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첫 실습 (8)
황지호가 나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피가 묻어 걷은 교복 소매 쪽이었다.
‘회복 아이템이 포션 타입이라 피도 다 씻겨서 안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출혈량에 비하면 옷에 별로 피가 튄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황지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뛰어난 감각을 가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과 우리 반 아이들은 놓치지 않고 그 말을 들었다.
“피 냄새?”
“어? 누가 다쳤어? 회복 아이템?”
용제건이 바로 내 쪽을 봤다.
이계가 클리어되어 실체를 잃기 전, 아홉 명은 같은 장소에 있었다.
그런데 내가 합류한 직후 황지호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으니 다들 그 대상이 나라고 짐작했을 거다.
용제건에 이어 반 아이들의 시선은 내 쪽으로 쏟아졌다.
“어, 그러고 보니 피 냄새 좀 나는 거 같기도 하네. 에너미 냄새랑 섞여 있긴 한데.”
호랑이만큼은 아니지만 코가 좋은 편인 맹효돈도 피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맹효돈은 파이트 클럽에서 에너미와 싸우다 유혈 사태를 몇 번이나 경험해 봤으니 이를 감지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거다.
“……의신아, 혹시 다쳤어요?”
사월세음도 경상을 입었는데 제 몸보다 내 몸을 먼저 걱정했다.
말을 걸다가 얼굴이 점점 새파래졌는데 아무래도 홍룡의 존재 때문에 저런 것 같았다.
홍룡을 사월세음 쪽으로 보낸 바람에 내가 무리하다 다쳤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조금 베였는데 회복 아이템 썼어. 괜찮아.”
“조금?”
망할 노친네가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황지호는 미궁 타입 이계에 돌입한 이후 계속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더 기분이 별로인 듯했다.
“회복 아이템은 이미 쓴 것 같군. 학교 지급품은 아닌 것 같고. 더 높은 희귀도의 회복 아이템을 써야 할 만큼 다친 건가. 그런다고 이 몸으로부터 피 냄새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황지호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피 냄새도 거슬리지만,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능파가 그 모양…….”
“얘들아, 고생 많았어!”
황지호의 말이 밝은 목소리에 묻혔다.
라이트세이버를 카드화한 김유리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함근형과 권제인, 재러드 리가 보였다.
싸하게 구는 같은 반 돌아이를 두고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아이들이 격하게 이들을 환영했다.
“유리도 고생 많았어! ……권제인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러니까…… 이계 공략 난이도가 좀 올랐던데 수비대는 어땠어?”
아이들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애썼다.
착한 반 아이들이 저렇게 적극적으로 대응하니 황지호도 일단 입을 닥쳤다.
그사이 함근형이 다친 권레나와 사월세음에게 회복 아이템을 사용했고, 권제인은 남은 주말 동안 권레나를 어떻게 요양시킬지 계획을 세우는 듯했다.
“우람 군, 오랜만에 보는구나. 잘 지냈어?”
“네! 저는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한편, 옆에선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회화 교재에 실릴 법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재러드 리는 권레나의 무사를 확인한 후 곧장 목우람에게 말을 걸었는데, 집요하게 안부를 물었다.
‘재러드 리는 세 기사의 맹세 소속이었으니까, 목우람 암살 미수 건에 관해 뭔가 알았나 보네.’
목우람은 뮤즈를 찾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무일푼 여행을 하다 암살당할 뻔했다.
해외에서도 호구였던 목우람은 지금도 소지금이 0원이지만 목우람은 지금이 인생의 황금기인 것처럼 답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그의 뮤즈고, 또 같은 반 소속이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재러드 리는 반신반의한 얼굴로 물러났다.
“첫 실습 고생 많았다. 공헌도를 기반으로 평가 시간을 갖겠다.”
함근형 선생님이 플레이어 SAT-K에서 공개한 공략 결과 자료를 띄웠다.
우리 반이 공략한 이계의 최종 등급은 SR+급으로 판명되었다.
어린이날 잠실 야구장에서 용족과 붉은 사자가 공략한 SR++급 이계의 바로 밑 단계였다.
권레나와 사월세음이 질린 얼굴을 했다.
“어쩐지 너무 힘들더라!”
“R급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너무 높아요…….”
이계 속성으로 ‘미궁’ 외에도 ‘복합 투영 구조형’, ‘진화형’이 붙은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그 단어를 본 아이들이 용제건을 쳐다봤다.
“강한 이능을 가진 존재가 들어갈수록 공략이 어려워지는 이계네요.”
