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학생 대표 총선거 (2)
적호는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이른 아침 저택을 나섰다.
격하되었다고는 하나 5천 년을 산 전설계 호족이 하루 정도 자지 못했다 하여 몸에 이상이 올 리가 없는데, 정신적인 피로로 괴로웠다.
‘풍백, 우사, 운사…… 그 이름이 다시 나올 줄이야.’
신화의 시대가 끝나 신과 인간의 세계가 명확하게 갈라진 현대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먼 옛날에는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오르고 신이 신격을 버리고 인간 사이에 섞여 사는 일이 없지는 않았다.
천신과 인간 사이의 혼혈이었던 신인이 땅 위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의하자 신의 자리를 내려놓고 그를 따른 세 신이 있었다.
그 세 신이 신인과 함께 기우제와 기청제를 주관하던 풍백, 우사, 운사였다.
셋은 말 그대로 하늘 같은 천신에 비하면 낮은 신격을 가졌으나 쉬운 결정은 아니었으리라.
그렇게 신격을 버리면서 신인을 따른 그 셋은 결국 외적으로부터 신인을 지키다 죽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신인과 은호를 지키던 건 청호와 그 제자들이었지. 청호와 제자들이 외적을 막는 사이, 그들을 도망치게 했다고 했다.’
외적이 어둠을 불러 한반도의 하늘을 덮자 신인은 제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은호는 본래 다른 범들에 비해 약했다.
청호와 제자들이 시간을 버는 사이 신인과 은호 그리고 그들의 최측근들은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청호의 방어선은 무너져 외적의 추격이 계속되었다.
은호의 지혜와 황호의 합류로 신인은 살아남았지만, 은호와 청호는 중상을 입고 청호의 제자들 다수가 사망했다.
이때 풍백, 우사, 운사도 죽었다고 알려졌다.
변덕스럽게 비바람을 부르던 풍백과 우사.
온화하게 웃는 얼굴로 먹구름을 부르던 운사.
떠오르는 건 장난질을 친 적호에게 앙갚음을 하는 얼굴뿐이었지만 지독한 그리움이 차올랐다.
‘내 친우들은 어찌 그리 담담히 받아들였단 말인가!’
사전에 조의신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혼자 5층에 틀어박혀 청승을 떨며 마음을 정리한 황호는 그렇다 쳐도 백호는 왜 이리 담담한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황호의 말에 의하면 은광고에 변고가 일어나는 순간 그들은 삿된 눈을 뿌릴 거라 하지 않는가.
그 셋의 생각에 적호의 마음이 점점 어지러워졌다.
“안녕하십니까.”
정신을 들게 한 건 적호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의 목소리였다.
교직원 전용 출입구 앞, 역용술로 본래의 얼굴을 감춘 김신록이 서 있었다.
오늘 김신록은 반차를 내고 협회에 파견 갈 예정이었고, 적호는 김신록을 호위할 겸 따라가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김신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풍백과 우사, 운사는 김신록이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아마 이 셋의 얘기를 김신록에게 해 준 이들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은광고에 일어날 변고에 그들이 연관되어 있다면, 미리 김신록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적호는 직접 자신의 아들에게 그 셋에 관해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저녁에 저택에서 술자리를 갖지 않겠느냐. 내 옛 전우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구나.”
옛 전우라는 말에 김신록이 눈을 크게 떴다.
적호가 옛 전우라 칭할 만한 이들은 모두 신화의 시대를 풍미한 이들뿐이었다.
존경하는 아버지가 직접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말에 김신록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황호는 몰라도 백호는 한가할 테니 자리에 부르마.”
“네!”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는데도 김신록이 밝게 대답했다.
번듯하게 자라난 아들을 보며 적호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훌륭한 아들을 기절시켰던 백호 이름을 입에 올리니 갑자기 울컥한 기분이 솟구쳐 한마디 덧붙였다.
“안주는 먹고 싶은 걸 준비해도 좋다. 네가 좋아하는 곶감 요리가 좋겠구나.”
“……네!”
김신록은 잠깐 망설였으나 아버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고등학생의 정신을 조작한 테러 행위에 가담한 쓰레기 같은 인간 하나를 고문하러 가는 길인데도, 협회로 향하는 발걸음은 몹시 밝고 경쾌했다.
제 친우들과 아들이 있기에 적호는 다시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 * *
학생회장 염준열.
플마고 속에서도, 이 세계에서도 아직 이 단어의 조합이 쓰이진 않았지만 지나치게 잘 어울렸다.
