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83화 (283/925)

50. 세트 피스 (2)

[유상훈] 뭐 했음?

내 기숙사 방 침대 위.

누워서 홀로그램으로 메시지창을 띄우니 유상훈이 보낸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긴 메시지가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장남욱이 세 줄 정도 되는 안부 인사와 함께 유상훈의 의도를 분석했겠지만, 응원단 일과 도시후 건 때문에 바쁜지 메시지 확인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장남욱을 대신하여 ‘?’를 하나 찍어 답변을 날렸더니 놀라울 정도로 긴 메시지가 줄줄 날아왔다.

[유상훈] 둘 다 자리 비웠잖아.

[유상훈] 조의신은 처음부터, 장남욱은 중간부터.

[유상훈] 개회사 직전에 통신 끊겼던 거랑 관계있지 않음?

유상훈은 날이 갈수록 감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개회식 도중, 정확히는 벽사 의식 전후에 발생한 통신 장애에 관한 변명은 미리 준비해 놨었다.

대규모 인원을 수용하는 체육 시설은 갑작스러운 이계 발생을 대비해 결계를 갖춰야 하는데, 은광 스타디움의 경우 잠실 야구장과 같은 R+++급 결계를 갖춘 상태였다.

그러나 잠실 야구장 사건 이후로 전조 없는 이계 현상을 대비해 전국 주요 구장은 SR++급으로, 다른 체육 시설도 SR급으로 올리자는 의견이 있었다.

문제는 예산이었지만 선상 파티에서 주오와 TC의 차기 총수가 발표한 대로 재계의 지원에 힘입어 결계의 업그레이드가 진행 중이었다.

은광 스타디움의 경우 황명 그룹의 주도하에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 점을 이용해 결계 강화 과정에 문제가 있어 통신 장애가 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외부에 발표한 상태였다.

‘유상훈처럼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유상훈이 밖에 말을 퍼뜨리고 다닐 놈은 아니어도 이번 일은 도시후의 개인 사정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그냥 적당히 딴소리를 해서 화제를 바꾸려고 했는데 유상훈이 선수를 쳤다.

[유상훈] 도시후 계속 안 보이던데 그놈이랑 관련된 거 아님?

이때 막 메시지를 확인한 장남욱이 기겁한 태도로 물었다.

[장남욱] 상훈아, 어떻게 그걸 안 거야?

[유상훈] 언젠가 사고 칠 거 같았음.

[장남욱] 아……ㅠㅠ.

이상할 게 없는 대화긴 하지만, 대화를 이끄는 주체가 유상훈이라는 점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메시지를 길게 쓰는 것도 그렇고, 나와 장남욱이 이 화제를 피하려는 걸 눈치채도 굳이 말을 이어 가는 게 그랬다.

‘갑자기 왜 그러지?’

뭐라고 묻기 전에 유상훈이 먼저 메시지를 이었다.

[유상훈] 그놈이 유상희 씨 두고 이상한 소리를 하던데 그거랑 관련 있음?

[장남욱] 아니. 상희 누나와는 관련이 없는데…… 무슨 일 있어?

[유상훈] 진로 선택 신중하게 하라는데? 도시후가 그냥 헛소리한 듯 ㅇㅇ.

도시후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뭔 소리를 한 건가.

진로 선택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 같지는 않았지만, 유상훈은 그 이상 아는 게 없는지 메시지가 점점 짧아졌고 그에 반해 장남욱의 메시지는 매우 길어졌다.

장남욱이 작성한 농구 시합에 관한 격려와 선전 포고 수십 줄을 두고 유상훈이 ‘ㅇ’ 하나도 찍지 않게 되었을 때쯤 메시지창을 끄고 다른 메시지를 확인하기로 했다.

[박승현] (사진)

[박승현] 첫 시합, 첫 MVP와 찍음!

사진 속에는 오늘 1골 1도움을 기록해 MVP로 선정된 1학년 스트라이커와 박승현이 함께 찍혀 있었다.

경기 직후에 찍었는지 그 1학년 스트라이커는 유니폼을 입고 MVP 메달을 걸고 있었는데, 세리머니를 하면서 다른 선수들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린 바람에 머리카락 상태가 엉망인 게 눈에 띄었다.

오늘의 MVP는 1학년 치곤 덩치가 상당히 큰 편이라 왜소하고 다소 소심한 성격의 박승현이 주눅이 드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사진 속의 둘을 보니 그런 거 없이 매우 친해 보였다.

‘게임 속에서 박승현한테 이런 친구는 없었는데.’

집요한 괴롭힘은 피해자에게 괴롭힘당하는 고통만 주는 게 아니라, 성격에도 변화를 주게 된다.

