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세트 피스 (3)
늦은 시각, 황명호 대저택.
은호의 후예들과 황호의 어린 분신도 모두 잠들었으나 은광고 교복을 입은 황호의 본신은 여전히 깨어 있는 상태였다.
황호의 분신과 본신은 신체의 제약이나 성능이 확연히 달랐다.
평범한 진족처럼 피로가 누적되는 분신과 달리 본신은 신화계 호족답게 취침 없이도 전투를 계속할 수 있을 만큼 튼튼했다.
지금 황호가 눈을 주고 있는 건 현재 황호의 어린 분신이 잠입 중인 초등학교 학급의 교사에 관한 보고서였다.
‘순조롭게 무너지고 있군.’
작게는 지인들이 그 교사를 제외하고 새로 단체 메시지방을 만든 것, 교원 모임에서 이름이 빠진 것 따위가 있었고 크게는 그 교사가 식까지 예정된 결혼을 일방적으로 파혼당한 게 있었다.
파혼의 원인은 각종 폭로가 이어진 교사의 SNS 이력과 호족이 은밀하게 보낸 과거 행적이 담긴 투서였다.
그 내용물을 본 약혼자는 교사의 지저분한 과거에 휘말리는 걸 피하기 위해 궁합이 안 맞는다, 결혼 자금이 부족하다, 교사가 요구하는 예물 비용을 맞추기 어렵다는 등의 궁색하고도 현실적인 변명으로 파혼을 감행했다.
약혼자의 재산 수준을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파혼 위자료 소송 등의 법적 공방을 대비해 변호사의 조언을 받아 소유한 부동산의 명의 이전 등의 사전 작업을 한 후 진행된 파혼인 만큼 교사가 흠을 잡기 어려웠다.
약혼자는 파혼 소식을 SNS으로 알리고 별 코멘트를 하진 않았지만, 약혼자의 가까운 지인이 ‘조상신이 도왔다.’라고 언급한 댓글이 약혼자 본인을 포함해 많은 이들의 추천을 받은 걸 보아 모두 파혼의 진짜 원인을 짐작하는 듯했다.
‘예정한 대로 다음 주에 이 분신이 전학하면 끝이겠군. 그 뒤엔 실종을 가장해 향록에게 넘기고…….’
거기까지 생각하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전무영이 교사의 주변을 캐고 있었지.’
황호가 진족임을 알고도 학교 운영 그따위로 할 거면 사퇴나 폐교를 하라며 담판을 짓던 15년 전의 은광고 학생회장, 현 국회의원 성국언의 얼굴이 떠올랐다.
성국언은 영민한 인간이니 언젠가 호족의 개입 여부를 파악할지도 모른다.
‘그럼 그때처럼 직접 찾아올까.’
성국언은 가까이에서 관찰할 가치가 있는 인간이었는데, 김신록의 예전 신분의 장례식 때 조문하러 온 모습을 보고 손을 뗀 기억이 있었다.
성국언은 진족과 후예를 혐오했으나 김신록은 잘 따랐다.
만약 황호가 성국언을 관찰한답시고 호족과 김신록의 관계가 드러나면 김신록은 저를 따르는 제자를 하나 잃는 셈이었다.
어쩌면 성국언이 김신록을 상대로는 혐오보다는 존경의 마음을 더 크게 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반대일 경우 발생할 부정적인 여파가 너무 컸다.
인간 하나 관찰하자고 친아버지에게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 후예의 가슴에 대못을 박을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김신록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으니 언젠가 만나서 이야기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이제 성국언을 관찰할 생각은 없지만…….’
황호는 자연스럽게 현재 관찰 중인 유일한 인간을 떠올렸는데, 마치 타이밍을 노린 듯이 디바이스 알람이 울렸다.
조의신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조금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확인한 황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 메시지를 작성했다.
‘읽음’ 확인은 되었으나 답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적호, 거기 있나.”
답변을 받는 걸 포기한 황호가 목소리에 이능파를 실어 적호를 불렀다.
마침 가까운 곳에 있었는지 적호가 바로 거실로 등장했다.
“부르셨습니까, 황호.”
“김신록을 협회에 파견할 생각이다. 그 아이와 협회에 다녀오도록.”
황호는 조의신의 제안을 간략히 전했다.
