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87화 (287/925)

50. 세트 피스 (6)

흑마의 말에 마주 보고 앉아 있던 황호, 문가에 서 있던 적호가 각각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감지계, 통찰계 스킬로는 꿰뚫어 보는 게 불가능하며, 진족 중에서도 시선에 극히 민감한 몇몇 존재들만 감지가 가능한 마족의 ‘눈’.

현재로선 그 ‘눈’을 막는 방법이라곤 신역 은광고 수준의 결계로 해당 지역을 보호하거나, 통신과 위성 신호 수신을 차단하는 방법밖에 없다.

상황이 이러하니 흑마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어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옮긴다고?’

언령에 제압당한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는 양 눈알을 굴리던 게 마음에 걸렸다.

전쟁을 치르고 무수한 수의 적을 제압해 온 황호는 그런 눈을 하는 포로를 셀 수 없이 많이 봤다.

그런 치들은 십중팔구 제가 죽더라도 후일을 도모할 여지를 남기곤 했다.

황호는 의문을 입에 담았다.

“‘눈’을 옮긴다는 게 무슨 뜻이지?”

“그건 몰랐나 보네.”

흑마가 생긋 웃고 찻잔을 기울였다.

찻물을 삼키며 뜸을 들이는 사이 호족이 얼마나 정보를 가졌는지 판단하는 것 같았다.

흑마가 비록 호랑이굴 한복판에 부하도 없이 들어와 정보를 뿌리는 중이라 하나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건 아닌 듯했다.

황호는 대답을 독촉하는 대신 찻물을 다시 데웠다.

흑마가 입을 열 때까지 자신도 입을 열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황호가 우아하게 차를 다시 준비하는 걸 가만히 응시하던 흑마가 생각을 정리한 듯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이계 충돌 이후 우리의 세계와 인간들의 현세가 겹쳐져 마족(馬族)이 한반도에 터를 잡은 이후로 마족(魔族)과의 싸움은 끊이질 않았어. 장난 수준으로 귀엽게 시비를 거는 이들부터 우리를 멸족시키려 한 무엄한 것들까지. 100년에 걸쳐 다양한 마족(魔族)을 상대했지.”

흑마는 좀처럼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고상하게 차를 마시며 경청하는 황호와 달리 적호는 초조한 얼굴로 흑마를 바라봤다.

흑마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들은 어떤 구심점도 없고 인간만큼이나 다양한 배경을 가졌어. 하지만 공통점은 있어.”

“그게 ‘눈’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적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보는 것’에 집착한다는 것. 관음증 증상을 보이는 변태 수준이지. 보는 것에 한해 마족을 따라갈 존재는 극히 드물어. 보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광림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그 집착이 ‘눈’을 옮기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으로 이어진 거군.”

황호의 말에 흑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는 고개를 살짝 숙인 상태로 말을 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반쯤 가려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응. 한때 정보가 새어 나가는 걸 막기 위해 마족(魔族)을 신역 내부로 유인해 생포한 적이 있었어.”

흑마는 담담하게 그때 있던 일을 이야기했다.

수십 차례의 습격 끝에 흑마는 습격자들의 ‘눈’이 제 신역 주변을 관찰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눈’이 12지 동맹의 결계로 보호되는 신역 최심부는 꿰뚫어 보지 못한다는 걸 깨닫자 계략을 세워 그들을 안으로 끌어들여 생포할 것을 결의했다.

습격자들의 정보를 캐내고, 이쪽의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건 실책이었어. 우리가 그들의 집착을 얕봤던 거야.”

언령 스킬을 가진 자가 없어 그 마족의 사제를 잡고 고문하는 건 쉽지 않았다.

마족의 사제는 약간의 기력이 돌아오면 곧바로 저항했고 비릿하게 웃을 뿐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수가 지력을 끌어 써서 마족 사제의 발을 묶어야 했고, 흑마가 직접 나서서 죽음과 삶의 경계에 사제를 고정시켜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기억을 강제로 읽어야 했다.

그리고 ‘눈’의 전이에 관한 단서를 잡아낸 순간, 마족(魔族)이 습격해 왔다.

습격해 온 마족(魔族)은 권속들의 약점과 신역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미 모든 정보가 옮겨 간 것이다.

“마신의 사제는 마계에 신단(神壇)을 만들어 신을 모셔. 그들은 죽지 않는 한, 마신에게 기도를 올릴 수 있어.”

