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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60화 (260/925)

47. 패자 부활전 (7)

투명했던 아이템 카드가 마치 내 이능파를 흡수한 것처럼 어둡게 변했다.

카드는 순식간에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실체화가 안 되잖아?’

보통 아이템 카드는 플레이어의 의지에 의해 바로 실체화된다.

그러나 무명의 운명은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아이템 카드는 색이 변했을 뿐, 여전히 카드인 채로 그대로 내 손에 있었다.

특별한 아이템 카드인 만큼 단순히 실체화를 시키겠다는 의지만으로는 실체화가 안 되는 건가.

‘무명의 운명은 이름, 희귀도, 효과가 사용자에 의해 변한다고 했어. 또 목우람의 스승이 아이템 카드를 각종 무기로 바꿔 가면서 싸운다고 했지.’

아이템 사용자의 이미지를 반영하여 ‘무명의 운명’이 형태를 바꾸는 게 아닐까?

구체적인 무기의 이미지를 떠올리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현재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알아 두고 싶은데.’

그런 막연한 이미지만으로는 안 되는 것 같았다.

무기 도감이라도 옆에 띄우고 어느 희귀도의 무기까지 변하는지 확인해야 하는 걸까.

후보는 머릿속에 떠올렸지만, 딱 집히는 게 없었다.

“…….”

시선이 따갑게 느껴져 고개를 드니 백호군이 맞은 편에서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지금 백호군의 눈에는 내가 카드를 들고 멍청하게 서 있는 걸로 보일 거다.

“시험해 보고 싶은 건 그게 끝인가?”

“아니.”

이렇게 된 이상 백호군의 조언을 구해 보기로 했다.

무(武)에 조예가 깊고 무기에 관한 지식이 해박하며 나와 여러 차례 대련한 백호군이라면 뭔가 떠올려 줄 것 같다.

“내가 쓸 수 있는 무기 중에 가장 강력한 무기가 뭐라고 생각해?”

먼저 후보로 생각한 건 롯드 같은 마법을 사용하는 무기와 상보심금파 두 가지였다.

그런데 어쩐지 와닿지 않았다.

롯드류 무기 중에는 특수한 이계에서 얻을 수 있는 ‘고대의’라는 수식어가 붙는 UR급 롯드가 있긴 하다.

상보심금파 역시 UR급이다.

그러나 상보심금파는 이미 소지하고 있고, 롯드류 무기도 어렵겠지만 획득은 가능할 거다.

“네 능력은 네가 더 잘 알 것 같군. 네가 가장 잘 다룰 수 있고, 너만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고려하는 게 좋겠지.”

내가 가장 잘 다룰 수 있고, 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

무기와 연관 지어서 생각한다면 ‘만물 사용’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내가 가장 잘 다룰 수 있고, 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꼽는다면 ‘만물 사용’보다 먼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 세계에는 순수한 무력만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운 강한 존재들이 많지만, 내게는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가 있었다.

내가 플마고를 끝까지 놓지 않은 플레이어여서 얻을 수 있던 게이머로서의 지식, 경험 그리고 최대치로 육성한 캐릭터들과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

나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꼽자면 내가 게이머로서 플레이한 기록을 압축하고 형상화한 이능, 광림이 될 거다.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능력, 무기는 플레이어의 궤적이야.’

파아아앗!

플레이어의 궤적을 떠올린 순간 검게 변한 ‘무명의 운명’이 다시 빛을 뿜었다.

빛은 무언가를 만들고, 새기듯 아이템 카드 주변을 어지러이 움직이다 사라졌다.

빛이 사라진 무명의 운명은 여전히 검은색의 이능파를 두르고 있긴 했지만, 이전과 달리 무늬가 떠올라 있었다.

카드 뒷면에 새겨진 무늬는 매우 익숙했다.

그 무늬를 본 순간 경악이 차올랐다.

‘설마, 이건…… 이 카드는……!’

카드의 뒷면에는 국민망겜 ‘플레이어 마이스터 고교’의 게임 타이틀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이 로고가 새겨진 카드는 이 세계에 와서도 몇 번이나 봤다.

나는 즉각 둘을 대조해 보기로 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내 이능파가 수백, 수천 장의 카드로 변해 내 몸에서 흘러나왔다.

플레이어의 궤적을 다루는 데에 익숙해진 이후에는 필요한 카드만을 소환했지만 이번에는 모든 카드를 꺼냈다.

