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86화 (286/925)

50. 세트 피스 (5)

은광고 본관, 은휘관 앞.

1학년 구역에서 대기하던 에어 셔틀을 타고 은휘관 정문 앞에서 내린 맹효돈이 ‘오.’ 하고 작게 감탄사를 뱉었다.

맹효돈은 예술에는 영 소양이 없어 이 은휘관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고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넓게 굽이치는 듯한 곡선 형태의 새하얀 지붕이 마치 개막식 때 백호의 벽사 검무에서 본 이능파의 너울만큼이나 환상적이라고 평가하는 게 고작이었다.

맹효돈이 하늘 위에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은휘관의 지붕과 이를 지탱하는 황금의 기둥을 멍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으니, 이사장의 비서로 추측되는 이가 말을 걸었다.

“맹효돈 학생, 안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맹효돈은 가면을 쓴 것 같은 미소와 정중한 태도에 조금 긴장하며 은휘관 안으로 들어갔다.

천연대리석이 깔린 복도를 지나 호랑이가 양각된 문 앞에 서니 긴장감이 더욱 커졌다.

비서가 노크를 하고 들어와도 좋다는 허가를 받자 마침내 문이 열렸다.

“효돈 학생, 어서 오게.”

황명호 이사장의 모습을 한 황호가 맹효돈을 서서 맞이했다.

60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정정한 이사장을 본 맹효돈이 순간 얼었다.

탁거산도 나이치곤 풍채도 좋고 강했지만, 맹효돈은 황명호 이사장이 탁거산보다 몇 수 위의 고수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맹효돈이 긴장한 눈으로 키 차이가 한참 나는 황호를 올려다봤다.

‘이게 그 돌아이의 친척이라고?’

맹효돈이 아는 같은 반 돌아이도, 눈앞의 이사장도 모두 황호였지만 맹효돈은 둘이 동일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황호가 황지호의 모습을 할 때는 워낙 돌아이 같은 짓을 하는 데다 지금 이 황명호 이사장의 존재감이 너무 컸던 탓이다.

은휘관의 중심에 있는 황명호 이사장 모습을 한 황호를 보자니 호랑이굴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잠깐 멍하니 있던 맹효돈이 허둥지둥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앉지.”

황호가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자 맹효돈은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기계처럼 삐걱삐걱 움직였다.

이사장실 안에 있는 가구는 전부 미술관에나 있을 법한 예술품 같아 맹효돈은 아주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황호는 먼저 앉아 엄청 비싸지만 맹효돈의 악력에 비하면 내구도는 0에 가까워 보이는 찻잔에 차를 담아 내밀었다.

맹효돈은 소파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떨떠름하게 그 차를 받았다.

은휘관을 마주했을 때부터 느낀 기묘한 부담감에 당장이라도 이사장실 유리창을 깨부수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맹효돈은 억지로 차를 들이켰다.

마시기 딱 좋은 온도로 조절된 찻물을 입안에 머금는 순간 맹효돈은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오, 맛있다.’

찻잔의 내용물은 제철 석류알을 달여 낸 석류차였는데, 그레나딘 시럽을 쓴 게 아니라 석류의 과육만을 이용해 석류향이 풍부하게 났다.

맛있는 걸 먹으니 마음이 풀리고 새삼 황명 재단의 이사장이 같은 반 돌아이의 친척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 돌아이도 먹을 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골랐기 때문이다.

돌아이와 황명호 이사장의 존재를 연관 짓고 석류차를 마시니 맹효돈은 드디어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다.

“흠.”

눈에 띄게 긴장이 풀린 맹효돈을 보자 황호가 눈을 빛냈다.

그 뒤로 황호는 학교 이사장과 학생이 나눌 법한 대화를 짧게 했다.

학업과 학교생활에 관해 간단히 문답을 하는 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셔 왔습니다.”

“들어오도록.”

황호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다.

맹효돈이 문 쪽을 보니 열린 문 사이로 처음 보는 외꺼풀 사내와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마족(馬族)의 수장, 흑마가 보였다.

사실 외꺼풀 사내, 적호는 파이트 클럽에 잠입했기에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당시 적호는 맹효돈이 탈출하기 전까지는 적연을 사용해 모습을 감췄기에 맹효돈은 적호를 알지 못했다.

