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무대의 아래 (2)
문새론의 유도로 ‘그 단어’가 언급되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그 단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 환몽 경매의 적벽괴도! 듣고 보니까 비슷한 점이 많네.”
“그 템스강 아래에 있던 일도 그렇고 이상한 경매가 많은 것 같은데.”
“이계 충돌 이후에 희귀한 아이템, 능력자가 생긴 것에 반해 이를 관리하는 법이나 제도는 좀 늦게 생겼잖아. 그래서 경매나 괴도가 판을 치는 것 같아.”
“자칭 괴도, Phantom Thief가 적벽괴도를 모티브로 삼은 게 아님?”
‘그 단어’가 들릴 때마다 한 대씩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그 단어’ 자체도 그렇지만, 신문부원 아이들이 큰일 날 소리를 했다.
그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그 단어’의 괴도가 있든 없든 내키는 대로 괴도짓을 하고 다니던 놈이다.
혹시라도 뒤에서 모티브 운운하는 이야기가 돌면 ‘그 단어’에게 흥미를 갖거나 대항심을 불태워 한반도로 올 거다.
‘설마 ‘그 단어’에 흥미를 갖고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는 건 아니겠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행여 기사로 낼까 봐 말을 돌리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문새론이 아주 정당한 발언을 했다.
“그건 너무 갔다. 환몽 경매 사건이 크긴 했어도 한국에서만 난리였잖아.”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문새론다운 현실적인 발언이었다.
그러나 뒤에 추가된 발언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적벽괴도가 글로벌하게 인지도를 얻으면 좋겠지만!”
전혀 좋지 않다.
이제 반년이 넘게 지난 일이니까 빨리 잊어 줬으면 좋겠는데 글로벌한 인지도라고?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 믿지만, 해외에서도 적벽괴도를 운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조의신?”
황지호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른 놈은 몰라도 이 망할 노친네한테 ‘그 단어’가 역린인 걸 들키면 안 된다.
‘그 단어’를 외치며 은광고 전역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처웃는 노친네가 눈에 선했다.
오그라드는 손과 죽어 가는 얼굴에 힘을 줬다.
“왜.”
“……지금 네 태도에선 기시감이 느껴지는군. 흠.”
“기시감이라니무슨소리하는지잘모르겠는데.”
황지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멋대로 결론을 내린 건지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네 정체에 관한 것이라면 걱정하지 말도록. 은인의 정체를 떠들고 다닐 이유는 없다.”
정체가 들키냐 마냐 역시 중요한 문제긴 한데.
당면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라면 모를까. 이 노친네가 먼저 알게 할 수는 없어!’
저번에 닥쳤던 위기 상황과 달리 지금 내 품에는 올무가 없었다.
그저 굳은 얼굴로 의아해하는 눈치인 황지호를 외면하는 게 고작이었다.
“음, 이대로 1면에 넣을 기사를 정해도 되지 않을까?”
위기를 끝낸 건 문새론의 목소리였다.
다행히 저 말과 함께 주제가 바뀌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꼈다.
“그렇네. 2학기 시작하면 바쁘잖아.”
“이계 공략 공격대 실습도 시작할 거고, 수강 신청 정정도 해야 하고…….”
“응, 오늘 모인 자료랑 써 온 초고의 질이나 분량이 괜찮은 것 같아. 더 기삿거리 찾을 필요 없을 것 같은데.”
2학기에 발행하는 첫 번째 신문의 1면은 신문부 1학년생이 정한다는 전통이 있었다.
선배들, 특히 3학년들이 졸업 준비로 바빠져 1학년들이 쓰는 기사를 봐 줄 틈이 없어진다.
선배들이 서포트할 수 있을 때 1면에 기사를 써 보라는 배려였다.
“자, 그러면 1면에 넣을 기사를 정하자! 1면에 메인 기사 하나, 보조로 들어갈 기사 둘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회의가 끝난 직후,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홀로그램에 뜬 두 장의 사진을 보니 머리가 아찔해졌다.
“은광고 2학기 첫 신문의 1면을 장식할, 기념비적인 메인 기사가 결정되었습니다!”
은광고 2학기, 신문부 1학년생이 담당하게 된 첫 1면을 장식할 메인 기사.
그 기사의 타이틀은 ‘적벽괴도 VS Phantom Thief’였다.
* * *
신문부 아이들과 헤어진 뒤로 기숙사에 어떻게 돌아온 건지 기억이 애매모호했다.
황지호가 제 저택에 질 좋은 서리태를 들여와 콩국수를 먹느니 마느니 하는 소리를 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냥 무시하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다들 잊을 때가 됐는데 ‘그 단어’가 은광고 신문 1면에 뜨게 생겼어!’
학교 신문을 대체 몇 명이나 보겠느냐마는, 은광고의 졸업생 빼고 재학생과 교직원 중에서 10%만 봐도 200명이다.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200명, 혹은 그 이상이 ‘그 단어’를 본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멍하니 있을 때, 디바이스 메시지가 연속으로 쏟아졌다.