서방칠수가 수놓인 밤하늘 아래에 무수한 숫자의 카드가 별처럼 빛났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플레이어의 궤적’의 카드를 향해 손을 뻗어 잡았다.

그리고 모습이 변한 ‘무명의 운명’ 카드를 나란히 두었다.

‘똑같아!’

카드의 크기도, 뒷면에 새겨진 플마고 로고도 같았다.

“답을 찾은 것 같군.”

백호군이 카드 사이에 둘러싸인 나를 보다 광림을 발동해 무기를 소환했다.

스르릉!

백호군은 다시 백아를 들었다.

그의 주변에 새하얀 이능파가 넘실거리다가 그림자 권속, 영호(影虎)가 소환되었다.

“시험해 보도록.”

백아와 영호를 동시에 꺼낸 것을 보니 바로 전력으로 임하라는 뜻 같았다.

백호군의 말에 따라 곧바로 새로 얻은 피스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이 무명의 카드가 내가 생각하는 종류의 무기라면 굉장히 활용성이 높은 피스가 될 거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하면 외양을 조의신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더라도 그 캐릭터로 바뀌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플레이어의 궤적을 동시에 두 개 발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예를 들자면 강력한 재생, 방어 이능인 곽경구의 광림, ‘100초의 은총’과 최강의 은신 능력인 전무영의 광림, ‘그림자 없는 시간’은 동시에 사용할 수 없었다.

제한 시간에 여유만 있다면 연달아서 차례로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은신과 재생을 동시에 하는 건 불가능한 셈이다.

하지만 두 캐릭터 중 하나는 내 광림을 통해서, 다른 하나는 무기를 통해서 발동시킨다면 어떨까.

〈대상 캐릭터의 광림, ‘파운참뢰(破雲斬雷)의 백아(白牙) 소환’을 사용합니다.〉

나는 먼저 백호군의 광림을 ‘플레이어의 궤적’으로 발동시켰다.

그리고…….

〈대상 캐릭터의 광림, ‘홍룡소환(紅龍召喚)’을 사용합니다.〉

동시에 염준열의 광림을 ‘무명의 운명’을 통해 사용했다.

뒷면에는 플마고의 로고가 있었지만, 앞면에는 아무것도 없던 카드 위로 염준열의 모습이 떠오르다 사라졌다.

화르륵!

백아를 쥔 내 뒤로 이공간의 틈이 열려 불의 용이 나타났다.

내 주변을 맴돌던 카드들과 무명의 운명 카드 대신 백아와 홍룡이 나타나면 동요할 법도 한데, 백호군은 별 반응이 없었다.

아예 안 놀란 건 아닌 것 같았다.

백호군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웃는 건가?’

곧장 백호군은 표정을 지우고 백아를 나를 향해 겨누고 영호를 움직였다.

카앙!

백호군의 백아와 내가 부른 백아가 부딪쳐 하얀 섬광이 시야를 덮었다.

시야가 일순 가려졌지만 백호군은 영호를 부려 사정 봐주지 않고 내 어깨를 뜯으려 했다.

그림자 호랑이가 이빨을 번뜩이며 달려들었지만, 지금 그쪽에 대응할 수는 없었다.

‘지금 눈을 떼면 백아의 검날이 내 급소를 찌르겠지.’

그러나 지금 나는 백아만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카아앙!

크게 백아를 휘둘러 백호군을 밀어내고 여전히 시선은 백호군에게 고정한 채로 손가락을 튀겼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원격 점화’를 사용합니다.〉

파아아……!

불꽃이 타올라 그림자 호랑이를 삼키고 백호군도 삼키려 기세를 늘렸다.

백호군은 불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크게 뛰었는데, 그 틈을 노리지 않고 파고들었다.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꼴이 되었지만, 지금 내게는 용왕신의 가호, ‘나의 불이 너를 태우는 일은 없으리라’가 걸려 있는 상태였다.

불길 사이를 주저 없이 뚫고 가 불꽃을 휘감은 백아로 백호군의 목을 겨누었다.

“…….”

백호군은 내 맹공에도 뒤로 물러나지 못했다.

그의 뒤에는 화염을 휘감은 홍룡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급소를 겨눈 상태는 일순이었는데도 아주 길게 느껴졌다.

“훌륭하군.”

영호는 모두 홍룡의 화염에 타서 사라졌다.

백호군의 뒤에는 홍룡이, 앞에는 백아를 겨누고 있는 내가 있었다.

“처음으로 한 판을 내줬군.”