“아…… 수업 시간에 이름은 들어 본 거 같아.”
“뭐야, 부담임 때문이었어?”
망할 노친네 때문이기도 할 텐데.
또 나 때문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용제건은 변명하지 않았다.
용제건은 황지호와는 대조적으로 몹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저런 유형의 이계에 내가 진입하면 난이도가 오르는 건 확실해. 나 때문이기도 하겠지.”
용제건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함근형 선생님은 공략 난이도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공략 난이도가 오를 가능성은 예상했지만, 기껏해야 SR-급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용제건 선생님의 전투력을 낮게 예상한 것 같습니다.”
“함근형 선생님 탓이 아니야. 나도 그 정도로 예상했어. 원래 이계에는 변수가 많잖아.”
“변수 말씀이십니까? 용제건 선생님이 발견한 특이 사항이 있습니까?”
“내 눈으로는 보지 못했어. 하지만 예를 들면…… 그래. 우리 말고도 누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용제건은 황지호를 거쳐 내 쪽에 시선을 멈췄다.
용제건이 입을 열어 뭐라 더 말하기 전에, 송대석이 말을 끊었다.
“9월에 이계 괴담을 하기에는 시기가 좀 안 맞는데. 공헌도나 확인해요. 빨리 끝내고 밥 먹게.”
“대석아!”
“저 새끼는 도시락도 대충 싸 왔으면서 말은 잘한다.”
민그린과 맹효돈이 타박했지만, 송대석은 꿋꿋했다.
억지로 이야기를 바꾼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뜻 보기엔 송대석이 평소대로 눈치 없게 군 것 같았지만, 내 눈에는 말을 돌린다는 고급 기술을 사용한 것으로 보였다.
송대석은 민그린한테 미안하다고 빌면서도 나와 황지호를 흘끗 보고 있었다.
“……그럼 공헌도를 확인하겠다. 공헌도가 높은 순서부터 간략히 공략 과정을 요약해 설명할 것.”
아이들이 조용해지자 함근형 선생님이 홀로그램을 전개했다.
화면에는 이계 공략에 참가한 이들의 공헌도 포인트에 따른 순위가 오름차순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최대 공헌자는 나.
그 뒤로 용제건, 황지호, 한이, 맹효돈, 민그린, 권레나, 사월세음 순이었다.
망할 노친네가 애들 몫을 다 뺏은 건지 송대석과 목우람은 공헌도 0이었다.
“조의신, 너부터다.”
첫 타자는 최대 공헌자인 나부터였다.
내 광림과 상보심금파, 시델렌티움에 관한 사항을 모두 생략하고 에너미와의 교전 과정, 이동 루트만을 짧게 설명했다.
내 설명을 들은 함근형이 흉흉한 얼굴을 했다.
“조의신, 미궁 공략의 기본을 잊었나? 브리핑 과정에서 설명했을 텐데.”
미궁 공략의 기본은 다른 플레이어와의 합류다.
하지만 나는 홀로 보스 룸으로 향했다.
이는 상당히 위험한 행동으로, 용제건이나 황지호가 아닌 우리 반 애가 이런 짓을 했다면 나도 좋은 얼굴을 하진 못했을 거다.
함근형 선생님이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최대 공헌자가 되었지만 칭찬할 수 없구나. 이번 미궁 타입 이계의 개요, 공략 과정, 반성할 점과 개선 방안에 관해 레포트를 제출하도록.”
나는 군말 없이 레포트를 쓰기로 했다.
내 뒤로는 용제건의 설명이 이어졌다.
용제건이 폭주해 일직선으로 벽을 부수고 날뛰었다는 말에 함근형 선생님이 이마를 짚었다.
“저, 그러니까…… 용제건 선생님이 안 오셨으면 위험했을 거예요. 크게 다칠 뻔했어요.”
“맞아요! 어,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맞아! 대, 대체 미궁 속에서 어떻게 온 거지?”
함근형 선생님이 뭐라고 하기 전에 권레나와 사월세음이 열심히 실드를 쳤다.
홍룡에 관한 이야기를 감추다 보니 어색한 티가 났지만, 아이들이 열심히 용제건 편을 드니 함근형 선생님도 더는 추궁하지 못했다.
황지호는 무난하게 눈앞에 보이는 에너미를 처리하다가 폭발음이 들리는 곳으로 이동해 다른 이들과 합류했다고 설명했다.
“……다음에는 실습인 점, 팀플레이 중이라는 점을 고려하며 행동하도록.”
