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세트 피스 (10)
황명호 대저택은 ‘대’ 자가 붙을 만큼 거대하다.
황금 담장 안과 미로 정원 사이의 별채는 물론이고 미로 정원 안의 본채 안에서도 들르지 못한 곳이 많았다.
아니, 오히려 한 번이라도 발을 디딘 곳이 적다고 표현하는 게 나을 거다.
내가 들렀던 본채 시설은 1층의 거실, 식당, 응접실 등의 공용 공간과 우리 올무의 방, 2층의 게스트 룸, 고대어로 가득했던 지하 시설 정도였다.
‘왜 갑자기 5층으로 오라는 거지? 늘 보는 응접실이 아니라?’
5층에 뭐가 있는 건가?
황지호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 봤다.
―얘기해 줘서 고맙다, 조의신. 이 건에 대해서는…… 내가 냉정을 되찾으면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황지호는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남겼다.
냉정을 되찾는 것과 5층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
“황호가 5층으로 오라는군요.”
메시지를 확인한 적호가 그렇게 말했다.
예상대로 황지호는 호랑이들과 나에게 동시에 같은 메시지를 보낸 것 같았다.
“5층에 뭐가 있나요?”
“5층은 황호의 개인 공간입니다. 저와 백호는 아직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적호와 백호군도 가 보지 않은 공간이라니.
적호와 백호군은 올해 초부터 이 저택에서 살게 됐으니 아직 둘러보지 못한 곳이 있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황호가 조의신에게도 5층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까?”
“네.”
“백호에게는 물어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군요.”
백호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1층 중앙에 설치된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 버튼을 눌렀다.
1층에 대기 중이던 엘리베이터는 바로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내부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어, 왼손에 쇼핑백을 들고 오른손에는 올무를 안고 있는 내 모습이 금색의 표면에 그대로 비추어졌다.
거울처럼 빛나는 황금 벽에 반사되는 올무의 모습 또한 귀엽고 완벽해 잠깐 넋을 잃을 뻔했다.
‘여전히 황금으로 도배했네. 그래도 어딘가 저번하고 좀 다른 거 같은데…….’
12지 회담 당시 지하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탄 적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엘리베이터가 황금으로 도배된 건 마찬가지였지만, 내부 장식이 조금 바뀐 게 눈에 띄었다.
엘리베이터 숫자 버튼이 홍옥으로 장식되고, 백금으로 버튼 테두리가 마감된 게 그러했다.
엘리베이터 내부를 구경하다 숫자 버튼을 관찰하던 중, 중요한 걸 알아챘다.
‘5층 버튼이 없어.’
은영관의 경우, 지하에 가기 위해서는 버튼을 특별한 패턴으로 조작해야 했던 것 같은데.
이 엘리베이터도 비슷한 원리로 움직이는 걸까?
“황호, 전원 탑승했습니다.”
적호가 그렇게 말하자 황금의 이능파가 버튼 주변을 맴돌았다.
어딜 봐도 황지호의 이능파였다.
‘5층은 황지호의 허락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거구나.’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위로 움직였다.
입구 상단에 설치된 패널의 숫자가 1에서 2로, 2에서 3으로 차례차례 바뀌었으나 5층은 표시되지 않았고, 멈추지도 않았다.
마치 10층이 넘는 곳을 오르는 감각이었다.
‘겉에서 볼 땐 5층 정도로 보였으니까 이 이상으로 움직일 리가 없는데.’
4층과 5층의 경계에 설치된 결계 탓에 시공간 감각이 좀 일그러진 걸지도 모른다.
“황호가 나이를 헛먹은 게 아니군요. 전보다 훨씬 실력이 좋아졌습니다.”
“네 아들이 황호의 처소에서 몇 번 장난질을 한 후로 황호가 처소 결계에 공을 들이더군.”
“제 아들이요? 제 아들이 황호의 처소에 잠입한 적이 있습니까? 언제였습니까?”
적호와 백호군이 옛이야기를 꺼냈다.
천방지축 사고뭉치 김신록이 황지호의 처소에 몰래 숨어 들어가 장난질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처소의 결계가 엄중해졌다고 한다.
김신록이 장난을 칠 만큼 성장했을 때라면 황지호는 이미 신화계 호족이 된 이후인데 무슨 깡인지 모르겠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역시 제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것 같군요.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 줘서 감사합니다, 백호.”
