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49화 (249/925)

46. 무대의 아래 (3)

황지호의 돌발 발언에 반응한 건 나와 김유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염준열이 경악한 표정으로 황지호를 보고 있었다.

염준열은 그 발언의 내용보다는 황지호의 존재 자체에 놀란 것 같았다.

후예와 진족은 서로를 알아보니까.

‘이제야 눈치챘나 보네.’

염준열은 나한테 사월세음 얘기를 바로 전하지 않은 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지 사월세음에게 신경이 쏠려 있었다.

‘저번에 염준열이 자살수를 뒀을 때도 그렇고…… 진족의 기운을 대놓고 발산하지 않으면 바로 알아채지는 못하는구나.’

침묵을 깬 건 한이였다.

“황지호, 너 더위 먹었어?”

한이와 내 의견이 일치했다.

날이 덥다 보니 호랑이의 정신머리 상태가 맛이 간 것 같았다.

“하하하하! 이 몸은 건강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몸이 아니라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한이가 내 생각을 읽은 듯한 발언을 했다.

반 아이와 강력한 공감대가 형성된 기분이다.

한편, 독고미로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황지호를 보고 있었다.

독고미로가 입을 열었을 때는 희미하게 어려 있던 경계심을 얼굴 뒤로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다.

“한이랑 죽마고우라고……? 둘이 언제부터 알고 지냈어?”

“은광고에서 처음 만났는데.”

한이의 대답에 이어 황지호가 처웃으며 덧붙였다.

“하하하하! 첫 만남은 이 근처에서 한 게 맞다.”

청호와 황호는 5천 년 전 이곳에서 만난 모양이었다.

회화가 절망적인 수준으로 어긋나 있는데도 모두가 진실만을 말하는 기묘한 상황이 이어졌다.

“음…… 날이 더우니까 어디 들어가고 싶다. 점심 먹으러 갈까?”

김유리가 황지호를 복잡한 얼굴로 보다가 분위기를 바꿨다.

현재 김유리는 호족의 수석 주술사에게 가르침을 받는 중이니 황지호의 정체와 노친네의 돌아이력이 진짜라는 걸 알고 있을 거다.

이동 중에 염준열이 사월세음에게 물었다.

“용제건 선생님이 1학년 0반의 부담임이시지?”

“네! 아직 부담임을 맡으신 지 얼마 안 됐지만요.”

“저번에 다 같이 주오 아일랜드에 갔다고 들었는데…… 반 아이들하고 다 같이 간 거야?”

“아, 그날 찍은 사진 보실래요? 미로도 같이 봐요! 오늘 안 오신 반 아이들 소개해 드릴게요.”

내 착한 제자는 용제건이 황지호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 신경 쓰였나 보다.

사진 속의 용제건은 우리 반에 섞여서 주오 아일랜드 여행을 즐기고 있었고, 사진을 보는 염준열은 안심한 얼굴을 했다.

용제건과 황지호가 같은 화면에 찍혀 있는 걸 보니 경계심이 풀린 모양이었다.

염준열이 사는 점심을 먹으며 우리는 2학기 학교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럼 미로는 2학기에 등교할 거야?”

김유리의 질문에 독고미로는 사전에 미리 답을 준비한 건지 물 흐르듯 답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연습에 매진하고 싶어.”

게임 속의 독고미로는 2학기부터 등교했는데.

‘플레이리스트’가 폐지되지 않은 영향일까?

독고미로는 게임 속 모습과 달리 생기가 넘쳤고, 대놓고 등교를 하지 않을 만큼 패기가 있었다.

독고미로가 괜히 학교를 안 나온다는 것도 아니고 제 꿈을 이루기 위해 나오지 않겠다고 하니 아이들도 말리지 못했다.

“모처럼 같은 반이니까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맞아, 언제든지 등교해.”

사월세음과 김유리가 그렇게 말한 것에 이어 한이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 아이들과 어울리는 한이를 보며 독고미로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출석율이 오르지 않는 건 아쉬웠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과 반 아이들에게 친구가 늘어나는 걸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    *    *

시간이 흘러 개학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방학 동안 집에 머물거나 혹은 여행, 단기 유학, 연수 등으로 기숙사를 떠난 학생들이 하나둘 지익관으로 돌아왔다.

지익회관을 오고 가는 학생들이 늘고 시뮬레이터 룸도 예약을 하지 않으면 이용하기 어렵게 되었다.

여러 요인이 2학기의 시작이 가까워졌다는 실감을 줬지만, 가장 큰 건 0반의 존재였다.

“야, 찍관 매점 다 털렸대!”

“기숙사 식당 빵도 다 털림요.”

“3학년 0반 그놈들은 방학 사이에 위장이 얼마나 늘어난 거야.”

