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세트 피스 (1)
플레이리스트를 촬영하는 사이, 응원단과 및 스태프들은 잠시 휴식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인공 잔디가 깔린 그라운드에서 몸을 푸는 축구 선수를 제외한 타 종목 선수단들도 배정된 관객석으로 이동했다.
플레이스트 출연진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혹은 경기 시작 전에 지인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들 중에는 1학년 기수장이자 해당 기수 응원단장인 장남욱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남욱은 성실하게 응원단장 옷 대신 군사관학교 정복으로 갈아입고 조의신이 지정한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실에 설치된 스크린에 경기장 상황이 비춰지고 있었는데, 어떻게 손을 썼는지 몰라도 무대가 철거되는 동안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쓰러진 스태프들은 어떻게 된 거지? 그리고 시후는?’
개회 선언과 공연을 위해 설치된 무대는 황명 재단의 직원 손에 빠르게 정리되었다.
무대 밑에서 멍해 보이는 얼굴의 스태프들이 보였지만 회복 아이템으로 치료를 마친 건지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 대신 철거된 무대 밑 가설 스태프 룸에서 사용된 음향 기기, 영상 송출 기기를 포함한 방송 장비가 박살 나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부서진 장비들은 전부 남궁전자 제품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준비는 했으니까 괜찮다고 했는데. 정말 괜찮은 걸까?’
설마 남궁전자 제품 고장으로 인한 사고로 가장하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남궁전자 제품이 일으키는 크고 작은 사건이 기사로 계속 뜨는 중이니 사고 하나가 추가되어도 이상할 일이 없긴 했다.
‘남궁 그룹이면…… 규연이랑 관련이 있네.’
장남욱은 ‘우리 집 좀 망했으면.’이라고 장난스럽게 깔깔거리며 웃던 사관학교 동기, 남궁규연을 떠올렸다.
남궁 그룹과 관련이 있는 사관학교 동기가 있어서 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도움을 주는 이가 선택한 방식에 뭐라 하는 건 염치 없는 짓이라 판단한 장남욱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덜컹. 턱.
대기실 문이 아무 전조 없이 열렸다가 닫혔다.
장남욱은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문이 열릴 때까지 아무 기척도 못 느꼈어……! 지금도 아무것도 안 느껴져!’
얼어 있는 장남욱의 눈앞에 붉은 안개가 소리 없이 떠오르다 흩어졌다.
붉은 안개 사이로 단정한 인상의 외꺼풀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자, 적호는 사슬에 묶인 도시후를 둘러메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정중한 인사에 장남욱은 반사적으로 인사했지만 온 신경이 도시후의 무사 여부에 쏠려 있었다.
“시후는 괜찮나요?”
“외상은 없습니다. 하지만 장기간 마족의 간섭을 받았으니 제대로 된 의료진에게 정밀 검사를 받아 보는 게 좋을 겁니다.”
‘제대로 된 의료진’이라는 단어에 장남욱이 복잡한 얼굴을 했다.
도시후가 몇 번 군사관학교 병원에 소속한 아버지의 해군 전우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 얘기를 하던 밝은 표정의 도시후의 얼굴 위로 조의신이 보낸 메시지가 오버랩되었다.
그 메시지에는 간호 장교가 이번 사건에 협력해 도시후의 이능파 검사 결과를 조작한 것으로 추정되어 규정 집행부가 관여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장남욱은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시후가 이번 일을 기억할까요?”
“오랜 기간 정신 간섭을 받은 상태라 기억 조작을 하면 후유증이 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도 기억을 지워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만…….”
적호가 긴장한 장남욱을 보다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조의신은 이 생도가 ‘우리’에 관해 파헤치지 않을 것이라 단언했습니다. 플레이어군 측에 우리의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도록 주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딱히 감사받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적호는 그 이후로 주의 사항을 몇 개 더 일러 주었다.
‘의신이 이름이 나온 이후로 태도가 다소 부드러워진 것 같은데…….’
장남욱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탐색은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장남욱에게 중요한 건 도시후를 비롯한 스포츠 교류전 참가자 중에 크게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적호는 도시후를 구속하던 사슬을 제거한 후,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붉은 안개를 뿌린 후 사라졌다.
“시후야, 정신 좀 차려 봐.”
적호가 사라진 후, 몇 번이나 도시후를 깨워 봤지만, 도시후는 밀린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쉽게 깨어나지 않았다.
스크린 너머에서 내장산의 성자와 독고미로의 공연이 끝나고 무대 정리와 그라운드 정비도 마무리되어 축구 경기가 시작되었다.
기념비적인 첫 교류 경기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울리고 센터 마크에서 킥오프를 했는데도 도시후는 줄곧 자고 있었다.
‘별 처녀의 눈으로 보면 멀쩡한데…….’