“……그 기도가 ‘눈’을 옮긴다는 것과 관계가 있겠군.”

“그래, 제가 여태까지 본 모든 것을 옮길 수 있어. 마신을 모시며 신단에 축적한 이능파와 마력, 마신이 내린 신력과 축복. 그리고 자신의 시력을 대가로 신단에 제가 본 모든 걸 기억한 ‘눈’을 전이시키는 거야.”

“그럴 수가……!”

적호가 경악하며 인상을 썼다.

그들의 ‘보는 것’에 대한 집착은 상상을 넘어섰다.

황호는 그 추잡한 집착을 경멸하며 흑마가 한 말을 되새겼다.

황호는 바로 입을 열었다.

“확인하겠다.”

“신화계 호족께서는 눈치가 빠르네.”

‘눈’을 옮기는 조건은 흑마가 말해 줬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 아바리티아의 사제를 살펴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    *    *

은광구 연구동 구역 광림 연구 4관, 은영관의 안내도 어느 곳에도 표시되지 않은 지하 저편.

호족의 수장과 수석 주술사가 견고하게 짠 결계 너머는 나락이었다.

나락에 한 번 끌려오면 죽음조차 용서되지 않았다.

오직 그 죽음이 허용되는 건 노화로 인해 천수가 다했을 때뿐.

하지만 인간과 달리 진족이나 후예는 노화로 죽지 않으니, 불로(不老)의 존재들은 영영 이곳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이곳에 죄를 지어 끌려온 자 중, 유일하게 살아서 다시 빛을 본 건 적호 하나뿐이었다.

그 나락 속을 백호가 걷고 있었다.

크르르……!

“진정하거라.”

백호 옆을 거대한 그림자가 따르고 있었다.

제 본모습을 한 신수였다.

신수는 나락의 공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몇 번이나 목을 울려, 백호가 가끔 손을 높게 들어 올려 털을 쓰다듬어 줘야 했다.

“이곳 공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참도록. 바로 산책시켜 주마.”

그 말에 신수가 코끝으로 백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불만스럽게 목을 울렸다.

지금 바로 산책하러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신수는 저 멀리서 보초를 서던 호족이 섬뜩해할 만큼 낮고 굵은 울음소리로 불만을 숨기지 않았지만, 마치 백호는 어리광부리는 아이를 달래듯 신수를 다독였다.

“황호는 지금 흑마를 상대해야 한다. 지력을 쓸 일이 있으면 네가 나서야 한다.”

백호의 말에 신수가 납득한 듯 울음소리를 냈지만, 뭔가를 기대하듯 꼬리를 크게 흔들었다.

신수의 크기 탓에 꼬리를 흔드는 모양새가 마치 무기를 흔들고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알았다. 조의신에게는 말하지 않으마.”

크릉.

신수는 애교를 부리듯 짧게 짖었다.

견족의 모습을 빌릴 때와 달리 귀여운 소리는 나오지 않았는데, 백호는 기특하다는 듯 손을 올려 신수의 목을 긁어 줬다.

기분이 부쩍 좋아진 신수와 함께 나락을 걷던 백호는 삼중으로 결계가 덧씌워진 인줄 앞에 멈춰 섰다.

아바리티아의 사제를 봉인한 곳이었다.

인줄 너머로 보이는 아바리티아의 사제는 미동도 없이 굳어 있었다.

은광 스타디움에서 황호의 손에 기절한 이후, 아바리티아의 사제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여기에서 기다리도록. 문제가 생기면 지력을 끌어 저자의 움직임을 묶어라.”

크르르!

신수의 배웅을 뒤로 백호가 인줄을 넘어 아바리티아의 사제에게 접근했다.

백호는 망설임 없이 아바리티아의 사제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안구가 움직이지 않은 탓에 자주색의 눈동자보다 흰자위가 훨씬 많이 보여 기괴해 보였다.

파아앗!

백호는 눈에 빛을 모아 ‘안광’으로 그 눈을 살폈다.

맹수처럼 변한 백호의 눈이 마족의 안구를 철저하게 살폈다.

흰색의 이능파가 인줄 안의 감옥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백호가 안광을 거뒀다.

자리에서 일어난 백호가 곧장 황호에게 연락했다.

“황호, 이자는 시력을 잃었다.”

*    *    *

“……그러면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본 모든 게 마계로 넘어간 거구나.”