“…….”
적호는 황지호의 체면이나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대신, 아들의 잠재력과 능력에 크게 감탄했다.
백호군은 별말 하지 않았지만, 평소보다 덜 서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들의 후예 사랑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적호의 아들 자랑이 잠시 이어지는 사이에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멈춰섰다.
“내리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적호는 밝게 웃으며 먼저 내렸다.
아들 이야기를 신나게 했더니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구름이 낀 거 같아.’
아무 생각 없이 적호의 뒤를 따라가려다 나도 모르게 발이 멈췄다.
엘리베이터 문 너머는 안개인지 연기로 흐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앞서 내린 적호는 저 안개에 삼켜진 건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가자.”
왕!
머뭇거리고 있을 때 백호군과 올무가 말을 걸었다.
생각해 보니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있고 내 품에 올무가 있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나는 곧바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파앗!
안개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자 황금색의 이능파가 번뜩이다 사라졌다.
금색으로 물들었던 시야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땐, 완전히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눈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복도는 사람 여럿이 같이 걸을 수 있을 만큼 넓었고, 백호군이 백아를 높게 뽑아 든다고 해도 여유가 있을 만큼 높았다.
벽에는 누가 호랑이 저택 아니랄까 봐 황금의 호랑이 그림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크르르…….
복도 벽에 그려진 호랑이에게 시선을 주자 호랑이가 작게 목을 울린 후 나를 보며 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곧 멀리 있는 그림 속 호랑이들도 번쩍거리며 뛰어다니다 내 쪽으로 몰려들었다.
‘혹시 백호군의 영호(影虎) 같은 건가?’
백호는 자신의 영역에 있을 때 이능파를 불어넣은 권속, 그림자 호랑이 영호(影虎)를 소환할 수 있었다.
이 그림 속의 금색 호랑이들도 다 황지호가 소환해 낸 권속일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을 보충하듯 앞에서 움직이는 호랑이를 관찰하던 적호가 한 마디 덧붙였다.
“황호의 권속은 오랜만에 보는군요. 황호의 허락 없이는 벽 밖으로 나오지 않을 테니 물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딱히 물릴까 봐 걱정한 건 아니었는데.
그림 속의 호랑이들도 물 생각은 없었는지 ‘크르르!’ 하고 목을 울리며 적호에게 뭐라 하는 게 들렸다.
적호는 웃는 얼굴로 호랑이를 상대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황호의 기운이 이쪽에서 느껴집니다. 가죠.”
적호가 가리킨 건 엘리베이터 문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미닫이 타입의 문살문이었다.
황금의 문살에 종이가 덧붙여져 있었는데, 종이에는 고대어로 무언가 촘촘히 새겨져 있는 게 일종의 결계 같았다.
스르륵.
적호가 앞에 서자 문살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호랑이들과 함께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본 것은…….
수많은 황지호였다.
온갖 나이대의 황지호들이 넘쳐 났다.
“어서 와라, 편한 곳에 앉도록.”
나에게 말을 건 건 교복을 입은 1학년 0반 돌아이 황지호였다.
황지호는 방 중앙에 서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황호,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것들은 다 뭡니까?”
적호가 수많은 황지호와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황지호는 분신을 동시에 움직이느라 부하가 오는지 조금 대답을 느리게 했다.
“옛 기록을 살피고 있었다.”
방에 있는 것은 다양한 형태의 ‘기록’들이었다.
어떤 것은 거북이 등껍질이나 뼈 같은 귀갑수골에 혹은 점토판에 새겨져 있기도 했고, 어떤 것은 벽화로 그려져 있기도 했다.
‘저건 대나무…… 죽간목독이고 저기에 있는 건 가죽 같은데. 양피지인가?’
제지술이 전파되기 이전의 기록 매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종이의 형태로 책장에 꽂혀 있는 것도, 디바이스 옆에 빼곡하게 쌓여 있는 칩 역시 전부 기록 매체였다.
그 기록 매체들을 황지호의 분신들이 살피고 있었다.
‘분신을 불러 모아서 직접 옛 기록을 살피고 있었나……!’
황지호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달리 평소의 페이스를 되찾고 있었다.