사전에 총응원단장을 맡은 선배에게 자리를 비운다고 말은 해 뒀지만, 기수장인 장남욱이 길게 자리를 비우는 건 좋지 않을 거다.
유선으로 스타디움 내 방송 수신은 가능해도 이 대기실은 어찌된 일인지 디바이스 수신은 막혀 있어서 아직 메시지는 한 건도 오지 않았지만, 보나 마나 장남욱을 찾는 이들이 많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도시후를 내버려 두고 갈 수 없어서 옆에서 자리를 지키며 스크린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어느덧 전반전이 반 정도 지나고 은광고의 코너킥 찬스가 왔다.
“어…… 이거 안 좋은데.”
은광고의 축구부 주장이 공을 차올리는 것과 동시에 은광고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세트 피스’의 어원 그대로, 마치 체스의 피스들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세트하는 것 같은 정연한 움직임이었다.
주장의 발끝을 떠난 공은 노마크 상태인 은광고 선수의 머리 쪽으로 정확하게 들어갔고, 이를 놓치지 않은 은광고 1학년 스트라이커가 그대로 공을 골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장남욱이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아, 안 돼!”
축구공이 골라인을 넘고 골대 그물을 흔들자 경기장에서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 나와 대기실까지 울려 퍼졌다.
첫 경기 첫 골을 만들어 낸 축구부 주장과 1학년 스트라이커가 경기장을 돌며 선보이는 세리머니와 세트 피스 상황에서 이어진 골인 장면이 느리게 재생되었다.
“……어?”
환성 소리가 시끄러웠는지 잘 퍼질러 자던 도시후가 눈을 떴다.
“시후야, 괜찮아?”
원통한 눈으로 화면을 보던 장남욱이 도시후 쪽으로 달려갔다.
대기실의 장의자에 누워 있던 도시후가 몸을 일으켜 눈을 깜빡거렸다.
도시후는 새파래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 장남욱을 보고 안도한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 나는 괜찮은데…… 다친 사람은 없어?”
“없어.”
도시후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상황을 전부 파악하지 못했지만, 장남욱의 말과 표정, 은광 스타디움으로 추정되는 대기실 안, 정상적으로 진행 중인 축구 경기를 보며 어느 정도 짐작을 했다.
장남욱이 자신을 위해 뭔가 했고 그가 자신을 구했다는 것.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어쩐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딴청을 부리던 도시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런데…… 큰일 난 것 같아. 어쩌지.”
“왜 그래? 머릿속에서 아직도 이상한 목소리가 들린다거나, 몸이 멋대로 움직이려 해?”
장남욱은 적호가 일러 준 긴급 연락처를 떠올리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도시후는 바로 답하지 않고 장남욱을 물끄러미 보다 실없는 얼굴로 웃으며 답했다.
“아니, 지금 스코어가 0 대 1이잖아. 스코어 보면 크게 ‘1’이라고 쓰여 있으니까 큰 1, 큰일 났다고, 하하하! ……악!”
퍽!
장남욱은 철없는 헛소리를 하는 도시후를 보니 갑자기 울컥한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주먹을 날렸다.
힘을 크게 주지는 않았지만 도시후를 엎어뜨리기에는 충분한 일격이었다.
장남욱은 사과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쩡한 거 같으니까 그만 가자. 다른 애들도 걱정할 거야.”
도시후는 시무룩한 얼굴로 끄덕이다 장남욱을 뒤따라 나갔다.
어쩐지 장남욱의 주먹이 마족에게 잠식당하던 정신을 깨우던 이능파 덩어리를 연상하게 했다.
* * *
플레이리스트의 촬영과 은광고와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고등부의 첫 시합도 무사히 끝났다.
개막식도, 플레이리스트 경연자들의 공연도, 은광고의 승리로 끝난 첫 경기도 모두 멋졌다.
멋지진 않았지만 시합 후에 볼거리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은광 스타디움을 오리걸음으로 도는 3학년 0반 일당의 모습이었다.
“애들이 요새 빵에 꽂혀 있었잖아. 같은 빵 냄새가 줄줄 나서 쉽게 찾았어.”
임연화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걸 감지한 초인은 드물었다.
인간 중에선 맹효돈이 그나마 ‘아, 그러고 보니 감자빵 냄새가 좀 많이 나네.’라고 평가하긴 했다.
우기환은 굴욕을 참으며 은광 스타디움을 돌기 시작했는데, 임연화가 심심하다며 자신도 오리걸음으로 따라 걷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스타디움을 돌던 3학년 0반 일당 놈들은 임연화가 뒤에서 추격해 오기 시작하자 전력을 다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강한 담임에게 따라잡혔다.
우기환이 선두를 달리며 어떻게든 임연화보다 빠르게 한 바퀴를 채우려 했다.
그 대결을 취재한답시고 신문부 사람들이 급조해서 결승선을 만들었는데, 결국 그 결승선을 먼저 끊은 건 강한 담임 임연화였다.
