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89화 (289/925)

50. 세트 피스 (8)

은휘관 앞.

적호와 흑마가 디바이스 코드 교환 후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에어 셔틀을 대기시켜 뒀습니다. 정문 앞에 ‘눈’이 있을지도 모르니 저는 여기까지만 배웅하겠습니다.”

“그래, 표면상 내 방문은 효돈이에게 답례품을 전달하기 위함이라고 가장했으니까. 수장의 최측근이 정문까지 배웅하면 이상하게 보일 거야.”

답례품 전달이 가장인 것치고 답례품의 가치가 어마어마했고 당황한 맹효돈을 보며 흑마가 즐기는 것처럼 보였는데.

적호는 정중하게 흑마를 배웅하면서도 냉정히 판단했다.

“우리와 한정적으로 동맹을 맺는 것, 잘 생각해 봐. 당신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던데, 황호를 잘 설득해 줘.”

“최종 결정은 황호가 합니다.”

“호족은 사이가 좋잖아. 최종 결정은 황호가 하더라도 황호가 당신의 의사를 무시할 리가 없지.”

“제가 과거에 호족에 범한 죄를 모르진 않을 텐데요.”

“그런 짓을 하고도 여전히 황호의 곁에 있다는 게 당신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것 같은데.”

흑마는 정차한 에어 셔틀에 올라타는 대신 적호를 보며 말했다.

“수장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그런 짓을 한 진족은 본보기로 죽여 놨을 거야.”

적호도 그 말엔 공감했다.

제 친우들은 자신에게 지나치게 큰 자비를 베풀었다.

물론 적호는 죽음으로 제 죄를 씻는 것도 고려했다.

하지만 그 선택을 하기 전에 황호와 계약을 하게 되었고, 적호는 형틀에 묶였다.

그런 사정을 전부 말할 생각은 없기에 적호는 담담하게 말을 돌렸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의 수장은 황호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수장은 황호잖아? 그럼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 바쁘지 않으면 상담 정도는 해 줄게.”

흑마는 그 말을 남기고 에어 셔틀에 올라탔다.

적호는 이사장실로 향하며 생각에 잠겼다.

흑마와 한 대화, 마족(魔族)의 눈이 부를 영향보다 먼저 떠오른 건 황호였다.

‘황호가 왜 저러지? 마치 청호와 신인이 인간으로 환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인데.’

황호와 흑마의 대화가 끝날 때쯤 황호의 말수가 부쩍 줄었다.

백호가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시력을 상실했음을 전했을 때까지는 문제가 없었고, 그 이후 이어진 흑마와의 대화에도 그리 주목할 만한 주제는 없었다.

이사장실 문을 열기 전, 황호의 비서가 정중히 말을 걸었다.

“적호 님, 황호 님께서는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어디로 갔지?”

“조금 이르지만 오늘은 이만 귀가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적호는 의아해하는 얼굴을 했다.

흑마를 배웅하며 잠시 대화를 나누긴 했으나 몇 분 안 되는 짧은 찰나였다.

당연히 전이된 ‘눈’의 대책에 관해 의논하리라 예상했던 적호는 고민하다 그대로 황명호 대저택으로 향했다.

‘은휘관 대신 저택에서 이야기할 생각이었나?’

은호의 후예들이 황호의 행방에 관해 언급했다.

“황호 님은 5층에 올라가셨어요!”

“어린 황호 님과 덜 어린 황호 님, 늙으신 황호 님…… 하여튼 많이 오셨어요.”

“잠시 분신을 지우고 쉬시는 것 같아요.”

황호는 현재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분신을 모두 불러들인 것 같았다.

분신을 불러들인 것도 의외였다.

그러나 ‘5층’이라는 단어가 더 마음에 걸렸다.

“5층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황호는 옛 친우들을 저택으로 불러들이며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지낼 것을 허락했으나, 이는 5층을 제외한 구역에 한한 이야기였다.

평소에 황호가 휴식을 취하더라도 최소 분신 하나를 1층에 배치해 두고 있었는데 모든 분신이 5층에 있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모닝 티타임도 1층에서 가지던 황호가 왜?’

출입을 불허한 5층에 틀어박혀 있다는 건 혼자 있게 내버려 두라는 뜻일 거다.

적호는 계단과 저택 안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번갈아 보며 전전긍긍하다 막 신수와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백호에게 말을 걸었다.

황호가 5층에 틀어박혔다는 사실을 간략히 전한 적호가 물었다.

“백호, 황호에게 들은 건 없습니까?”

“…….”

