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학생 대표 총선거 (10)
황명호 대저택의 지하 시설.
12지 동맹 회담 때 방문했던 때와 다를 바 없이 굉장했다.
황금의 이계 금속과 순도 높은 마력이 녹아 있는 먹으로 새긴 고대어들과 설정집에서만 보던 거대 마법진도 여전했다.
저번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번에 12등분된 마법진 중 활성화된 영역이 두 곳뿐이라는 점이다.
그중 하나는 ‘호족(虎族), 寅[호랑이님]’, 다른 하나는 ‘마족(馬族), 午[예민한 흑마]’라고 쓰여 있었다.
午[예민한 흑마] “기껏 디바이스 코드를 줬는데, 마법진으로 연락하다니. 의미가 없네.”
흑마의 음성에 자막이 첨부되어 마법진 위로 떠올랐다.
황지호는 황금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빛내며 흑마의 말에 오만한 목소리로 답했다.
寅[호랑이님] “중요한 이야기에는 그에 걸맞은 자리가 필요한 법이다.”
황지호의 음성에 마력이 실린 게 나름 호랑이들의 수장다운 느낌이 났다.
물론 목소리는 그럴싸했지만, 이 와중에도 고등학생 컨셉을 유지할 생각인지 여전히 은광고 교복 차림이기에 옆에서 볼 땐 그리 큰 위엄은 느껴지지 않았다.
午[예민한 흑마] “그래? 어떤 이야기를 할지 기대할게.”
寅[호랑이님]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황지호가 바로 본론을 꺼내자 흑마의 영역에서 이능파가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흑마의 이능파가 온화한 빛으로 일렁이는 게, 그녀는 황지호의 말에 만족한 것 같았다.
寅[호랑이님] “그럼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
황지호와 흑마는 짧은 대화 끝에 다음과 같은 내용에 협의했다.
[호족과 마족(馬族)은 신역을 침범하는 마족(魔族)의 토벌에 협력할 것을 맹세한다.]
두 수장이 맹세를 마치자 마법진 안에서 마력이 요동쳤다.
흑마의 마력과 황지호의 마력은 하나로 뭉치다 둘로 나뉘어 각 영역으로 향했다.
파아앗!
황지호의 앞에 마력으로 구현된 동맹 서약문이 한 번 떠오른 후, 그의 왼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맹세를 마친 두 수장은 한결 온후한 음성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우선 둘은 서로의 신역에 정예를 파견할 것을 결의했다.
午[예민한 흑마] “우리 쪽에선 하얀 아이를 보낼게. 어떤 호랑이를 보낼 거야? 나는 적호가 좋은데.”
寅[호랑이님] “적호는 바쁘다. 다른 이를 보내지.”
午[예민한 흑마] “아쉽네. 적호는 말을 예쁘게 해서 좋은데.”
파견할 진족을 정하자 대화의 주제는 ‘눈’으로 바뀌었다.
정확하게는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옮긴 것으로 추정되는 눈이었다.
호족이 붙잡은 아바리티아의 사제의 외모, 이능파의 파장 등을 묻던 흑마가 입을 열었다.
午[예민한 흑마] “아마 그의 눈은 ‘인비디우스의 사제’ 손에 들어갔을 거야. 둘이 교류가 잦았으니까.”
‘인비디우스의 사제’라는 단어가 걸렸다.
스토리에 개입해 주수혁을 노리고 방윤섭을 에너미화 시키는 마족(魔族)이 섬기던 마신이 인비디우스 아닌가.
그 마족의 사제가 주수혁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석촌 호수의 동결형 이계 클리어 사건인데, 나는 그 미궁의 공략에 까마귀 가면을 쓰고 참가했다.
그리고 지금 그 마족의 사제가 손에 넣은 눈에 까마귀 가면을 쓴 내가 언령을 사용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인비디우스의 사제는 이제 주수혁이 아닌 나, 까마귀 가면을 노릴 거다.’
타이틀 히어로 주수혁이 겪어야 할 일을 내가 겪게 될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 이벤트 당시 주수혁의 친구를 빼앗고 그의 멘탈과 입지를 부순 악랄한 덫이 떠올랐다.
‘단순히 위기라고만 할 수는 없어. 이건 기회이기도 해.’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노리는 피스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니, 경우의 수를 줄이고 대항할 수를 짜는 게 오히려 수월해질 거다.
황명호 대저택을 나서서 아무도 없는 기숙사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내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 * *
월요일 아침.
사관학교 고등부와의 스포츠 교류전이 남긴 열기가 채 식지 않았는데, 분위기가 또 크게 바뀌었다.
학생 대표 후보 접수 기간이 끝나 선거 운동 기간이 도래했기 때문이었다.
등굣길 곳곳에 학생 대표 총선거에 후보로 출마하는 이들의 포스터가 설치되었다.
