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세트 피스 (7)
게임 속 플레이어 마이스터 고교의 시간은 현실보다 느리게 흘렀다.
내가 플마고를 시작한 건 고3, 수능이 끝난 다음 날이었으나 타이틀 히어로 주수혁, 타이틀 히로인 안다인이 1학년을 마칠 즈음에는 난 이미 성인이 되어 입대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대작 모바일RPG 플레이어 마이스터 고교, 이번 주 신규 스토리 업데이트 예정!]
그 뉴스가 뜬 건 크리스마스 며칠 전이었다.
처음으로 현실의 크리스마스와 플마고 속 크리스마스 시기가 겹치게 되어, 콘크리트처럼 굳은 소수의 플마고 팬들의 기대감과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업데이트에 관한 정보는 일정뿐이어서 팬 커뮤니티에 예상 글이 넘쳐 났다.
[이번에도 좀 힐링 스토리였으면ㅋㅋㅋ 음악 동아리 발표회에서 진족이 악기 선물한 거 훈훈했는데.]
[우리 동하 지방 출장 갔는데 크리스마스 이벤이라니요 ㅂㄷㅂㄷ]
[크리스마스 좋긴 한데…… 제갈 쌤 생각 때문에 크리스마스 이벤트 못 즐기겠어. 그냥 마음이 안 좋아. 난 아직 2학년 0반 애들한테 과몰입한다…… 최편득 같은 새끼들은 아직도 교사질하고 있는데. 휴…… 눈새 같이 굴어서 미안.]
[↑눈새 글인 거 알면 자제 좀;]
팬 커뮤니티에는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부정적인 전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연말, 그것도 크리스마스라는 분위기에 힘입어 희망적인 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업데이트 소식 듣고 사족보행으로 달려왔음. 용쌤 산타 의상 과금템으로 풀리겠지? 유희계 용이 이런 빅 이벤트를 놓칠 리가 없다 이 말입니다.]
[4/4분기 학생 대표 회의에서 학생회랑 선도부 애들이 크리스마스 이벤 준비한다는 복선 깔렸음. 상희는 좀 힘들 거 같긴 한데 다인이랑 혜지는 100퍼 산타 옷 입는다.]
[크리스마스 파티 하면 유리 다시 볼 수 있음……? 유리는 언제 다시 등교해?ㅠㅠ 산타 옷 바라지도 않는다. 등교만 해 줘…….]
[크리스마스 하면 연애 이벤트 아님? 주수혁이랑 안다인 언제 진도 나감?? 이번엔 손이라도 잡겠지???]
[과금템으로 무기 풀렸으면 좋겠네. 이계 노가다 뛰는데 보스몹이 R급만 드랍해서 스마트폰 부술 뻔함.]
[크리스마스 기념 프리 퀘스트 경험치 두 배 이벤트 회로 돌린다.]
[NPC도 과금 의상 내 줘라…… 적호횽 검은 옷 말고 딴 거 좀 입히고 싶다! ㅠㅠ]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 대망의 신규 스토리가 업데이트되었다.
그러나 점검이 끝난 정각에 바로 플마고를 플레이하지는 못했다.
그날 과외 아르바이트가 잡혀 있는 바람에 천성헌의 크리스마스 파티도 거절해야 했다.
사실 동기들이 거의 군대에 간 상태라 후배들만 잔뜩 모인 파티에 불참할 구실을 찾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괜히 헌내기가 가서 분위기를 흐리면 안 되지. 또 오늘은 집에 일찍 가서 플마고도 해야 하고.’
비록 천성헌의 파티엔 가지 못했지만, 크리스마스 이브 기념이라고 간식으로 케이크를 내온 제자 덕에 그럭저럭 크리스마스 기분은 냈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할 때 진눈깨비가 내렸다.
당시에는 생활비에 여유가 좀 있어서 고시원이 아닌 원룸에서 지냈는데, 버스를 타기에는 미묘한 거리라 한참 걸어야 했다.
‘……이미 신규 스토리 클리어한 사람도 많겠지?’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한 손으로는 얼어붙은 손끝을 움직여 업데이트 파일을 다운받으며 집으로 향하는 동안, 고민에 빠졌다.
스토리 볼륨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챕터 1 정도는 깼을 법한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팬 커뮤니티에 플레이 후기를 올렸을 텐데 스포일러는 당하기 싫지만, 분위기가 어떤지 궁금했다.
‘제목만 보고 바로 플레이해야지……!’