황지호의 폭거에 송대석과 목우람의 공헌도가 0이 되었다는 걸 안 함근형 선생님이 짧게 코멘트했다.
그 뒤, 한이와 맹효돈은 칭찬을 받았다.
맹효돈은 탁거산의 가르침이 아직 몸에 익지 않아 고생하는 중인 것 같긴 했다.
‘바른 자세로 달리는 걸 배운 것과 마찬가지겠지.’
익숙하고 어설픈 자세에 비해 속도도 나지 않고 불편하게 느껴지더라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맹효돈에게 도움이 될 거다.
권레나와 사월세음은 선전했다는 평을 받고 크게 칭찬받았으나 ‘긴급 탈출 아이템’을 늦게 떠올린 점을 지적당했다.
함근형 선생님은 다시 한번 그 아이템의 존재를 잊지 말 것을 강조하며 총평을 마쳤다.
공헌도 0점인 두 사람은 별말을 듣지 못해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제일 빨리 끝났나 봐! 다른 데는 이제 공략 완료 메시지가 떴어.”
“와, 진짜네.”
도시락을 먹고 가기 위해 공원 내에 설치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맡겨 둔 짐을 찾아와 도시락을 꺼낼 때쯤에야 다른 반의 공략도 전부 끝났다.
1반, 2반은 우리보다 사람 수가 많아 반별로 A조, B조로 사람을 나눠 두 개의 이계를 공략하였다.
안다인이 이끈 1반의 A조, 주수혁이 맡은 2반의 A조는 공략이 빠르게 종료되었지만 각 반의 B조는 조금 공략이 늦었다.
1반의 B조 최대 공헌자는 모르는 이름이었는데, 2반의 B조는 아주 잘 아는 이름이었다.
“와, 의신이 빵셔틀이 최대 공헌자야?”
문새론을 제치고 방윤섭이 2반 B조의 최대 공헌자가 되다니.
문새론은 공격대 첫 실습을 주제로 기사화할 생각에 공략 자체에 집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긴 했다.
그래도 쟁쟁한 은광고 학생을 제치고 방윤섭이 최대 공헌자가 될 줄은 몰랐다.
“빵셔틀이 뭡니까?”
“예전에 처음 수업할 때, 의신이한테 시비를 건 애가 있었는데…….”
목우람은 빵이라는 말에 눈이 돌아갔다.
“빵셔틀 탐색…… 좋은 부업이군요. 저도 흡연 현장 적발 운동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그걸 부업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방윤섭의 금연을 돕는 이들이 느는 건 좋은 일이었으니 흔쾌히 승낙했다.
도시락 메뉴는 송대석이 가져온 김과 밥을 제외하면 밀가루 쪽으로 쏠려 있었다.
김유리는 샌드위치, 민그린은 피자였는데 황지호도 빵 종류였다.
“도시락으로 냉동 생지를 가져올 줄은 몰랐어!”
“저걸 어디에서 구우려고 들고 온 거냐.”
황지호가 들고 온 아이스박스 안에는 데니쉬 페이스트리 냉동 생지와 아이스크림과 과일 토핑이 들어 있었고, 미니 오븐은 따로 준비해 왔다.
왜 저런 번거로운 짓을 한 건가 의심스러웠는데, 막상 갓 구운 크루아상을 반으로 갈라 그 안에 아이스크림을 채우니 할 말이 없어졌다.
초등학생 모습으로 아이스크림을 잔뜩 먹어 대더니 그쪽으로 혀가 더 트였나 보다.
도시락을 다 먹을 때쯤엔 영원의 호수 팀원들이 첫 실습을 기념하며 10분가량 연주를 했는데, 그 소리에 이끌린 다른 반 아이들도 몰려와 앙코르를 외쳤다.
1시간가량의 미니 콘서트를 마친 후에야 우리는 해산하기로 했다.
피곤한 사람도 있어 보여, 뒤풀이는 다음에 가기로 했다.
“의신아, 우리 말고 누가 더 있었지? 플레이어 SAT-K가 감지 못하는 누군가가 있었고, 그거 때문에 네가 무리한 거 같은데. 맞아?”
용제건이 헤어지기 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다음에는 너의 용을 보여 줘.”
용제건은 조용히 그렇게 한마디 하고 아주 신난 얼굴로 사라졌다.
그 직후, 통화를 마친 황지호가 이쪽으로 왔다.
황지호는 처웃지는 않았지만, 반 분위기를 망치지 않을 정도로는 표정 관리를 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럼 가지.”
오늘 장남욱이 황명호 대저택으로 오기로 해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