딩동, 딩동, 딩동.
알림창을 보니 한 명이 지속적으로 보내는 메시지인 것 같았다.
황지호가 날린 메시지 테러라면 디바이스 알람을 꺼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우기환] 빵
[우기환] 빵
[우기환] 빠ㅇ
범인은 3학년 0반 원시인 대장 우기환이었다.
우기환은 지속적으로 빵을 외치고 있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다급하게 입력한 탓인지 글자도 좀 깨져 있었다.
‘원시인 생활이 길어져서 언어 능력이 퇴화한 걸까?’
야만인이 최첨단 기술의 결정체인 디바이스를 이용해 메시지를 보내다니, 굉장했다.
그런데 이 메시지만으로는 뭔 소린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나] 안녕하세요, 선배님. 무슨 말씀이신가요?
[우기환] 빵 ㅇㄷ
옛 원시인이 남긴 상형 문자를 분석하는 심정으로 우기환이 남긴 메시지를 분석했다.
본능, 식욕에 따라 움직이는 원시인 우기환과 빵에 관해 생각해 보다 결론을 내렸다.
‘혹시 저번에 먹은 빵을 어디에서 파는지 궁금해서 그러나?’
주오 아일랜드에서 우기환이 찰옥수수빵 강탈을 위해 빵셔틀을 습격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방윤섭이 내 빵셔틀이라는 건 은광고 내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방윤섭이 공수해 온 빵을 파는 곳을 내가 지정하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3학년 0반과 방윤섭은 천익산에서 마주쳤던 것 외에 교류가 없었을 테니 디바이스 코드도 모르겠지.’
우기환이 빵집 주소를 알아내겠다고 나나 빵셔틀을 직접 찾아와 패악을 부리기 전에 메시지를 보냈다.
[나] (링크)
[나] 찰옥수수빵은 여기에서 샀어요.
친절하게 통신 판매 주소를 올려 줬더니 답변이 왔다.
[우기환] ㄱㅅ
그 이후로는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개학할 때는 교사들을 위해서라도 저 원시인이 언어 구사 능력을 되찾길 바라며 꿈 없이 잠들었다.
* * *
황호가 저택에 도착하자 풀죽은 얼굴을 한 은호의 후예들과 신수가 그를 맞이했다.
“황호 님…… 의신이 오빠는요?”
“오늘 황호 님이 의신이 형이랑 부활동한다고 하셨으니까 같이 올 줄 알았는데!”
끄응…….
황호는 부활동 내내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던 조의신을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조의신은 신문부원들이 입을 열면 열수록 지치는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위화감을 느끼긴 했지만, 아직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단순히 대화가 문제가 아니라 다른 원인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단서가 부족하군.’
은호의 후예들은 조의신과 대화하는 걸 좋아한다.
그러니 후예들 곁에 있으면 그가 더 지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녁 식사 자리에 억지로 데려오는 걸 포기했다.
“지친 것 같아 쉬게 해 줬다.”
“의신이 형 어디 아픈 거예요? 그럼 혼자 보내면 안 되지 않아요?”
“조의신의 몸에는 이상이 없었다.”
“황호 님…… 의신이 오빠는 영약 잘 드신 거죠? 그런데 왜 지친 거죠?”
“전부 먹은 걸 확인했다.”
왕왕! 크르르……!
황호는 은호의 후예들과 신수의 추궁에 한참을 시달리다 겨우 티타임을 가졌다.
황호가 말린 도화(桃花)와 천도복숭아를 같이 우려낸 복숭아차를 마시는 사이, 황호의 맞은편에 백호가 앉았다.
요새 백호는 저택 내에 머물지 않고 신역 이곳저곳을 자주 산책하는 것 같아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근래에 들어 산령이 보이지 않는군.’
특히 백호가 있을 때는 꽁지를 말고 나타날 기색이 없었다.
‘은호의 후예들도 망할 달토끼에게 쓴맛을 보여 준 이후론 그다지 심한 장난을 치지 않게 되었지. 산령이 잠잠해진 거다.’
백호가 산령을 제대로 교육시켰다는 생각에 흡족해졌다.
백호에게도 차를 한 잔 건네며 기분 좋게 티타임을 이어갈 때, 디바이스에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거슬리는 쥐] 황호, 바빠요?
요새 존댓말의 빈도가 늘어나 황호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꾀돌이로부터의 메시지였다.
* * *
며칠 뒤, 나는 또 ‘그 단어’를 직접 듣게 되었다.
“의신이는 염준열 선배님과 연락한 적이 있다고 하셨죠? 그럼 선배님도 의신이가 적벽괴도 님이라는 걸 알고 계신 거예요?”
사월세음의 단어 선정으로 심적 데미지를 입었다.
그래도 사전에 말을 맞춰 두지 않으면 낭패를 볼 것 같아서 힘겹게 정신 줄을 붙잡고 대답했다.