고민 끝에 즐겨찾기에 등록된 팬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플마고의 콘크리트 팬층이 붕괴하는 순간을 목격하였다.
다들 스포일러를 주의하라며 친절하게 제목에 ‘ㅅㅍ’를 말머리로 달아 놨는데, ‘ㅅㅍ’가 스포일러의 약자인지 쌍욕의 초성을 딴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팬 커뮤니티 페이지를 연 것과 동시에 스포일러를 당했다.
적호의 골수팬이 이성을 잃고 제작진을 저주하는 글을 중복해서 올렸던 탓에, 어떤 상황인지 짐작하고 말았다.
그리고 내 짐작대로의 전개가 이어졌다.
[여기는 제게 맡기고 먼저 가십시오. 상대는 진족입니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12지 동맹 내에 배신자가 있다는 걸 안 적호는 주수혁 일행을 대피시키고 홀로 의문의 진족을 상대하게 된다.
상대는 적호가 최편득을 통해 우연히 잡은 단서로 추려 낸 12지 진족의 수장이었다.
적호가 천신의 진노로 힘이 제한된 상태라고는 하나 적호를 상대하는 진족은 제 정체가 발각될 것을 염려한 듯, 주무기나 스킬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았기에 둘은 팽팽하게 맞선다.
그 균형을 깨뜨린 건 은광고에 쏟아지기 시작한 눈이었다.
[이 눈은…….]
눈이 쌓일수록 적호의 움직임이 무뎌졌다.
적호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점점 궁지에 몰려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적호는 NPC였고, 단독으로 싸우는 중이라 화면 밖 플레이어는 조작을 비롯한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적호는 텅 빈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움직임을 일순 멈췄다.
그는 누가 은광고 학교 부지에 한정해 눈을 내리고 있는지 파악한 듯했다.
[풍백과 우사, 운사가 어째서…… 왜 그들이…….]
상대는 적호의 움직임이 멈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적호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직후, 뼈와 살이 꿰뚫리는 소리 같은 사운드 이펙트와 함께 적호가 피를 토했다.
상대의 무기가 적호의 복부를 완전히 관통한 것이다.
적호는 검은 옷 위로도 선명히 보일 만큼 피를 쏟으며 무너져 내렸다.
상대가 적호의 숨을 완전히 끊기 직전, 붉은 드레스를 입은 비탄의 웅녀가 나타나 그 앞을 가로막고 스토리에 개입하게 된다.
적호가 죽자 모든 걸 내려놓고 싸운 비탄의 웅녀로 인해 큰 희생을 치르긴 했으나 사건은 수습된다.
그러나 적호가 죽었기에 12지 동맹 내 배신자의 정체와 풍백, 우사, 운사의 정보는 주인공 일행에게 전해지지 못한다.
‘그걸 전하는 게 빨랐던 건지, 늦었던 건지 모르겠어.’
성탄절에 일어날 그 사건에 관해 언젠가 호족에게 전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타이밍을 재기 어려웠다.
지나치게 빨리 말하면 신빙성을 입증하기도 어렵고 내가 도리어 의심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늦게 말하면 사건을 대비할 시간이 부족해진다.
체스로 비유하자면, 상대가 노릴 피스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도 미들 게임 페이즈에 놓일 수를 체스 오프닝 때부터 대비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풍백, 우사, 운사가 눈을 내릴 거라는 증거가 없는데 이르게 말한 걸까.’
내가 말을 마친 후, 황지호는 반응이 없었다.
황지호가 감정 컨트롤이 안 되어 이능파나 마력을 발산할 때를 대비했는데, 민망할 정도로 무반응이었다.
……내가 하는 말에 현실성이 없어서 그런가?
좀 더 신뢰를 쌓거나 그럴듯한 증거를 잡고 나서 말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조의신, 나는 너를 믿는다. 너는 몇 번이나 우리의 후예들을 구하고 신역을 지켰다.”
황지호는 감정을 억누르고 아주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하지만 풍백과 우사, 운사는 먼 옛날 외적과의 싸움에서 신인을 지키다 사망했다.”
외적과 싸운 순간.
그렇다면 천신이 신성한 범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전이다.
황지호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이전에 벌어진 셈이다.
“그 순간을 봤어?”
“…….”
황지호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관자놀이를 세게 누르며 생각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보지 못했다. 다른 이가 그들의 죽음을 증언했지. 나는 신체의 일부가 남아 있는 것만을 보았다.”