괴롭힘으로 인해 방어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할 가능성이 큰데, 게임 속 박승현은 마음을 닫고 또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저 스트라이커를 멀리했을지도 모르겠다.

박승현은 2학기 때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 주수혁과 친해졌을 때도 마음을 열기까지 오래 걸렸고 자신을 괴롭히던 부정입학자를 의식한 탓인지 학교 안에서는 주수혁에게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지익회에 들어간 것도 그렇고, 목우람을 잘 챙겨 주는 것도 그렇고…… 내가 아는 박승현이랑 많이 달라.’

만우절 사건이 해결되면서 박승현이 많이 변한 게 새삼 느껴졌다.

사진을 보관 처리한 후, 박승현 친구에게 축하 메시지와 목우람이 호구가 잡히지 않게 미리 챙겨 준 것에 관한 감사 메시지를 보냈다.

그다음으로 확인한 메시지방에서도 MVP로 선정된 1학년 스트라이커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문새론] 오늘 MVP 인터뷰는 내가 따 뒀음!

신문부 단체 메시지방에 신문부원들이 각자 찍은 사진과 인터뷰 예정이 빼곡하게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1학년 신문부원은 개막식을 돌아볼 겸 찍은 사진 중에 기사에 첨부할 사진을 고르는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버릴 사진이 없어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찍힌 사진은 크게 관객이 입장하기 전의 경기장, 개막식, 백호군의 검무, 플레이리스트 촬영, 응원전과 축구 시합 별로 구분되었다.

주제별로 구분하긴 했지만, 모든 사진이 멋져 보여 무엇을 기사에 넣고 무엇을 뺄지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문새론] 응원단 사진만 뽑아서 따로 화보집 내도 괜찮을 것 같지 않음?

[문새론] 학생회 소속 플레이어들은 다 인기 좋으니까 팔면 살 사람 줄을 설 것 같은데.

문새론의 말대로였다.

응원단 중에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학생부회장 지명수, 타이틀 히로인 안다인 등 완벽한 피사체들이 넘쳐 났다.

[문새론] 가장 임팩트가 큰 건 개천신화 속 백호의 벽사를 재현한 분이라 이 분 화보집부터 먼저 내야 할 것 같은데!ㅋㅋㅋ

문새론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신화 속의 위업을 재현했으니 화보집이 나오는 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정보통 문새론이 백호군을 주목하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다.

백호군은 현재 은광고 소속 학생이라는 것 외에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황명호 이사장이 고집을 부려 급히 추가된 일정이라 검무를 춘 학생 프로필이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설정인데, 문새론이 파고들면 그 가공된 설정의 헛점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나] 염준열 선배님 인터뷰 기사를 넣을 예정인데, 어떤 사진을 넣는 게 좋을까?

[문새론] 헐, 님 염준열좌 이벤트 땀?? 플레이리스트 관련 인터뷰 하고 싶어서 찔러 봤더니 철벽 치셨는데! ㅠㅠㅠㅠ

[나] 플레이리스트 관련 질문은 안 받는다고 하셨어. 방송 촬영할 때 찍힌 사진은 안 쓰는 게 나을 것 같아.

염준열의 인터뷰를 땄다는 소식에 화제는 바로 바뀌었다.

문새론이 추천한 베스트 컷을 전송받은 후,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다음 메시지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금찬솔] 수상한 부반장님아, 님네 반 독고미로랑 친함?

2학년 0반의 반장, 금찬솔이 1 대 1 메시지로 말을 걸었다.

보통 왕찬솔도 있는 단체 메시지방에서 대화를 하는데 무슨 바람인지 모르겠다.

‘왕찬솔이 보면 곤란한 대화 내용인가?’

금찬솔이 독고미로 이야기를 왜 몰래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문제가 되지 않을 선에서 답하기로 했다.

염준열의 소개로 만나서 말을 텄다는 이야기를 간략히 전하자 ‘ㅇㅇ 그렇군, 별로 안 친하나 보네.’라는 묘하게 속을 긁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2학년 0반 선배놈들은 오늘 이사장실을 습격하려다가 공청훤한테 걸려서 제갈재걸에게 크게 털렸다고 들었는데, 그 탓에 사고 회로가 좀 이상해진 걸까.

늘 이상하긴 했지만.

‘다음 메시지도 이해할 수 없는 사고를 하는 놈이 보낸 거네.’

그다음으로 확인한 건 ‘서돌’이라는 대외용 이름 대신 ‘꾀돌이’라는 가명으로 디바이스 주소록에 입력해 달라고 징징거리던 이상한 진족이 보낸 메시지였다.