“그렇다.”

그날 있던 일을 되새겨 봤다.

아바리티아의 사제는 내가 사용한 광림을 목격했다.

가장 곤란한 건 ‘언령’ 스킬을 사용한 장면을 보였다는 것이다.

은광고에 제갈재걸, 공청훤 외에도 언령 스킬을 사용하는 자가 있긴 하지만, 그들은 언령이 마족의 약점인 걸 모르니 상대적으로 경계할 필요성이 낮다.

그러나 나는 명백하게 언령 스킬이 그들의 약점임을 알고 사용했고, 그 장면을 보면 누구나 알 거다.

나는 황지호를 대신해 자폭을 시도하는 아바리티아의 사제를 상대해 결박했으니까.

‘앞으로 그 ’눈‘의 정보를 얻은 마족은 나와 호족을 적극적으로 노릴 거야.’

제갈재걸과 공청훤은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낮다고 하지만, 호족이 운영하는 은광고 소속의 교사들이다.

그쪽도 경계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나는 조의신의 모습으로도 마족과 마주쳤었다.

―안녕하세요, 은광고 신문부 소속 조의신입니다. 사진 촬영과 인터뷰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스태프 목걸이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했다고는 생각하는데, 이름과 얼굴을 전부 드러낸 게 마음에 걸려.’

조의신의 본 얼굴과 이름, 소속도 나를 노릴 마족의 손에 들어간다는 게 뭔가 꺼림칙했다.

내가 마족이고, 내 약점이 언령이라는 걸 아는 언령술사가 존재하는데 단서가 별로 없다고 치면 그날 눈에 띄는 행동을 한 모든 존재를 다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그날 개막식에 왔던 모든 인간을 노릴지도 모른다.

“앞으로 그 까마귀 가면을 쓰는 건 그만둬라.”

황지호의 말에 생각이 멈췄다.

그건 좀 곤란했다.

마족의 ‘눈’은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는데, 아바리티아나 그가 속한 무리가 사용하는 ‘눈’과 까마귀 마왕이 쓰는 ‘눈’은 궤가 좀 다른 탓이었다.

‘보는 것’에 환장하는 건 같았지만, 발현 형태는 크게 달랐다.

예전엔 같은 종목으로 취급되었던 무술이라도 계파나 유파가 갈라지고 오랜 시간이 흐르면 아예 다른 종목으로 분리되고 기본 동작도 갈리는 것처럼.

까마귀 마왕, 방관과 침묵의 마왕 시델렌티움의 ‘눈’은 까마귀를 통해 발동한다.

까마귀 가면을 쓰지 않는다는 건 앞으로 그에게 볼거리를 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직은 가면을 계속 써야 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로 답하지 않자 황지호가 혀를 찼다.

“계속 쓸 생각인가 보군.”

“그래, 적어도 내년까지는 쓸 거야.”

“……적어도 내년까지라고? 내년에 무슨 일이 있나? 신역 밖을 훤히 꿰뚫는 눈을 가진 마족에게 목숨이 노려지는 걸 감수하고도?”

황지호의 목소리가 점점 딱딱해졌다.

내년이라기보다는 정확히 올해 말까지는 까마귀 가면을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올해 말, 플마고 유저들이 ‘콘크리트층 붕괴 사건’이라고 불렀던 시나리오가 발생한다.

물론 그 시나리오의 정식 명칭은 콘크리트층 붕괴 사건이 아니었지만.

“어, 눈이 내릴 때까지는 써야 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은광고를 뒤덮은 폭설 속, 그 시나리오가 진행된다.

나는 지금이 황지호에게 그 사실을 전할 때라고 생각했다.

“풍백과 우사, 운사를 기억해?”

개천신화 속에는 날씨를 관장하던 세 관리가 존재했다.

신인을 따라 자진하여 많은 힘을 버리고 땅으로 내려온 이 셋은 힘이 많이 약해졌다고 하나, 신인이 한반도를 통치하는 동안 신인과 함께 기근, 홍수를 막아내고 기우제를 주관했다.

“……기억하고 있다. 죽은 전우를 잊을 리가 없지.”

황지호는 이 셋이 언급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셋은 안 죽었어. 그들은 올해 말에 은광고에 눈을 내릴 거고…… 방비하지 않으면 적호와 용제건이 죽고, 진족, 후예, 인간 가릴 것 없이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죽을 거야.”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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