백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거실 한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왜 시선을 돌렸지?’

백호의 시선 끝에 은호의 후예들이 어설픈 솜씨로 만든 공예품과 황호가 주오 아일랜드에서 만들어 왔다는 호랑이 모양 기념품이 있었다.

기념품 위쪽에는 홀로그램으로 된 달력과 각자 언제 저택을 비우는지 스케줄을 표시하는 일정표가 있었다.

‘백호는 뭘 보는 거지? 갑자기 공예품이나 기념품을 보는 건 아니겠고…… 달력과 일정표를 확인하는 건가.’

백호는 어느 사이엔가 다시 시선을 적호 쪽으로 돌려 답했다.

“황호가 내게 따로 말한 건 없다.”

거실 소파에 앉은 백호가 적호에게도 앉으라는 듯 자리를 권했다.

적호는 주저하다가 자리에 앉았다.

은호의 후예들은 적호가 앉은 걸 보자 조르르 적호 주변에 앉았다.

적호는 백호보다 저택을 비울 때가 많으니 쌓인 이야기가 많은 듯했다.

은호의 후예들이 오토매틱 메이드에게 간식을 만들게 주문할지, 직접 만들지 고민하는 동안 백호가 적호에게 한마디 했다.

“지금은 황호를 내버려 두는 게 좋을 것 같군.”

그 모습을 보며 적호는 백호가 무언가를 아는 게 아닌가, 하는 희미한 의심이 생겼다.

‘아니, 백호는 방금 전에 은영관에 있었으니…… 나보다 상황을 모르겠지.’

적호는 은호의 후예들이 우려냈다는 차인지 식초물인지 모를 음료를 마시며 의심을 지웠다.

*    *    *

다음 날.

오늘도 학교는 사관학교와의 교류전으로 떠들썩했다.

어제 미식축구 경기 중, 패배가 거의 확정된 사관학교에서 해일 메리 패스를 두 번이나 성공시키며 서든데스 방식의 연장전까지 경기를 끌고 갔다.

30분이 넘는 접전 끝에 사관학교의 쿼터백이 직접 공을 들고 경기장을 가로질러 터치다운하며 대역전극을 만들어 화제가 되었다.

MVP로 사관학교의 쿼터백이 선정되었고, 은광고는 패배자의 입장이 됐는데도 너도나도 그 쿼터백 얘기를 했다.

우리 반도 그랬다.

“당연히 그 완전 긴 패스를 두 번이나 성공했으니까 막판에도 패스로 공격할 줄 알았다.”

“공 뺏기면 게임 끝인 상황에서 30야드를 달릴 생각을 해? 미친 거 아니야?”

경기 중 몸싸움이 가장 격렬하다는 이유로 미식축구를 보러 간 맹효돈과 송대석이 신나게 떠들어 댔다.

우리가 듣기에는 어쨌든 은광고가 졌다는 똑같은 얘기를 하고 또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쟤들은 말할 때마다 새로운 것 같았다.

오늘 오후에도 미식축구 시합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맹효돈은 룰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옆에서 송대석과 민그린이 열심히 설명해 주고 맹효돈도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매우 기대하는 저 모습을 보아하니 흑마가 준 선물 같은 건 까맣게 잊은 듯했다.

‘지명도 높은 진족의 수장이 준 선물보다는 오늘 열릴 시합이 더 신경 쓰이나 보구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날이 갈수록 고등학생다워지는 것 같아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미식축구를 보러 가는 저 셋 외에도 축구, 농구를 볼 예정인 아이들도 매우 들떠 보였다.

축구를 보러 가는 김유리, 한이, 사월세음은 간식을 나눠서 준비해 오려다 결국 다 같이 사러 가기로 한 건지 셋이서 가게 예약을 하고 동선을 체크하고 있었다.

나는 유상훈이 출전하는 농구 시합을 전부 볼 예정이었고, 농구를 보러 가는 그룹에는 나 외에도 권레나와 목우람이 있었다.

농구 시합을 보러 갈 예정이었던 건 나와 저 두 명 말고도 한 명 더 있긴 했는데, 아직 등교하지 않은 상태였다.

‘왜 안 오지?’

조례가 시작된 후에도 황지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오늘 황지호는 개인 사정으로 결석한다고 연락이 왔다.”

조례를 위해 들어온 함근형 선생님이 황지호가 결석할 거라 못을 박았다.

그저 늦는가 싶었는데 황지호는 오늘 결석할 생각인가 보다.

김유리가 반장으로서 대표로 물었다.

“지호가 아파서 결석한 건가요?”

