 설정이 있던 것 같긴 한데.’
현재 3학년 학생들의 수석과 차석은 ‘도원우기환’으로 굳어 있긴 하지만, 그 밑은 달랐다.
3등부터 10등 사이의 성적 싸움이 치열했는데, 특히 오혜지와 유상희는 늘 비슷한 성적으로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었다.
비뚤어질 뻔한 오혜지를 유상희가 바로잡아 놓긴 하지만, 그 방식이 조금 과격했던 바람에 그 사건 이후로 둘은 서먹해지고 사이가 좋지 않다고 소문이 난다.
“주오의 시작은 탈 가족 경영 방식이었잖아요? ……왜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생각을 가진 경영진도 많다. 나나 그들이 실권을 장악하려면 몇 년은 더 걸리겠지만.”
대화가 잠시 끊겼을 때, 주수혁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주수혁의 말대로였다.
그것도 외부인인 내가 있는 자리에서 왜 이 이야기를 꺼낸 걸까?
대부분 주오의 난을 전후로 두고 주오 그룹의 임원진의 교체 빈도나 수명을 고려하면 짐작이 가능한 사실이긴 했다.
그러나 ‘주오’가 한집안이 된다는 이야기도 그렇고 외부인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이야기가 많았다.
굳이 언급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대답은 다음 말에서 이어졌다.
“혜지에게는 잘 대해 주고 싶었어. 적어도 집 밖에서는 숨통을 틔워 주고 싶었다.”
“그게 혜지 누나한테 잘해 준 이유였어요?”
주수겸은 손안에서 라이터를 굴리다가 답했다.
주수겸의 시선은 주수혁 말고도 내 앞에서도 멈췄다.
“혜지를 잘 달래 줘라.”
그래서 내 앞에서 주오의 난 비화를 꺼낸 걸까.
내가 주오의 눈을 피해 잠적 중인 오혜정의 연락처를 알 정도의 인물이니, 오혜지에게도 잘 대해 줬으면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당연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한테 잘할 건데, 주수겸이 저렇게 돌려서 표현하니 기분이 아주 묘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뜨기 전, 주수겸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수혁이나 혜지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라. 오혜정한테도 무슨 일이 있으면…… 아니, 오혜정은 내 도움을 반기지 않을 것 같군.”
명함에는 필기체로 흘려 쓴 ‘주수겸’이라는 이름과 디바이스 코드만 쓰여 있었다.
척 봐도 대외용 명함이 아니었다.
명함을 건넨 주수겸은 자리에 남았는데, 공기 순환 장치를 최대로 가동하는 게 금연초를 피우다 들어갈 생각인 것 같았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들렸다.
주수겸은 정말로 답이 없는 골초였다.
* * *
주오 그룹의 본사 건물을 나선 지 몇 시간 뒤.
오늘은 이대로 헤어질 생각이었지만, 주수혁이 홍천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가만히 있으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아.’라고 주수혁이 말하니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홍천으로 이동한 나와 주수혁은 어느 예비 골초와 마주쳤다.
“억! 너희들이 어떻게 여기에 온 거야!”
이동 내내 복잡한 얼굴이었던 주수혁은 웃는 낯으로 답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와 내용은 까칠했다.
“윤섭아, 수련하러 홍천까지 왔으면서 담배를 피워? 탁 할아버지랑 효돈이는 어디에 있어?”
우리는 홍천에 도착하기 무섭게 부러진 나무 뒤에서 입에 담배를 문 방윤섭과 마주쳤다.
* * *
은광고 조경 구역, 청랑호 호수 저편의 은련관.
서방칠수 밑에서 백호가 백아를 거두며 말했다.
“네가 무슨 목적인지는 관심 없다.”
형체가 불분명한 상대는 비실거리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 상대의 정체는 천익산의 산령이었다.
산령은 대련을 가장한 난타전에 혼이 쏙 빠진 상태였다.
“정도를 지키고, 후예들의 인성을 저해하지 않을 수준의 장난이라면 봐줄 의향이 있다. 하지만.”
백호는 산령의 목덜미를 잡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조의신을 방해하지 마라.”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