적호가 한 발 뒤로 물러나자 흑마가 자리에서 일어난 황호 쪽으로 걸어왔다.

“오랜만이네. 뭐라고 부르면 되지?”

“황명호라고 부르게.”

“그래. 다음부터는 디바이스 코드로 연락할게.”

황호와 흑마, 둘은 구면인 듯했는데 마치 서로 이름도 연락처도 없는 듯했다.

맹효돈은 뭔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흑마가 진족이라 그러겠거니 했다.

황호와 흑마가 명함을 교환한 후, 둘이 나란히 서서 맹효돈 쪽을 봤다.

흑마는 어두운 피부 위로 흑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언뜻 산만해 보일 수도 있는 헤어스타일이었으나 스리피스의 바지 정장을 단정하게 입은 탓인지 산만하기보다는 박력이 느껴졌다.

첫 만남 때처럼 백마를 이끌고 등장한 것도 아닌데도, 호족의 영역 한가운데에서 흑마는 태연하게 맹효돈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답례를 하러 왔어.”

그 모습을 황호와 적호가 지켜보고 있었다.

*    *    *

현재 은휘관 이사장실에서 맹효돈, 황명호 이사장, 적호 그리고 흑마가 대화 중이라고 한다.

눈앞에 황지호가 버티고 있지 않았더라면 전무영의 광림, ‘그림자 없는 시간’을 써서라도 직접 보러 가고 싶었다.

흑마가 최상급 흑마노와 이계 금속으로 만든 편자를 내밀어 맹효돈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는 설명을 마쳤을 때였다.

분신을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 중이던 황지호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왜 그래?”

“더 듣고 싶은가?”

“어.”

“그럼 먹도록.”

지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은광고를 침략한 배신자 수장과 얘기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약밥이 넘어가겠는가.

“이야기를 들으며 먹도록. 싫으면 나중에 알려 줄 것이다.”

어쨌든 알려 줄 마음은 있나 보다.

망할 노친네와 입씨름을 해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기에 말대꾸를 하는 대신 젓가락을 들었다.

억지로 먹는 약밥이긴 하지만 막상 먹으니까 맛이 있어서 잘 넘어갔다.

내가 꾸역꾸역 먹기 시작하니 황지호가 보온병에서 석류차를 따라 내게 내밀고 다시 입을 열었다.

“맹효돈이 거절할 때마다 흑마가 답례품으로 준비한 물건을 하나하나 더 꺼내고 있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보는 눈은 나쁘지 않군. 흑마가 상징하는 게 그리 내키지 않아 가까이할 마음은 들지 않지만.”

맹효돈이 답례를 받을 기색이 없자 흑마는 더 비싼 물건을 꺼내고 있나 보다.

그냥 먹을 걸 내밀었다면 맹효돈은 군말 없이 받아들였을 텐데.

흑마는 맹효돈에 관해 요만큼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하하하!”

갑자기 황지호가 처웃기 시작했다.

황명호 이사장 분신이 보거나 들은 상황이 웃겨서 저런 거겠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고 보면 그냥 돌아이처럼 보였다.

“흑마가 동화 속 산신령 흉내를 냈다.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라도 본 것인지, 욕심이 없는 맹효돈에게 모든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 아까부터 ‘이게 네가 받아야 할 답례품이야?’ 하고 물을 때부터 이상하더니! 하하하하!”

맹효돈의 멍한 얼굴이 절로 떠올랐다.

흑마는 흑마노 편자에 이어 마족(馬族)이 데리고 있는 유니콘의 꼬리털을 모아 만든 드림캐처와 말을 탄 역대의 영웅들이 새겨진 황금 동전을 모두 맹효돈에게 떠넘겼다고 한다.

“마족(魔族)의 습격 탓에 흑마도 많이 변했군. 아니, 그냥 나이 탓인가. 많이 맛이 갔군.”

왜 황지호가 셀프 디스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타 진족의 습격에 시달리는 건 호족도 마찬가지고 먹은 나이로만 따지면 황지호는 어딜 내놔도 밀리지 않는다.

“좀 말려.”

“그건 곤란하군. 말릴 명분이 없으니까. 한 진족의 수장이 은인에게 은혜를 갚겠다는데, 어째서 말려야 하지? 하하하하!”

황지호는 완강한 태도로 처웃으며 말릴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결국 맹효돈은 강제로 선물을 떠안고 이사장실을 나간 모양이었다.