[꾀돌이] 슬슬 영국에서 귀국하려고 해요. 선물이라고 해야 하나? 그 비슷한 걸 두 개 준비했는데요.

선물이면 선물이지 그 비슷한 건 뭘까.

선물 어쩌고 하는 말보다는 존댓말을 쓰는 게 더 신경 쓰였다.

[꾀돌이] 제가 귀국 기념으로 뭘 하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는 조의신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르겠고, 다른 하나는 조의신이 싫어할 것 같아요.

[꾀돌이] 어때요?

어떠냐고 물어도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르는 것.

싫어할 것.

뭔지 모르겠지만 보통 저딴 걸 선물이라고 하지 않는데.

읽고 씹기를 시전할까 말까 고민하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추가 메시지가 날아왔다.

[꾀돌이] 읽고 씹지는 마세요.

최근에 누군가에게 읽고 씹기를 당한 걸까?

꾀돌이의 빠른 대처에 어쩔 수 없이 ‘내키는 대로 하세요.’라는 말을 예의 바르게 포장해서 답장했다.

어차피 꾀돌이는 내가 뭐라 답하든 마음대로 할 것 같았다.

다음은 그 꾀돌이에게 가호를 받은 인물이 보낸 메시지였다.

해가 진 지 한참 됐는데, 아직도 일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홍규빈] 방금 간호 장교로부터 자백받았다.

[홍규빈] 도시후 생도의 신체에 씨앗을 심고 검사 결과를 조작했다고 하는구나.

홍규빈의 어조가 평소보다 상당히 딱딱한 걸 보니 심문이 뜻대로 되지 않는 듯했다.

[홍규빈] 배후에 있는 인물에 대해선 아직 입을 다물고 있어.

[홍규빈] 이쪽에서 확보한 이름은 송금한 임원 하나뿐이라는 걸 아는 것 같아.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사면권을 요구하는 중이야.

[홍규빈] 군사경찰에 넘기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아주 잘 아는 거겠지.

플레이어 군인이 이능 관련 범죄를 일으켰을 경우. 국군의 사법 기관은 일절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사람이 사법을 집행하는 만큼 보통 범죄를 저지르게 된 배경, 여론의 귀추에 따라 처벌의 무게도 변하는 법인데, 역대 모든 플레이어 군인 범죄자는 무관용 원칙하에 철저하게 응징당했다.

정식 군인도 아닌 장남욱이 징계실로 끌려갔을 때, 3스타 둘이 출동해 겨우 빼내 왔을 정도다.

[홍규빈] 이런 놈을 위해 정부와 협상해 사면권을 얻을 생각은 없어. 그럴 가치도 없고.

[홍규빈] 모호한 말로 구슬리긴 했지만 언젠가는 군사경찰에 이자를 넘길 예정이야.

[홍규빈] 남은 시간 동안 캐 보도록 하마.

홍규빈은 딱 잘라 말했다.

협회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만큼 효율적인 방책을 택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고문의 전문가를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

황지호에게 말해 김신록이 심문 과정에 개입하게 하는 건 어떨까.

황지호에게 대충 그런 요지의 메시지를 보내니 곧장 답변이 왔다.

[황지호] 안 쉬고 뭐 하는 거지?

뭐 하긴, 메시지를 보내는데.

굳이 답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다음 메시지는 권제인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권제인] 레나는 잘 지내?

권레나는 주말 내내 영원의 호수 팀 빌딩에 머무른 걸로 아는데.

굳이 안부를 묻는 거 보면 권제인도 권레나가 사월세음 때문에 마음을 쓰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환몽 경매 건도 알고 있을 테니까 눈치챘겠지.’

나는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고 오늘 반 아이들과 찍은 사진을 보내 줬다.

권레나가 찍혀 있는 사진을 받은 권제인은 몹시 기뻐했지만, 사월세음과 거리를 두고 찍힌 사진을 보며 미묘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슬슬 눈이 감기려 할 때, 한가해 보이는 진족이 보낸 통한의 메시지가 보였다.

[옥토연] 은인아…….

[옥토연] 내년에는 야구 보러 가자…….

얼마 전 망팀 TC 나이츠는 트래직 넘버를 모두 지우고 가을야구 탈락을 일찌감치 확정지었다.

그 이후로 종종 밤만 되면 옥토연은 내년에 야구를 보러 가자는 메시지를 날려 댔다.

망겜 유저로서 그 미련과 고충을 이해하는 나는 그러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디바이스 화면을 껐다.

‘사월세음이랑 권레나 건……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나.’

옥토연의 메시지는 바로 잊었지만, 권제인과 나눈 대화는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러나 피곤한 탓인지 좋은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채 오늘도 금방 꿈 없이 잠들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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