조의신이 이를 제안했다는 말에 ‘조의신은 아직도 깨어 있었습니까?’라고 되묻자 황호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의신의 이야기가 나오니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가 개회식에서 보인 그의 활약으로 바뀌었다.
황호는 잠든 신수를 안고 거실 소파에 조용히 앉아 있던 백호에게 물었다.
“백호, 도시후의 정신 지배를 어떻게 풀었지?”
백호가 신수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답했다.
“내가 한 게 아니다.”
“그러면 질문을 바꾸지. 조의신이 어떻게 도시후의 정신 지배를 풀었지?”
황호의 질문에 백호가 입을 다물었다.
보아하니 뭔가를 아는 것 같은데 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월 가가 지닌 전령의 능력, ‘왕이 가라사대’를 쓰면 간단했겠지만…… 그렇게 되면 조의신은 백호의 목소리를 전했다는 뜻이 되는데.’
황호는 가설을 세웠지만, 그날은 워낙 경황이 없었기에 단서를 찾아내기 힘들었다.
‘백호와 조의신은 접점이 거의 없어. 대련을 몇 번 하기는 했지만 ‘경애하는 자’의 목소리를 전하겠다는 의지를 품기에는 부족해.’
결국 추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화제가 바뀌었다.
새로운 화제는 개회식 내내 용제건을 감시했던 김신록이었고 주된 발화자는 적호였다.
아들의 정신적 피로를 걱정하던 적호의 말이 아들 자랑으로 끝나자, 이번에는 무거운 화제가 나왔다.
호족의 후예를 죽인 웅족에 관한 이야기였다.
“수석 주술사를 통해 이야기를 나눴다. 가든에 갇힌 쓰레기는 지금 입을 열 상태가 아니더군. 우선 신체에 손상이 가는 고문은 자제하도록 권하는 선에서 이야기를 마쳤다.”
“……그렇군요.”
“이 몸이 직접 나서지 않는 한 그 쓰레기를 내줄 것 같지 않더군.”
그 말을 끝으로 세 호랑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잘 자라는 인사치레도 없이 이들은 말없이 자리를 떴다.
마지막까지 거실에 남은 건 백호 하나였다.
* * *
다음 날.
은광고는 어제 치른 개막식과 첫 승리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교복 대신 민그린이 디자인한 응원 로고가 새겨진 응원 티셔츠와 머플러를 착용한 학생들이 곳곳에 보였다.
다들 오전 수업부터 째거나,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경기장으로 달려갈 생각인 듯했다.
물론 나도 오후엔 경기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시합을 놓칠 수 없지!’
나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선수로 끼어 있는 경기를 위주로 선택했다.
눈에 띄는 학생 임원이나 교사는 아니지만, 이 학교 곳곳에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있었으니까.
‘농구 첫 경기는 내일부터네.’
선수단이나 코치진에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한 명도 없었지만, 농구 시합은 보러 가기로 했다.
주오 아일랜드에서 모든 경기를 보러 가기로 유상훈한테 약속한 상태였으니까.
그때면 맛이 간 도시후도 평소대로 덜 맛이 간 상태로 돌아올 테니 유상훈과 도시후의 대결을 볼 수 있을 거다.
나는 사전에 약속을 했으니 별 고민 없이 농구를 택했지만, 농구 첫 시합이 축구와 겹치는 바람에 관객들은 행복한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우리 반도 예외가 아니었다.
종목이 많다 보니 동 시간대에 하는 경기도 있어 각자 고심 끝에 취향에 따라 보러 갈 시합을 정하다 보니, 첫날과 달리 반 아이들의 행선지는 조금씩 엇갈렸다.
“그럼 내일 축구 보러 가는 사람은 세 명이네. 간식은 나랑 세음이가 준비하고, 음료수는 한이한테 부탁할까…….”
“어떡하지, 나 일정표에 축구 대신 다른 경기 넣었는데…… 어제 경기 보고 나니까 다음 축구 경기도 보고 싶어졌어.”
“아…… 지금 축구 경기 티켓 구하기 어렵더라. 첫 골 터지고 나서 은광고분 티켓은 다 동났대.”
김유리의 말에 권레나가 실망한 얼굴을 했다.
막 등교한 사월세음이 그 이야기를 듣고 밝게 말을 걸었다.
“저랑 티켓 바꾸실래요? 저는 축구도 좋지만 농구도 좋아요. 마침 의신이도 농구를 보러 간다고 했고요.”
