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학생 대표 총선거 (1)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손민기를 택하자 황지호와 다르게 선택 완료 메시지가 떴다.
이로써 오늘 손민기가 꿀 꿈이 정해졌다.
손민기는 예전에 장남욱과 유상훈이 설명해 준 대로 입학시험이 시작된 순간부터 에너미에게 무참하게 죽는 순간까지를 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시스템 메시지 재생이 끝나자 황지호가 말했다.
“희미하지만 이능파가 느껴지는군.”
황지호의 말에 장남욱이 예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 ‘눈’으로 봤을 때, 우리 둘한테 검은 안개가 끼어 있었어.
장남욱은 유상훈과 그의 주변에서 내 이능파의 잔재를 발견한 것 같았다.
나중에 귀찮은 상황이 발생하는 걸 막기 위해 미리 말하기로 했다.
“장남욱이 ‘별 처녀의 눈’으로 봤을 때 내가 선택했던 대상에게 검은 안개 같은 게 보였다고 했어. 내 이능파의 잔재가 손민기한테 남을 수도 있어.”
“그놈 주변에 ‘별 처녀의 눈’만 한 통찰계 스킬을 가진 존재는 없다만, 그 점도 대비해 두지. 네가 사용할 방법에 관해 더 자세히 말해 다오.”
황지호의 말에 ‘리플레이’에 대해서 설명했다.
다른 차원이니, 게임이니 하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여태까지 유상훈에게 두 번, 손민기에게 한 번, 장남욱에게 한 번 사용한 결과에 관해선 자세히 설명했다.
“그럼 요약하자면, 조의신 네가 선택한 이는 ‘네가 존재하지 않을 때의 미래’를 꿈으로 보게 되는 거군.”
그 악몽에 미래라는 표현을 써도 좋을지 모르겠다.
리플레이를 사용하게 되면 이제는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도 꿈으로 꾸게 될 테니까.
어폐가 있긴 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 능력을 사용 가능한 건 한 번에 한 명씩이라고 했나? 또 초기화되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고 했지.”
“어, 유상훈은 초기화까지 이틀, 하루 걸렸고 손민기는 나흘이 걸렸어.”
“유상훈은 두 번째 사용할 때 초기화 날짜가 이틀에서 하루로 줄었다고 했지. 그럼 손민기도 줄어들 가능성이 있겠군.”
그 뒤로도 리플레이를 사용하고 손민기를 어떻게 감시할지 계획을 짰다.
황지호는 나와 문답을 하는 중에도 분신을 움직여 기록들을 확인했다.
그런데도 평소보다 말을 느리게 하는 것 외엔 나와 대화하는 황지호는 명료한 사고를 하고 있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대화가 마무리될 즈음엔 분신들이 움직임을 멈췄는데, 아마 확인하려 했던 기록을 전부 살펴본 것 같았다.
‘풍백과 운사, 우사의 흔적을 못 찾았구나.’
황지호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황지호가 한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분신들이 안락의자에 깊이 몸을 묻거나 책장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시간의 흐름을 잊고 있었다고 말한 걸 보니 한숨도 안 자고 기록들을 살폈나 보다.
“타인의 꿈에 간섭하는 능력이라니. 꿈에 관련된 능력은 상당히 희귀하고 다루기도 힘들다. 그것도 플레이어의 꿈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분신이 전부 휴식을 취하자 여유가 생긴 건지 황지호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하물며 네가 보여 주는 꿈은 상당히 특이한 데다 한 번 만난 상대라면 원거리에서도 발동해. 이런 능력을 아무 리스크 없이 쓴다고?”
황지호가 눈에 황금빛의 마력을 띄우고 안광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황지호가 또 뭐라고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왜 애를 저기에 재우는 거지? 담요라도 덮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내 시선은 리클라이너에 몸을 파묻고 잠든 어린아이에게 꽂혀 있었다.
아니, 그냥 어린아이가 아니라 황지호의 분신이긴 한데, 아니, 그래도…….
왕?
내적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을 때 내 품에 있는 천사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국 저 아이도 황지호인데 쓸데없는 생각을 할 뻔했다.
역시 올무는 위대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바로 멍청해지는군.”