“금찬솔이랑 왕찬솔이는 또 뭔 사고 쳐서 제갈 쌤한테 혼나고 있음?”

“2학기 개학 기념으로 제갈재걸 쌤한테 출근용 꽃길 깔아 주려다가 걸렸대.”

2학년 0반 선배놈들은 여전히 제갈재걸 처돌이였고, 3학년 0반 선배놈들은 원시인들이었다.

특히 3학년 0반 선배놈들이 빵을 털어 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우기환 일당은 마지막으로 남은 소시지 빵을 두고 대결을 펼치다가 매점 간판을 날려 먹기도 했다.

‘극한의 기아 상태에서 처음 맛본 빵이 그렇게 맛있었나.’

시장이 반찬이라고는 하지만 3학년 0반 선배놈들의 입맛 변화는 극단적이었다.

지익회에서는 빵 공급량을 두 배 이상으로 늘렸지만, 굶주린 3학년 0반 원시인놈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했다.

“……1학년 0반은 그대로여서 고마워.”

지익회 소속이 된 박승현이 빵 박스를 나르며 그렇게 말했다.

방학 사이에 목우람이 들어와 1학년 0반 기숙사생이 한 명 늘긴 했다,

그러나 목우람은 호구일 뿐이지 사고를 치는 문제아는 아니었다,

적어도 같은 기숙사 소속인 권레나에게 피해를 줄 짓은 안 할 거다.

“많이 바쁜 것 같네. 도와줄까?”

“아니, 괜찮아. 3학년 선배들이 안 계실 때를 대비해서 미리 익숙해져야지.”

내 제안에 박승현이 씩씩하게 답했다.

최근 대부분의 실무는 1학년이 맡게 되어 박승현이 바빠지게 된 것 같았다.

학생회장, 지익회장, 총동아리회장 선거 시즌이 가까워져 각 자치기구의 2, 3학년 학생들은 인수인계 준비를 시작했으니까.

“다음 지익회장 후보는 정해졌어?”

“응, 아마 계이담 선배가 단일 후보로 나오지 않을까? 2학년 0반 선배들은 거의 다 기숙사생이잖아. 그 선배들을 감당할 사람이 계이담 선배밖에 없대.”

단일 후보라는 말에 의아했지만, 덧붙여진 설명을 듣고 납득했다.

금찬솔과 왕찬솔에게 휘둘리는 자치기구 회장은 영 믿음직스럽지 못할 거다.

현재 학생회장인 도원우, 선도부장 오혜지, 지익회장 성시완은 금찬왕찬 콤비에게 대항할 만한 실력과 성정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다음 지익회장은 계이담이 맡게 될 것 같았다.

“그럼 일하러 가 볼게. 다음에 보자!”

“그래.”

박승현과 헤어진 후, 2학년 주요 인물과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를 떠올렸다.

‘2학년 중에선 염준열, 곽경구, 천동하 정도면 금찬왕찬에게 지지 않겠지.’

하지만 저 셋은 통학 중인 데다 학생회랑 선도부 소속이다.

지익회를 맡긴 어려울 거다.

‘기숙사 소속인 2학년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있긴 한데…….’

2학년 중에선 마진승이 기숙사 소속이다.

그러나 마진승은 현재 선도부 소속인데다 금찬왕찬에게는 못 당했다.

마진승은 전형적인 ‘실전에 약한 타입’이라 이계 공략에서는 제대로 활약을 못 했다.

나름 약점을 극복해 본다고 불에 약한 주제에 상극의 이능을 가진 염준열에게 라이벌 각을 세워 보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진승은 출중한 이능을 타고 났는데도 아직도 이명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게임 속의 마진승이 이명을 받은 건 사망한 이후였지.’

그 시나리오의 주역은 천동하, 마진승 두 사람이었다.

둘의 목적은 ‘염준열을 적으로부터 도주시키는 것’이었다.

안중지계(眼中之界) 천동하의 ‘건곤(乾坤)을 품은 눈’과 그의 특출난 두뇌 그리고 마진승의 능력을 이용해 목적 달성에는 성공했다.

염준열을 빼내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두 사람은 죽고, 둘의 죽음을 안 염준열은 폭주를 일으키고 얼마 가지 않아 흑막의 계략에 숨을 거뒀다.

이 과정은 나중에 밝혀져 마진승은 사후 이명을 받게 되었다.

“의신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앞에 안다인이 있었다.

“아, 미안. 불렀어?”

“아니, 그냥 인사하려고.”

안다인은 각종 휴대용 벌레 퇴치 스프레이를 가득 들고 있었다.

여름철에 끊임없이 출몰하는 흉측한 불청객을 상대로도 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응전하는 게 과연 타이틀 히로인다웠다.

모처럼 만난 김에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명 받은 거 축하해.”

“고마워.”