백호군이 페널티를 안고 있다고 하지만 여태까지 대련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무명의 운명’이라는 일종의 반칙기를 사용한 기습 공격이라고 하지만, 플레이어의 궤적을 동시에 발동시키고 처음으로 대련에서 백호군을 이겼다.

“생각 이상이었다. 성장했군.”

왕! 왕왕!

백호군의 칭찬에 이어 올무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열심히 짖는 게 나를 칭찬하고 축하해 주는 것 같았다.

플레이어의 궤적을 해제하자 어느 사이엔가 손에 돌아온 카드를 움켜쥐며, 백호군과 올무가 하는 칭찬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    *    *

기숙사 내 방.

평소처럼 방이 넓게 느껴졌지만, 오늘은 쓸데없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인정받고, 계속 대련을 지켜본 올무에게도 축하를 받은 덕일 것이다.

‘무명의 운명에는 아직 다른 활용 용도가 있을 것 같긴 한데…… 지금은 이 피스를 유용하게 쓸 방법을 확실히 파악해 둬야지.’

두 개의 광림을 동시 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제한 시간이라는 문제가 남아 있긴 했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능력을 동시에 두 개나 사용할 수 있다니 무서울 게 없었다.

딩동.

성취감에 젖어 잠들려 할 때, 메시지가 쌓여 있는 게 보였다.

내일 일어나서 확인할 생각이었는데 상대는 답변을 줄 때까지 메시지를 날릴 생각인 듯했다.

무음 모드로 해 둬도 디바이스가 쉬지 않고 깜빡이는 게, 어지간히 급한 것 같았다.

고민 끝에 메시지창을 열었다.

[옥토연] 은인아.

[옥토연] 은인아아……,

범인은 옥토연이었다.

[옥토연] 은인아, 은인아…… 은호의 후예들은 요즘 잘 지내?

옥토연은 얼마 전에 은호의 후예들이 심한 장난을 쳤다면서 나한테도 속풀이를 했었다.

옥토연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끔찍한 장난’이라고 말했는데, 정황을 고려해 보면 그 장난의 정체는 황지호와 적호도 속여 먹었던 시체놀이로 추측되었다.

옥토연은 그 자리에서 펑펑 울면서 은호의 후예들이 너무 심한 장난을 쳤다고 크게 잔소리를 한 바람에 사이가 서먹해진 모양이었다.

[옥토연] 후예들은 밥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있지?

[옥토연] 이젠 이상한 장난 안 해?

[옥토연] 미친 호랑이가 뭔 짓 안 했지?

[옥토연] 또 착한 애들이 흉한 놀이 안 배웠지?

미친 호랑이가 황명호 대저택에 있는 호랑이들 중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황지호일 거다.

[옥토연] 은인아?

[옥토연] 은인아아아아!

[옥토연] 왜 메시지 확인 안 해?

[옥토연] 미친 호랑이도 요새 내 메시지 확인 안 하던데.

[옥토연] 미친 호랑이가 은인한테도 이상한 거 가르쳤어? ㅡㅡ

[옥토연] 이상한 거 가르친 거 아니냐고!

미친 호랑이가 옥토연을 상대로 안읽씹을 하나 보다.

내버려 두면 내 핑계를 대고 후예를 보러 은광구로 쳐들어올 기세라 답변을 하기로 했다.

한참 메시지를 주고받은 끝에 대화의 주제는 은호의 후예들에서 곧 완전히 망할 예정인 TC 나이츠의 야구 얘기로 바뀌었다.

이제 막 9월 초가 지났는데 TC 나이츠는 가을 야구에 진출할 변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의 수, 트래직 넘버가 1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여서 옥토연이 더 심기가 어지러운 듯했다.

아직 트래직 넘버가 사라지지는 않아서 희망 고문을 당하는 중인 모양이다.

‘……트래직 넘버가 1이면 앞으로 남아 있는 모든 경기를 이겨야 하잖아. 플레이오프는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TC 나이츠 팬은 또 가을 야구용 팬 점퍼를 옷장 안에 묵히게 생겼다.

가을 야구가 시작되는 10월 중순부터 경기도 없을 테니 옥토연은 이제 위성 일에 집중해 줬으면 좋겠다.

옥토연을 잘 달래고 언젠가 경기를 같이 보러 가자는 약속을 했다.

옥토연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걸 마치고 진짜 자려고 했을 때였다.

[발신자: 장남욱]

심야, 장남욱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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