올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감사를 표현하고 있자니 황지호가 어처구니없어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묵고 가도 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오늘은 저택에 있는 호랑이들이 가뜩이나 신경 쓸 게 많을 텐데 손님까지 신경 쓰게 할 수 없었다.
특히 풍백, 우사, 운사 이야기가 나온 이후로 계속 입을 다물고 얼빠진 얼굴을 하던 적호는 5층을 벗어나자마자 양해를 구하고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백호군과 올무와 함께 기숙사로 돌아갈 겸 산책길을 나설 때, 배웅을 나온 황지호가 한마디 했다.
“선물 고맙다. 남은 것도 잘 마시마.”
별거 아닌 선물에 저리 기뻐할 줄이야.
어쩐지 그 모습이 캔 커피나 믹스 커피 하나에 크게 기뻐하던 대학 후배를 생각나게 했다.
둘은 외모도 성격도 전혀, 조금도 닮지 않았는데, 둘 다 재벌가의 일원이고 차를 좋아한다는 점 때문에 그런 걸까.
* * *
한때는 은광고 입학이 유력했던 우등생이자 견실한 상장 기업 사장의 외아들, 또 예비 스타 플레이어로 꼽히던 작은 영웅 손민기.
현재 그는 중졸 학력의 검정고시생으로, 시골에 있는 친척 집에 방치되었다.
손민기 부모의 회사는 최종 부도 처리되었고, 어머니는 이혼을 해 빚더미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투자자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사기를 친 게 발각되어 소송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속칭 ‘손미끼 사건’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났지만, 손민기는 부모가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다.
‘꼴 좋다. 도망가려다 망한 거지.’
모든 은행에서 손민기 집안의 사업체에 대출을 거절하고 사기죄로 고소하겠다는 이들이 늘자 손민기의 부모는 그를 버리고 야반도주하려 했다.
이는 익명의 제보를 받은 채권자 집단에 의해 저지되었다.
사실 그 익명의 주체는 호족이었으나, 채권자들과 손민기 측은 알지 못했다.
그 이후로 피해액이 크고 도주 우려가 크다는 이유로 구속 영장이 청구되어 손민기의 부모는 구치소에 미결 수용되었다.
부모가 그렇게 되자 손민기는 이름도 생소한 지방의 산골 친척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곰팡이 냄새가 올라오는 방 안에서 홀로 안구의 움직임으로 디바이스를 조작하는 것, 화면 너머로 저와 같은 조에 있던 은광고 놈들의 활약상을 지켜보는 것, 또 치매기가 있는 괴팍한 외조부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굴욕적이고 열 받는 일이었다.
그러나 손민기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 희망이 유상희였다.
‘유상희는 치유 이능도 가지고 있으니 날 치료해 줄 수도 있어. 뭐, 양팔 양다리를 다 재생하려면 수명이 깎이겠지만. 그게 아니면 연줄이 있는 병원에 날 소개해 줄 수도 있고…….’
유상희는 일견 온화해 보였고 손민기를 동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유상희에게 디바이스 메시지를 열 번 보내면 그녀는 한두 번 정도 답변을 보냈다.
그녀는 답변을 바로 보내지 못하는 걸 미안해하기도 했고 유상훈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과 화해를 주선하고자 하는 눈치도 엿보였다.
손민기는 유상희의 여린 마음을 파고들어 손발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물론 이 긍정적인 전망은 유상희의 희망 고문과 정신 승리를 시도하는 손민기의 사고가 자아낸 망상에 불과했다.
유상희는 자신의 친동생을 죽이고 여론 조작까지 했던 손민기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모호한 태도로 메시지 몇 개를 보내 소소하게 복수하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최근에는 그런 알 듯 모를 듯한 메시지조차 보내질 않았다.
‘오늘도 답장이 없잖아! 3학년이라서 수험이 바쁜 건가. 수험이 끝나면 한가해질 테니 바로 재생 시술 얘기를 해야겠네.’
디바이스 조작을 위해 안구를 바삐 굴리던 손민기가 눈을 감았다.
최근 안구를 혹사한 탓에 눈이 심하게 마르고 뻑뻑한데 팔다리가 없으니 안약이나 인공 눈물을 넣을 수도 없었다.