“……아니, 모를걸.”
“아, 그렇군요. 그럼 의신이가 직접 염준열 선배님께 밝힐 때까지는 말하지 않을게요!”
착한 사월세음의 답변을 들으며 심호흡했다.
오늘은 염준열과 약속한 날이다.
염준열이 직접 연락한 건 나와 사월세음이었지만, 결국 다 같이 만나게 되었다.
현재 약속 장소에 도착한 건 우리 두 사람뿐이었지만.
“안녕, 일찍 왔네.”
곧 염준열이 도착했다.
염준열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안녕하세요, 염준열 선배님.”
“응, 안녕.”
날씨가 계속 좋아서 홍룡의 컨디션이 좋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아침에 염준열이 보고한 대로 ‘기척 죽이기’를 두 번 연속 성공해서 그런 걸까.
어쨌든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행복해 보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반 애들 중에서 올 수 있는 애들은 불렀어요. 다들 바쁜지 올 수 있는 건 유리랑 지호랑 한이 밖에 없었지만…… 곧 올 거예요.”
“그래, 유리도 오는구나.”
“네. 꼭 불러 달라고 말했어요.”
그러고 보니 염준열과 김유리는 같은 학생회 소속이다.
학생회 사람 수가 적지 않다고 하지만 서로 모를 리도 없는데 왜 바로 김유리에게 연락하지 않은 걸까?
“유리와 아는 사이세요? 아, 두 분 다 학생회 소속이셨죠!”
“응. 유리한테서 0반 이야기도 가끔 듣고 있어.”
“그러면 유리한테 미리 연락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나와 같은 의문을 품은 듯한 사월세음이 그렇게 묻자 염준열이 멋쩍은 얼굴을 했다.
“어머니께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하셨어.”
동갑내기 커플로 이름난 염방열과 용족의 후예인 염준열의 어머니의 로맨스는 상당히 유명한 편이다.
일찍 결혼했다고 듣긴 했지만,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고?
용족이 후예를 얼마나 아끼는데 그렇게 빨리 결혼에 성공하다니, 염방열도 참 대단한 인물이다.
염준열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도 비슷한 전철을 밟을까 봐 이성과의 연락은 아주 경계하셔.”
염준열의 어머니 건은 용족에게 있어 트라우마인 모양이다.
그래서 김유리한테는 바로 연락하지 못했구나.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운 배려심이었다.
염준열은 괜히 처신을 잘못해 김유리에게 해가 가는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한 것 같았다.
‘용족이 경계하는 중이라면 스승으로서 연락하는 걸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용제건도 나와 염준열이 스승과 제자로서 연락한 걸 바로 눈치챈 걸 보면 여러모로 경계하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
고민하던 중에, 반 아이들이 차례로 도착했다.
김유리는 조금 일찍 도착하고 황지호는 시간에 정확하게 맞춰 도착했는데, 한이가 보이지 않았다.
“미로는 조금 늦게 불렀다고 했죠? 그런데 왜 한이가 안 올까요…….”
“한이가 늦을 애가 아닌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아이들의 걱정이 깊어졌지만 황지호의 여유 넘치는 모습을 보니 별일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한이는 무사히 등장했다.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독고미로와 함께.
“안녕, 얘들아! 와 줘서 고마워. 독고미로라고 해.”
독고미로는 패왕의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평범한 학생다운 인사를 했다.
그저 웃고 있을 뿐인데도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고, 목소리도 맑고 톤이 높아 귀가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게임 속에서 봤던 무기력한 모습도, 화면 너머로 본 패기 넘치는 모습과도 달랐다.
‘쟤가 야구 배트로 용역 업체와 파출소 하나를 박살 낸 패왕이라고?’
한편, 김유리는 기뻐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독고미로와 대화를 나눴다.
김유리의 사교력은 초면인 독고미로를 상대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김유리의 주도로 순식간에 전원 디바이스 코드를 교환하고 통성명을 나눴을 때였다.
“미로는 한이랑 전부터 아는 사이라고 들었어.”
“응, 나랑 한이는 절친이야!”
“……그랬었어?”
한이는 미묘한 얼굴로 의문을 표현했지만, 독고미로는 제 페이스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연락해서 토라진 거야? 한이야, 그러지 마. 상처받아!”
웃으며 말하는 독고미로의 음성에서 다정함과 애교가 넘쳤다.
독고미로가 저렇게 말하며 한이 옆에 붙으니 독고미로 말대로 절친끼리 장난을 치는 걸로 보였다.
한이는 무반응인데도 말이다.
그때 황지호가 끼어들었다.
“한이의 의문은 합당한 것으로 보이는군.”
“응?”
노친네가 사고를 쳤다.
“한이와 죽마고우 사이라 할 수 있는 건 이 몸이다.”
호랑이가 더위를 먹은 건가, 황지호가 헛소리를 했다.
나도, 한이도 대놓고 정색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