우수하고 진중하고 착하고 배려심 깊으며 향상심이 넘치는 내 제자가 한국 최고 명문고 학생회장 후보라니!
물론 현재 학생회장인 도원우도 거의 완벽에 가까웠지만 안타깝게도 추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게임 속 내년 학생회장은 곽경구였는데.’
플마고 속에선 염준열은 단기 유학 중이었기에 학생회장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잠시 귀국해서 선거에만 참가해 달라는 요청이 있긴 했지만, 염준열은 그런 불성실한 태도로 회장직에 도전할 마음이 없었다.
그 결과 후보로 추천된 게 곽경구였다.
‘학생회장 곽경구도 나쁘지 않지.’
곽경구는 이능, 성적, 성격, 성품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었고 1학년 때부터 학생회에서 성실하게 일한 데다 교사나 다른 학생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다.
당시 학생들 말하길, 곽경구가 은광고를 대표하는 데에 부족한 점을 굳이 꼽자면 고등학생답지 않은 노숙한 외모 정도였다.
곽경구는 1학년 시절부터 사복을 입으면 교사인지 학생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오히려 그 외모 덕에 신뢰가 간다는 이야기도 있어 당선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최편득이 끼어드는 바람에 이야기가 복잡해졌지만.’
최편득 일당은 학생 자치 기구를 극히 혐오했다.
이사장은 태만했고 1학기에 교무부장 제갈재걸을 제거하고 교사진을 제 입맛에 맞는 인물로 맞춰 뽑으니 슬슬 교사 쪽은 정리가 되었으나 학생 쪽은 그렇지 못했다.
특히 은광고는 15년 전 학생회장, 성국언의 영향도 있어 학생 자치 기구가 학교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학교를 입맛에 따라 쥐고 흔들어야 하는데 우수한 학생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최편득은 학생 대표 총선거에 관여했다.
‘심약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이용해 헛짓을 하려 했지.’
그 학생은 비록 무르고 유약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실한 성격에 주변과도 잘 어울려 학생과 교사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다.
그 탓에 최편득에게 찍혀 허수아비로 삼을 학생회장으로서 그 학생이 후보에 올라가게 되었다.
당시 최편득과 그 추종자들은 학교에서 문제를 유출해 주는 대가로 약점을 잡힌 학생들을 늘리고 있었는데, 그 학생들에게 그 플레이어블 캐릭터 추천서를 쓰게 하고 곽경구를 상대로 온갖 네거티브 전략을 펼쳤다.
‘문새론이 은광고 역사상 가장 추악한 선거라고 평하기도 했지.’
곽경구가 주수혁 덕에 개심했다고 하나 비뚤어졌을 때가 있었다.
곽경구가 17세가 되어 광림을 각성한 직후 그 광림이 마음에 안 든다고 비행 청소년이 된 적이 있었다.
도장 앞에서 소주를 박스 단위로 사서 마시다가 아버지인 곽 사범에게 소주병으로 처맞은 게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최편득과 추종자는 교지 편집부를 이용해 그 음주 사건을 들추어내 곽경구 사퇴론을 펼쳤다.
‘그걸 본 내 똑똑한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용기를 냈지. ……그 사건으로 특별한 이능에 눈을 떴고.’
졸지에 최편득의 허수아비가 될 위기에 놓인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아버지가 선물 받은 양주를 마시고 은광고 종합 게시판에 인증샷을 올려 버렸다.
은광고 입학 전에 소주를 마시고 아버지에 의해 처절하게 응징당한 곽경구.
은광고 입학 후, 그것도 선거 기간에 양주를 마시고 그걸 자랑처럼 인증하고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은 그 플레이어블 캐릭터.
둘 사이에서 비행의 경중을 따지자면 당연히 후자가 무겁겠으나 일은 쉽게 굴러가지 않았다.
사퇴당하기 위한 발악이었지만, 최편득 일당은 ‘오죽하면 술을 마셨겠냐.’, ‘곽경구 지지자들은 이 아이를 욕할 자격이 없다.’라며 내로남불 격 피의 실드를 치며 사건을 묻으려 했다.
이처럼 최편득 일당이 일방적으로 진흙탕을 끼얹은 지저분한 싸움에 2학년 0반이 참전했다.
‘중립적으로 사건을 다루려는 신문부를 보호하고, 곽경구에 관련한 루머와 가짜 뉴스를 뿌리는 교지 편집부를 응징하고, 사건을 일으켜 조작된 사진을 찍으려던 걸 막고…….’