맹효돈은 나처럼 아이템창도 못 쓰니 저 보물들을 어찌 보관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힐 거다.

진성 호구인 목우람만큼은 아니라곤 하나 사월세음과 함께 유력한 호구 후보로 꼽히는 맹효돈이 이상한 사람한테 낚여서 저 보물들을 다 날리지 않게 잘 지켜봐야겠다.

“……!”

“왜 그래?”

처웃던 황지호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했다.

황지호의 감정 표현이 참 과격하고도 들쭉날쭉해서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짜 미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맹효돈이 퇴실한 이후에도 흑마가 자리에 남았다.”

“그런데?”

황지호는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마족(魔族)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군.”

“마족(馬族)이 평소에 습격당하는 것 때문에 그런 거야?”

“아니.”

황지호는 학교 밖, 개막식이 열렸던 은광 스타디움이 있는 방향을 보며 말했다.

“흑마는 여기 오기 전에 은광 스타디움을 둘러보고 왔다고 한다. 아바리티아의 사제와도 연이 있던 것 같군.”

*    *    *

“7대 죄악의 마신 중 탐욕의 마신 아바리티아. 그 사제가 여기 왔었지? 죽였어? 아니면 살렸어?”

“12지 동맹은 어디까지나 ‘상호 불가침’ 외에 서로에게 지켜야 할 약속이 없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의사가 담긴 황호의 말에 흑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는 마호가니 원목 소파에 깊숙하게 앉으며 긴 머리를 어깨 뒤로 흘렸다.

잠깐 말을 고르던 흑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호족과는 딱히 인연이 없는데 너무 성급하게 말한 것 같네. 미안, 마음이 좀 급해서.”

“…….”

“효돈이가 구했다는 권속 말인데, 사실 권속이 아니라 우리 신수였거든. 그때 신수가 죽었으면 좀 상황이 많이 안 좋아졌을 거야.”

황호가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늠해 보듯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힘만으로 마족(魔族)에 대항하는 건 귀찮긴 해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그런데 점점 상황이 안 좋아져서.”

“저번 12지 동맹 회담을 기억하고 있겠지?”

저번 12지 동맹 회담은 어수선했으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12지 내에 배신자가 있고, 그 배신자가 노리는 대상에는 호족과 토족이 포함되어 있으며, 호족은 이에 대응할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해 봤을 때, 황호의 말은 지금 호족이 흑마를 도울 생각이 없다는 의사 표현을 돌려서 하는 것이다.

흑마는 그 뜻을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호족이 도와 주면 고맙겠지만, 그게 어렵다는 건 알고 있어. 대신, 공통의 적을 쓰러뜨리는 것 정도는 협력하게 해 줘.”

“공통의 적?”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호족의 신역에도 씨앗을 심었잖아? 그 사제가 우리 쪽에도 씨앗을 뿌렸거든. 거기에 휘말려서 신수가 힘을 잃고 어리고 약하게 변했어.”

황호가 흑마를 가만히 봤다.

흑마는 은광고에 와 면담을 청하기 전에 은광구를 둘러본 듯했다.

아바리티아의 사제와 대치해 씨앗에 대처해 왔다면 사관학교 교류전 시합이 열리는 각 시설에 심어져 있던 씨앗의 흔적을 감지해 냈을 거다.

“씨앗이 다 박살 나 있는 걸 보니 대치는 한 것 같고, 마족의 ‘눈’ 중에서도 아바리티아의 사제의 것이 없는 걸 보니 이미 그 사제는 처리한 것 같은데. 내 말이 맞아? 틀려?”

흑마의 말은 전부 옳았지만, 황호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현재까지 대화의 흐름에서 가장 거슬리는 것을 묻기로 했다.

“어째서 마족의 생사 여부를 묻는 거지?”

“그야, 그자가 마신의 사제니까.”

흑마는 마족(魔族)에 관해 거의 정보가 없는 호족과 달리 그들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신체와 이능파를 봉인해도 마족의 사제는 마신과 신앙으로 이어져 있어서 그 접촉을 막을 수 없어. 죽이지 않는 한.”

“그 점은 알고 있다.”

“그래?”

흑마가 말을 덧붙였다.

“그럼 그 마족의 사제가 ‘눈’을 옮길 수 있는 것도 알아?”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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