풍백과 우사, 운사의 이야기를 듣고 말꼬리를 흐리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앉아서 기다리도록.”
황지호가 중앙에 놓인 긴 소파를 가리켰다.
황지호의 분신들은 기록 매체 근처에 놓인 안락의자나 방석을 사용해 중앙에 있는 소파는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자리에 앉자 황지호가 잠시 고민에 잠기다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에는 오토매틱 메이드를 못 부르는데. 다기나 찻잎도 없고……. 은인에게 대접할 게 없다니, 내 불찰이로다.”
“황호, 그럼 오늘은 모닝 티타임을 거른 겁니까? 한 번도 5층에서 벗어난 기색이 없었습니다만.”
“잠시 시간의 흐름을 잊고 있었다.”
5층에는 마실 거리가 전혀 없나 보다.
황지호는 그런 5층에 처박혀 있었나.
마침 준비한 선물을 건네기 좋은 타이밍이라 생각해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마셔.”
“응? 이게 뭐지?”
내가 선물로 가져온 건 솔잎 맛 음료 선물 세트였다.
황명 그룹의 총수에게 줄 만한 선물은 아니었지만, 일반 마트에 구비된 선물 세트 중 노친네 입맛에 맞는 건 저거밖에 없었다.
쇼핑백을 열어 본 황지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가 선물을 가져오다니.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음료군. 이리 기특할 수가.”
백화점에 들를 시간이 없어서 적당히 골랐는데, 황지호와 그 분신들은 몹시 기뻐하며 음료수를 집어 갔다.
모든 분신이 그 솔잎 맛 음료를 마신 건 아니었다.
초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황지호는 망설인 끝에 다시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초등학생 버전 황지호는 저 솔잎 맛 음료가 입에 안 맞는 모양이었다.
어린이는 미뢰가 예민해 쓴맛을 지나치게 민감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는데, 그런 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모습의 분신 몫도 따로 사 올걸.’
음료를 마시는 대신 혼자 헤드폰을 쓰고 구술 자료를 재생하는 어린 황지호를 보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아이스크림을 대령하고 싶어졌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린 황지호를 보고 있을 때, 교복을 입은 황지호가 불쑥 말을 걸었다.
“조의신 네가 신수나 후예의 선물이 아닌 내 것을 가져오다니.”
황지호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기껏 노친네 입맛에 맞는 음료를 입에 물려 줬는데도 왜 굳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말을 끊기 전에 황지호가 입을 열었다.
“설마 이 몸을 걱정한 거냐.”
황지호는 처웃지는 않았지만 곱상한 눈을 빛내며 웃었다.
그 모습은 지나치게 멀쩡해 보여 권레나와 목우람과의 저녁 식사를 거절한 게 좀 후회되었다.
“그 ‘눈’의 대책에 관해 논의하러 온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군. 하하하하!”
황지호가 결국 처웃기 시작했다.
처웃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후회는 깊어졌다.
우리 반 아이들이랑 저녁이나 먹으면서 농구 시합 얘기나 할걸.
“전사한 옛 전우의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렸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몸은 호족을 이끌어야 하는 수장이다.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마음이 흔들렸다는 게 사실이면 조금 걱정한 게 완전히 헛짓이 된 건 아닌 것 같다.
별 의미 없던 짓 같긴 하지만.
황지호의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적호가 물었다.
“……전사한 옛 전우라니요?”
“풍백과 우사, 운사가 성탄절에 눈을 뿌린다더군. 우리의 신역에 말이다.”
황지호는 혼란스러워하는 적호를 향해 간략히 내가 했던 말을 전했다.
적호는 입을 떡 벌리고 굳어 황지호보다 더 격한 반응을 보였다.
백호군은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답게 평정을 유지하며 황지호의 말을 경청했다.
“기록을 살펴봤다. 지금 살아 있는 호족 중에 풍백과 우사와 운사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자는 없다.”
그럼 그 셋이 죽었다고 증언한 호족은 전부 죽었다는 것인가.
황지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들로 추측되는 자, 혹은 유사한 능력을 가진 자가 한반도에 나타난 적도 없다. 그래서 기록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걸 조의신에게 묻고자 한다.”
황지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알고 있던 것’에서, 눈이 내리는 순간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지?”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