허수아비 학생회장 신세를 피하기 위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노력과 2학년 0반의 헌신, 또 정공법으로 묵묵하게 선거를 이끌어 간 곽경구의 진심 덕에 표심은 곽경구 쪽으로 기울었다.
막판에 최편득 일당은 투표함에 손을 대려 했는데, 이는 그 당시 학생회장인 도원우와 선도부장인 오혜지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들은 잘못 목소리를 내면 ‘총선거에 중립을 지켜야 할 자치 기구의 장이 개입했다.’라는 명목으로 또 다른 논란을 일으킬까 봐 계속 참고 있었지만, 투표함을 바꿔치기하려는 만행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 일을 벌인 교원은 오혜지의 일검에 손모가지가 잘릴 뻔한 걸 간신히 면했는데, 교원 자리에서 잘리는 건 피하지 못했다.
투표함에 손댄 걸 재벌가의 자제 둘에게 걸렸으니, 화를 면하기 힘들어 최편득이 꼬리 자르기를 시도한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곽경구는 학생회장이 되었고 주수혁을 대신하여 퇴장할 때까지 좋은 학생회장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물론, 이번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염준열이 학생부회장 후보로 곽경구를 지목했어. 이 세계에서는 학생회장 곽경구를 보지 못하겠구나.’
곽경구도 학교가 개판이고 인물이 없다 보니 나선 거지, 본래 앞에 서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곽경구는 염준열의 좋은 러닝메이트가 될 거다.
‘이변이 없는 한 학생회장은 염준열, 선도부장은 천동하가 될 거고 지익회장은 계이담이 되겠지. 문제는 총동아리회장인데…….’
게임 속에서는 학생회장 선거에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모여 있고 지나치게 개판으로 흘러갔기에 주목받지 못했지만, 총동아리회장 선거도 혼돈 그 자체였다.
총동아리회장은 일이 많아서 너도나도 피하는 자리인데 이번엔 어쩐 일인지 군웅할거 수준으로 후보들이 들고일어났다.
선거 방식도 ‘곧 졸업할 3학년 부장이나 부부장만이 아니라 1, 2학년도 참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투표 방식 변경을 놓고 종합 게시판에서 논쟁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문새론은 이 난장판에 흥미를 가져 심층 취재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게임 속에선 문새론은 가짜 뉴스가 난무하는 학생회장 선거에 휘둘렸는데, 이번엔 진짜 하고 싶은 취재를 할 수 있겠구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하고 싶은 걸 하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의신아, 무슨 일 있어요? 수상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요. 아, 수상하다는 건 칭찬이에요!”
수상하다는 말이 어쩌다가 칭찬이 된 건진 모르겠지만, 사월세음이 그렇다고 하니 납득하기로 했다.
“그래, 고맙다. 지금 보고 있는 건 학생 대표 총선거 공고문인데…….”
염준열이 학생회장 후보로 나온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사월세음은 염준열이 좋은 학생회장이 될 것 같다며 밝게 웃었다.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사월세음은 염준열을 찍을 것 같았다.
잠시 학생 대표 총선거 얘기가 나왔지만, 대화 주제는 금방 독고미로가 출연 중인 플레이리스트와 교류전 이야기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고등학생 입장에선 선거보다는 반 친구가 나오는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과 스포츠 이야기가 더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아, 맞다. 오늘은 농구 보러 가시는 분 누구였죠? 일단 의신이는 농구 보러 간다고 했고…….”
“나랑 그린이.”
사월세음의 말에 송대석이 불쑥 끼어들었다.
반 아이들은 농구 전 시합을 보기로 한 나와 달리 모든 시합을 골고루 볼 수 있도록 로테이션을 짜서 매일 그룹이 바뀌었는데, 오늘은 나와 사월세음, 민그린, 송대석이 같은 조였다.
“그럼 시합 끝나고 다 같이 뭐 먹으러 갈래요?”
“가고 싶어.”
“그린이가 가면 나도.”
“저번에 핫바 얘기하는 거 듣고 먹고 싶었는데…… 땡초 핫바랑 슬라이스 치즈 떡 핫바 먹고 싶어.”
그 말을 시작으로 그룹별로 모인 아이들이 메뉴를 정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나는 거기에 끼지 못할 것 같았다.
거절할 타이밍을 재며 오늘 약속 상대를 떠올렸다.
오늘 저녁에 만날 상대는 염준열과 천동하, 두 차기 학생 대표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