손민기가 눈을 감은 채로 유상희를 이용해 플레이어로서 성공하는 터무니 없는 망상을 하다 의식이 끊겨 잠들었을 때였다.
손민기는 그 은광고의 체육관 안에 있었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한 채, 손민기는 그 꿈 안에서 끌려다녔다.
마수종 에너미가 그를 덮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다시 꿈에서 깼다.
“으아아악!”
손민기가 욕을 뱉으면서 벌벌 떨었더니 옆방에서 조용히 하라며 벽을 치는 바람에 시원하게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리고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손민기를 방충망도 없는 창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오늘도 착한 제자 염준열이 보낸 기상 예보를 확인하고 기숙사 방문 밖으로 나선 순간, 내 방문 앞에서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목우람이었다.
‘황명 재단에서 공방을 내준 이후로 아침에 마주친 적이 거의 없었는데.’
황지호로부터 손민기 관찰 결과를 듣기 위해 일찍 나서긴 했지만, 목우람과 만날 줄은 몰랐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안녕.”
“부반장, 상담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내가 말해 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목우람은 기운이 없는 목소리로 어제 있던 일을 말했다.
어제 내가 황명호 대저택으로 간 이후, 목우람과 권레나는 학교로 향하다 우리 반 기숙사생들과 마주친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기숙사생들이 모여 밥을 먹게 되었는데, 권레나가 점점 말수가 줄었다고 한다.
“레나 님이 걱정되어 더 말을 많이 걸었습니다만, 오히려 불필요한 말을 해 실수한 게 아닌가 걱정됩니다.”
목우람은 그날 자신이 권레나에게 했던 모든 말을 다시 하며 그중에 뭔가 실례가 될 만한 발언이 없는지 확인해 달라 했다.
한국어가 미숙한 탓에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게 아닌가 걱정하는 것 같은데, 호구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 빼면 딱히 문제 삼을 점은 없었다.
‘어제는 오후 이후에는 사월세음과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안심했다가 갑자기 마주쳐서 당황한 거겠지.’
적당히 목우람을 달래며 학교로 갔다.
괜히 목우람이 제 잘못이라고 생각해 권레나에게 사과라도 하면 권레나는 더 괴로워할 거다.
당분간 권레나를 내버려 두라는 말을 좋게 돌려서 말하며 등굣길을 걸을 때, 또 의외의 인물과 만났다.
문새론이 밝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얍! 수상한 부반장님아, 염준열좌하고 인터뷰했어?”
“아직. 가능하면 모든 종목에서 2차전까지 치른 다음에 소감을 듣고 싶어서.”
염준열과의 인터뷰는 교류전 폐막식 이후, 학교 유명 인사들의 소감 인터뷰 특집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내 말에 문새론이 반색을 표했다.
“잘됐네! 그럼 가능하면 질문 몇 개도 추가했으면 좋겠는데.”
“어떤 질문? 플레이리스트 관련 질문은 안 돼.”
“아, 괜찮아. 이번 건은 염준열좌도 바로 오케이 해 줄걸?”
문새론은 그 말을 하며 홀로그램을 띄웠다.
홀로그램에는 ‘학생 대표 총선거 후보 등록 공고문’이 떠 있었다.
은광고의 대표적인 학생 대표는 선도부장, 지익회장, 총동아리회장, 학생회장까지 총 넷이었다.
선도부장은 선도부 내에서 결정되지만, 다른 셋은 공개적인 선거를 통해 결정되었다.
지익회장의 경우는 기숙사생들의 투표를 통해서, 총동아리회장은 각 동아리와 소모임의 부장들의 투표를 통해서.
그리고 학생회장은 전교생의 투표를 통해 선발되었다.
‘곧 은광고 학생 대표 총선거가 있는 날이었지.’
후보 등록 마감일은 이번 주말까지였고, 선거 운동 기간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였다.
내가 공고문을 다 읽은 것을 확인하자 문새론이 한마디 덧붙였다.
“번거롭게 두 번이나 따로 인터뷰하기도 그러니까 한 번에 다 해 줘. 지금 학생회장 유력 후보가 염준열좌잖아.”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