그렇다면 황지호는 그 셋이 죽는 순간도, 시체도 보지 못한 셈이다.
나는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혹시 풍백과 우사, 운사 그 셋은 형제야? 셋 중에 혹시 남자 쌍둥이가 있지 않아?”
“셋 중 둘은 그러하다. 변덕스러운 풍백과 우사는 외모도 행동거지도 닮았다.”
게임 속 흑막의 밑에 두 쌍둥이가 있었다.
정보가 적어 그 둘이 풍백과 우사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의심해 볼 여지가 생겼다.
나는 더 질문할 게 없어 입을 다물었다.
내가 계속 침묵하고 있으니 황지호가 입을 열었다.
“조의신, 네가 ‘알고 있는 것’에서…… 무엇이 신역을 공격하는가?”
황지호는 나와 옛 전우를 모두 믿고 싶은 모양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는 게 전해졌다.
나는 황지호의 의사를 존중해 객관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바를 전하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은광고 학교 부지에 디버프 효과가 있는 눈이 내려. 그 눈은 풍백과 우사, 운사가 내리는 눈일 가능성이 커.”
“그 가능성의 근거는 무엇이지? 날씨에 개입이 가능한 상위 존재나 진족은 적지 않아. 신역 은광고에 그런 삿된 눈을 뿌리기 위해선 큰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황지호는 냉정하게 가능성을 따졌다.
그래도 황지호가 말하는 ‘알고 있는 것’에는 저걸 뒤집을 만한 근거가 존재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의 적호는 그 셋이 눈을 내렸을 거라고 판단했어.”
황지호가 숨을 짧게 삼킨 후 말을 잇지 못했다.
황지호는 숨을 가다듬은 후, 여전히 다른 가능성을 따졌다.
“그들이라면 한반도에서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있겠지. 운사가 먹구름을 모으고, 우사가 비를 뿌리고 풍백이 그 비를 얼려 눈의 결정으로 바꾸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땅에 내려오기 위해 많은 걸 버렸어. 그런 짓을 하려면…….”
황지호가 입을 다물었다.
‘기우제’라는 말에 떠오르는 것이 있는 게 모양이다.
“……기우제나 기청제는 쉬이 할 수 없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기근이나 홍수가 닥치면, 산짐승을 사냥하고 곡식을 모아 제를 올렸지.”
황지호는 그간 모았던 정보를 반추하다 어느 키워드를 떠올린 모양이다.
내가 처음 그 키워드를 들었을 때는 그게 이 세계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세계에 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고찰을 거듭한 후에야 어떤 가설을 하나 세우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 황지호가 내가 뿌린 단서를 통해 나와 같은 결론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래. 거대한 의식에는 ‘제물’이 필요했어. 준비하는 기간도 길게 필요했지.”
제물.
흑막은 오랜 기간 은광고 학생들을 희생시켜 제물로 삼고자 했다.
재능이 넘치며 아직 속세에 덜 물든 은광고 학생의 육신과 혼은 좋은 제물이 될 거다.
게임 속에서 흑막은 최편득, 저강렵을 통해 은광고 학생을 죽여 제물을 조달하고자 했고, 이에 반쯤 성공했다.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나비령 탓이다.
흑막의 손에 넘어가 제물이 된 학생도 있었지만, 나비령이 김유리의 광림을 폭주시켜 그 '제물'의 양과 질을 떨어뜨려 버렸으니까.
나비령의 계략에 의해 일부 학생들은 제물이 되는 대신 김유리의 광림에 죽었다.
“……그자가 칭하던 ‘제물’은 신역에 삿된 눈보라를 부르기 위함이었는가.”
황지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잠시 황지호의 눈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변하였다.
“그래, 나도 그렇게 추측하고 있어.”
황지호는 그 이후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으나 진갈색의 눈이 가끔 황금색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진갈색으로 변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오늘 교류전 관람은 함께하지 못할 것 같군. 미안하다. 나 대신 말을 전해 다오.”
황지호는 빈 찬합을 들고 자리를 떴다.
뜨기 전, 나직하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얘기해 줘서 고맙다, 조의신. 이 건에 대해서는…… 내가 냉정을 되찾으면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해야 할 이야기는 많았지만, 말없이 황지호를 보내기로 했다.
아이들과 합류한 후에야 뒤늦게 후회 비슷한 생각이 떠올랐다.
‘황지호한테 괜찮냐고 물어봤어야 했나.’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