티켓을 교환하자는 사월세음의 제안에 권레나가 눈에 띄게 굳었다.
“아니, 저기…… 괜찮아.”
“전 진짜로 교환해도 괜찮은데…….”
권레나가 너무 눈에 띄게 자리를 뜨자 되려 사월세음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둘이 더 어색해지는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 어색하다고 지적하면 둘은 진짜로 매우 어색해질 테니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한편, 한이는 수업종 정보를 체크하고 있었다.
수업종 리스트는 온통 응원가로 채워져 있었다.
클래식에 가사를 붙이거나 철 지난 유행곡을 개사한 곡부터 직접 작곡한 응원곡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다.
한이는 수업종은 물론이고 교류전에서 사용된 응원곡 정보도 전부 체크해서 가사를 전부 암기한 것 같았다.
아침 일찍 등굣길부터 나한테 쉬라 마라 잔소리를 하던 황지호가 그런 한이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씁쓸한 광경이었지만 일단 노친네가 조용해지니 귀는 평화로워졌다.
“미로가 기사에 나왔어!”
드로잉 소재를 찾을 겸 신문을 보던 민그린이 밝게 얘기했다.
은광고와 사관학교 고등부의 교류전 개막식과 플레이리스트 촬영에 관한 기사였다.
기사에는 개막식 외에도 이번 미션 콤비로 지정된 내장산의 성자와 독고미로의 활약이 자세히 쓰여 있었다.
기사를 읽던 아이들이 말했다.
“이번 주는 플레이리스트에 데스 매치 없대.”
“아, 데스 매치는 매주 하는 게 아니야?”
“네, 대신 다음 주에 두 분이 탈락하실 거예요.”
듀엣 곡 미션을 통해 1등이 된 팀은 ‘데스 매치 면제권’을 얻게 된다고 한다.
독고미로가 점차 카메라에 적응해 제 기량을 조금씩 발휘하고 있고, 내장산의 성자는 처음부터 잘했고 지금도 잘하는 중이라 이변이 없는 한 두 사람이 1등을 할 것 같았다.
아이들은 안심해서 신나게 독고미로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거기에 어울리지 못하는 인물이 둘 있었다.
하나는 사월세음이 말을 건 이후로 어색하게 구는 권레나였고, 또 하나는 그런 권레나를 보며 불안해하는 목우람이었다.
‘목우람은 둔한 건지 예민한 건지 모르겠네.’
김유리가 중간에서 워낙 중재를 잘하고 분위기를 이끌다 보니 티는 크게 안 났지만 김유리나 황지호는 저 어색함을 눈치챘을 것 같았다.
평화롭지만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 가다 보니 수업종이 울리고 함근형 선생님이 등장해 조례가 시작되어 대화가 끊겼다.
아이들과 대화를 할 필요가 없어진 후에야 권레나는 안심한 얼굴을 했다.
* * *
점심시간.
평소라면 동선이 맞는 반 아이들과 먹거나 이동 중에 만난 다른 반의 지인들과 어울려 먹는데, 오늘은 강제로 호랑이와 먹게 되었다.
“약밥을 준비했다. 먹도록.”
찬합을 여니 계피향이 향긋하게 올라왔다.
잣과 호박씨, 밤이 올라간 평범한 약밥이었지만, 시판하는 제품보다 때깔이 훨씬 고왔고 한약재의 냄새도 조금 풍겼다.
“……뭘 더 넣었어?”
“황기랑 당귀, 산수유도 조금 넣었다. 어제 한 수고를 생각해 이번에는 맛에도 자비를 뒀으니 안심하고 먹도록.”
그 말에 안심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방금까지 영약이 고체화된 형태일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던 탓에 쉽게 입에 댈 수 없었다.
한입 먹으니 향긋한 향과 적절한 단맛이 입에 퍼지고 덤으로 온기도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과연 자비로운 맛이었다.
사양하지 않고 약밥을 먹는데, 갑자기 황지호가 표정을 굳혔다.
“은광고의 결계에 허가를 받지 않은 진족이 접근했다.”
허가받지 않은 진족?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황지호가 바라보는 쪽을 봤다.
은광고의 동문이 있는 위치였다.
“마족이 방문했다.”
“어떤 마족?”
황지호는 분신을 움직이는 중인지 대답이 나올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황지호의 입이 열렸다.
“12지 동맹의 일각, 흑마가 이끄는 마족(馬族)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