“얘들아, 그래도 내 생각보다 빨라진 거 같아. 오늘도 추가 훈련을 하면 더 빨라질 거야.”
근손실을 걱정해 울지도 못하고 분해하는 3학년 0반 아이들을 향해 임연화가 자애롭게 말했다.
임연화는 SNS에 인증샷과 함께 ‘오늘 교류전 첫 시합은 은광고 승리! 나도 승리! ^0^ㅋ’라는 내용의 포스팅을 했는데, 그 포스팅을 본 3학년 0반 놈들은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리며 펑펑 울었다.
그런 해프닝도 있었기에 같이 저녁을 먹은 후에도 화젯거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미로가 노래할 때 말이에요, 엄청 큰 카메라 들고 있던 사람 봤어요?”
“아, 그거 봤어. 카메라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은데, 렌즈 크기가 무시무시하더라.”
“그거 혹시 저번에 유리가 말한 홈마 아니야? 경기 안 보고 미로만 찍고 갔잖아.”
지금 하는 대화의 주제는 독고미로가 노래를 부를 때 대포 크기의 전문 카메라를 들고 등장한 정체불명의 누군가였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제대로 얼굴은 못 봤지만 그 누군가는 은광고 춘추복을 입고 있었다.
“미로 홈마가 은광고 학생이었나?”
“명찰 색을 보니까 2학년 같던데.”
“홈마가 사진 찍거나 올리는 시간 보면 평일 오전도 있었잖아. ……혹시 등교 안 하시는 분 아니야?”
“어, 지금 사진 올라왔어.”
모르는 사람이 잔뜩 몰려왔는데도 끝까지 자리를 지킨 민그린이 홀로그램 사진을 하나 띄웠다.
사진에는 오늘 흰색의 구교복을 입고 촬영에 임한 독고미로가 찍혀 있었다.
표정이 여전히 어딘가 어색했지만, 시선을 끄는 외모와 화사한 머리 색과 교복이 어우러져 교복 광고나 스타디움 홍보 자료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잘 찍혀 있었다.
“그 선배님이 진짜 미로 홈마였나 봐!”
사진을 본 김유리가 그렇게 판단하고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1학년 0반만큼 많지 않지만, 다른 학년에도 등교 거부자가 존재한다고 들었다.
독고미로의 홈마는 2학년 등교 거부자 중 하나였나 보다.
황명 타워에 입점한 패밀리 레스토랑 한 곳, 카페 두 곳을 돌며 실컷 먹고 대화한 우리는 내일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황지호가 불쑥 물었다.
“물어볼 게 있다.”
“뭔데?”
“왜 반 아이들에게 협력을 구하지 않았지? 사월세음의 도움을 받았다면 시간에 더 여유가 있었을 거다.”
황지호의 말대로긴 했다.
통신을 차단한 대기실에 사월세음을 대기시켜 두고 ‘왕이 가라사대’를 사용하게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사월세음을 시작으로 이미 네 정체를 짐작하는 아이도 있지 않나. 맹효돈이나 목우람에게도 협력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김유리는 이능파를 못 쓴다고는 하지만, 학생부라는 입장을 이용해 시간을 끄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거다.”
왜 이용할 수 있는 피스가 있었는데도 하지 않았냐고 묻고 싶은 모양이다.
이번에는 마족의 ‘눈’만 피한다면 위험도가 낮았기에 애들이 위험해질 가능성도 낮긴 했다.
그래도 반 애들의 힘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수련회 때 애들이 못 놀았잖아. 이번엔 좀 놀라고.”
내 말을 들은 황지호는 눈에 황금빛을 잠시 띄우다 말했다.
안광으로 내 상태를 살핀 듯했다.
“네 이능파가 얼마나 소모되었는지 알고 하는 소리인가? 아마 그 아이들은 놀지 못하더라도 너와 함께 싸우고 싶었을 거다.”
황지호가 말을 더 하기 전에 기숙사 소속 아이들이 이쪽으로 와 대화는 중단되었다.
나는 황지호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넓고 조용한 내 기숙사 방으로 돌아갔다.
* * *
7대 죄악의 마신 중 하나인 탐욕의 아바리티아를 섬기는 마족 사제의 연구실.
독 안개 탓에 잘 보이지 않던 내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불어넣은 힘이 끊겨 드러난 온실의 가장 안쪽.
왜곡된 공간에 뿌리를 박은 나무가 무서운 속도로 시들기 시작했다.
사아아……!
가지각색의 열매도, 이능파를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던 잎사귀도 모두 죽은 듯이 썩었다.
그리고 완전히 썩어 버려 시커멓게 변한 나무에 자주색 열매가 하나 열렸다.
그것은 열매라기보다는 안구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나무에 맺힌 안구는 아바리티아의 사제의 눈동자와 같은 자주색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