“결석계는 제출했지만 진단서나 처방전은 제출하지 않았다. 사유에는 ‘개인 사정’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렇게 사유를 대충 적어서 내면 사고 결석, 무단 결석 혹은 출석 미인정 결석 처리되지 않나?

은광고는 출석이 내신에 영향을 미치진 않아도 개근상은 존재했다.

인정 결석은 출석 처리되고, 개근상도 받을 수 있어 결석계 작성에 공을 들이는 학생도 적지 않은데.

황지호가 개근상에 욕심이 없는 건 확실한 것 같다.

“지호가 어디 아픈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어디 놀러 간 거 아니냐. 말없이 간 게 좀 이상하긴 한데.”

“그분이 결석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까?”

“만우절 때 지호가 갑자기 처웃으면서 수업 전에 뛰쳐나간 적은 있긴 한데, 조례에는 나왔어.”

반 아이 중에선 걱정하는 목소리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그런데 황지호 저놈은 만우절에 내 위치를 추적한 뒤에 처웃으면서 교실을 뛰쳐나간 건가.

“그 돌아이 새끼도 사정이 있겠지. ……걔네 집 황명 그룹이잖아. 집안 사정 아니야?”

“음…… 내일도 안 나오면 내가 물어볼게!”

한편, 송대석과 김유리는 화제를 전환하려고 했다.

영민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황지호의 정체를 짐작하고 저러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연락하는 건 별로 안 좋겠지.’

안부라도 물어야 할까 고민했는데 그만두기로 했다.

학교를 안 나왔을 뿐이지 결석계도 제출한 걸 보면 외부와 소통을 차단하지는 않은 것 같으니, 연락을 하면 받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메시지를 보내면 풍백, 우사, 운사 건으로 대답과 대책을 독촉할 것처럼 여길 거다.

평소에 늘 일 때문에 연락했으니, 지금 연락해도 일 때문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직접 찾아가야 하나…….’

어느새 오전 공통수업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을 지나 사관학교와 은광고 첫 농구 시합 팁오프 시간이 가까워졌다.

고민은 했지만 농구는 보러 가기로 했다.

유상훈에게 농구를 보러 갈 거라 약속했고 최근 정신적으로 불안한 권레나와 그냥 대놓고 불안한 목우람 둘이서만 보낼 수는 없었다.

농구 시합을 치를 체육관에 도착하자 권레나가 핫바를 먹자고 제안했는데, 목우람은 근로 장학 아르바이트로 번 얼마 안 되는 전 재산을 전부 털어 핫바를 사려 해 말려야 했다.

“우람아…… 핫바는 하나면 충분해…….”

“하지만 맛이 이렇게 여러 종류인데! 레나 님, 다른 맛이 신경 쓰이시진 않습니까?”

“핫바 체인점은 학교 근처에도 있어서 거의 다 먹어 본 맛이야. 치즈 들어간 게 맛있는데…….”

결과적으론 목우람은 핫바 두 개, 나와 권레나는 핫바를 하나씩 들게 되었다.

시합까지는 앞으로 30분 남은 시점.

자리를 잡고 앉았더니 유니폼 위에 저지를 걸친 유상훈이 몸을 푸는 게 보였다.

체육관은 거의 꽉 찼는데 자리를 잡기 무섭게 유상훈이 내 위치를 알고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유상훈은 손 인사를 마치고 바로 팀하고 합류했는데, 나보다 조금 키가 작은 유상훈이 농구 대표 팀 사이에 섞이니 확실히 키가 작은 티가 났다.

신체 조건이 따라 주지 않는 데도 대표로 뽑힌 걸 보면 유상훈의 실력이 정말 출중한 것 같았다.

나는 응원의 의미를 담아 유상훈에게 손을 크게 마주 흔들었다.

“저분은 친구입니까?”

“어, 실기 시험 같은 조였어.”

“1학년분 중에서도 선발 선수가 계셨군요.”

“은광고 농구 대표 팀 엔트리 명단 보여 줄게.”

‘SG 유상훈(1학년)’ 항목을 가리키며 간단히 유상훈의 소개를 했다.

은광고 대표 농구 팀 엔트리에 들어간 1학년은 유상훈 하나였고, 또 그런 유상훈이 스타팅 멤버라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목우람과 권레나에게 유상훈의 포지션인 슈팅가드에 관해 설명해 주고 있을 때, 목우람이 경기장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관학교 분이 부반장에게 인사하는 것 같은데요.”

“의신이 아는 애야?”

목우람과 권레나가 가리킨 방향에 도시후가 보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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