안다인은 방학 중의 활약을 인정받아 위성으로부터 이명을 받았다.

안다인의 이명은 ‘신탄(神彈)의 사수’.

신이 깃든 듯한 탄환을 쏘는 안다인과 잘 어울렸다.

청소년 수련회 때 출몰한 이계의 공략 외에도 미궁 수색, 재보 탈취, 암살 저지 등 안다인은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눈부신 활약을 보여 이명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주수혁도 이명을 받았지.’

주수혁, 안다인은 게임과 같은 이명을 받았다.

전개가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두 사람이 단독으로 해결한 퀘스트의 내용은 변함이 없어서 그런 듯했다.

축하가 끝난 후에는 새로 입수한 올무 사진을 전송해 주기도 하며 나와 안다인은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올무의 위대함을 알아주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와 나누는 대화는 몹시 보람찼다.

*    *    *

플레이리스트의 첫 방영일.

현재 1학년 0반 기숙사 소속 학생들은 플레이리스트를 함께 보기 위해 지익회의 스터디 룸을 대여했다.

심야에 방송하는 바람에 통학 중인 아이들과 같이 볼 수 없는 게 아쉬웠다.

방송이 시작한 지 30분 후, 처음으로 독고미로가 등장했다.

간략한 프로필 영상과 자막이 지나가고 화면 속 독고미로가 심사위원을 향해 인사했다.

“아, 쟤가 우리 반 애라고?”

“네! 등교는 자주 못 한다고 했어요. 아마 학교에서 촬영하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탁거산 도인과의 수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맹효돈이 분홍 머리를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월세음도 본가 생활을 끝내고 기숙사로 복귀한 상태였다.

“어떡해, 긴장한 것 같다…….”

권레나가 독고미로를 보며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대에 서 본 경험이 있는 권레나는 독고미로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을 거다.

독고미로가 예선전을 통과하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어도 다들 초조해 보였다.

그만큼 독고미로의 시선은 불안정했고, 목소리는 몹시 떨리고 있었다.

“낯을 가리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해합니다.”

권레나와 가장 멀리 떨어져 앉은 목우람이 그렇게 발언했다.

그 말엔 사월세음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에 뵈었을 때는 그런 거 잘 못 느꼈는데. 카메라 앞이라 긴장한 걸까요?”

독고미로의 노래와 춤이 끝나고 심사위원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합격이냐, 불합격이냐 의견이 분분해 결국 다수결로 정했고, 독고미로는 한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보조 MC 염준열이 합격했다는 말을 전하자 독고미로가 몇 번이나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

한이는 고통을 참는 것 같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독고미로를 보고 있었다.

마침 본선에 진출하게 된 독고미로 관련 영상이 흘렀다.

어렸을 때 찍은 듯한 프로필 영상이었는데, 막 초등학생이 된 독고미로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게 지금의 모습과 비교되었다.

‘그사이에 독고미로한테 무슨 일이 있었나?’

한이의 태도도, 독고미로의 변화도 마음에 걸렸다.

*    *    *

방송이 끝나고 기숙사 방에 돌아온 후에도 죽 ‘플레이리스트’에 관해 생각했다.

플레이리스트의 출연자들은 자신들이 플레이어로서의 이능이 아닌, 진짜 펼치고 싶었던 재능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내 플레이어 캐릭터도 있었지.’

환속한 후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건지 짧은 머리를 잘 정돈한 ‘내장산의 성자’의 랩은 인상 깊었다.

심사위원 중 힙합 뮤지션으로 이름난 연예인이 즉석에서 프리스타일 랩 배틀을 요청하자 ‘내장산의 성자’는 망설임 없이 응했다.

30분 넘게 이어진 랩 배틀은 15초 정도로 짧게 편집되어 있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두 래퍼의 내공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막힘없는 랩에 탄복한 몇몇 심사위원들은 프리스타일 랩 배틀 중에 합격 버튼을 연타해 댔다.

‘그런 재능을 못 살리다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과 우리 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노력해야겠다고 느꼈다.

이 세계가 배드 엔딩을 피한다면 플레이어들도 제 꿈을 펼칠 수 있을 거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문득 용제건의 말이 떠올랐다.

―까마귀 가면을 쓰고 다닐 거면 까마귀 마왕과 그가 아끼는 인간의 기호품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더구나.

―단순히 까마귀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만으로는 그의 호의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어.

‘마왕의 기호품이라…….’

까마귀 마왕으로 이름난 시델렌티움은 까마귀의 눈을 빌려 세계를 관조하고 방관과 침묵을 고수한다.

워낙 많은 눈이 존재하니 그가 나를 인지할 때는 시간이 좀 걸렸을 거다.

그 까마귀 마왕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을 대비해 미리 움직여야 할지 모른다.

내가 가진 정보를 추려 내며 다음 수를 생각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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