중간고사도 성큼 다가와서 그런지 주말 사이 수척해진 얼굴을 한 학생들이 등교 중에 공부 내용을 요약한 홀로그램과 후보 포스터를 번갈아 들여다보곤 했다.
우리 반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늘은 등굣길에 반 아이들과 마주쳐 함께 가기로 했는데, 중간고사 걱정을 하다가도 총선거 얘기를 꺼냈다.
“저번에도 선거랑 중간고사랑 겹쳤던 것 같은데.”
“기억나요. 국회의원 총선이었죠?”
교내 모든 구역에 개시되는 학생회장 후보 포스터와 달리 지익회장 후보 포스터는 거주 구역에만 설치가 허용되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거주 구역 안에는 지익회장 후보 포스터가 더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거주 구역을 지나 1학년 구역으로 향하는 내내 지익회장 단일 후보 계이담의 얼굴이 보였다.
“단일 후보도 포스터가 붙냐?”
절댓값 기호가 있는 부등식의 증명 과정을 암기하던 맹효돈이 잠시 종잇조각에서 눈을 떼고 계이담의 얼굴을 가리켰다.
맹효돈은 주변에 무심한 편이지만 기숙사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지익회 사람 얼굴을 슬슬 외우기 시작한 것 같았다.
“단일 후보의 경우에는 찬반 투표를 하게 돼. 선거권을 가진 학생이 1/3 이상 투표하고, 그중 과반수의 표를 얻어야 당선이야.”
“……뭔 소리야, 복잡하네.”
내 대답에 맹효돈의 눈이 짱돌 굴러가듯 돌아갔다.
‘3분의 1이 투표하고 과반수가 찬성……? 그럼 몇 표를 얻어야 하는 건데.’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수학은 이제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맹효돈은 수학을 못해도 장점이 많은데.’
힘들게 두뇌를 가동시키는 맹효돈에게 사월세음이 설탕이 발린 버터스틱을 내밀었다.
사월세음은 아침 일찍 서문 앞 빵집 MITRON에 들러서 반 아이들이 먹을 간식을 샀다고 한다.
아침부터 사월세음의 부지런함과 착함에 감탄했다.
“……효돈아, 이거 먹고 힘내세요! 다들 이거 드세요.”
“아, 고맙다.”
“잘 먹을게.”
“감사합니다!”
나와 목우람에게도 버터스틱을 내밀고 제 몫을 먹던 사월세음이 물었다.
“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만약 떨어지면 어떻게 되나요?”
“지익회를 예로 들면, 현재 지익회장인 성시완 선배님이 지목한 사람이 임시로 지익회를 이끌게 돼. 그리고 다시 후보를 모집해서 선거를 할 거야.”
“전 계이담 선배님께서 무사히 당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처지를 아신 선배님께서 친절하게도 근로 장학 아르바이트 중에도 가장 시급이 센 곳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반드시 투표하겠습니다.”
시급이 세다는 건 일도 빡세다는 건데.
근로 장학 아르바이트생은 예전에 맹효돈과 권레나가 했듯이 식당에서 배식하는 등의 잡일이 주요 업무였으나 가끔 이능과 체력이 필요한 작업에도 동원되었다.
그 대표적인 업무가 은광고에 도착한 택배 분류와 배달 작업인데, 은광고의 규모와 택배 주문량이 상당해 사실상 소규모의 택배 상하차에 가깝다고 들었다.
업무 강도가 만만치 않을 텐데 목우람은 힘든 티 하나 내지 않았다.
목우람은 호구 생활을 하며 체력이 좋아졌나 보다.
“우람아, 이거 하나 더 드세요.”
“또 주시는 겁니까! 감사합니다!”
착한 사월세음은 고생한 목우람을 위해 버터스틱을 하나 더 주고 목우람은 감격하며 이를 받아들였다.
중간고사 준비로 죽어 가는 학생들이 보이는 걸 제외하면 평화로운 등굣길이었다.
* * *
광일초등학교 급식소, 점심시간.
급식소 앞에 어린이용 식기를 들고 있는 저학년, 평범한 식기를 든 고학년이 나뉘어 줄을 서 있었다.
다들 삼삼오오 그룹을 이루어 교사의 지도를 받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학생이 있었다.
같이 먹을 애가 없어 저러는 거라며 측은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황호의 어린 분신은 단순히 급식이 맛이 없어서 점심을 먹지 않은 것뿐이었다.
‘이런 수고를 들이는 것도 오늘까지군. 점심 전까지 출근을 하면 좀 더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황호의 초등학교 담임 교사가 마침내 심리적 압박을 견디다 못해 오늘 무단결근했다.
호족을 동원해 압박을 가한 것도 있지만, 저번 주에 황호와 같은 반 학생들이 교사에게 장난을 친 게 결정적이었다.
정신적으로 벼랑 끝에 몰린 교사의 손가락을 아이들이 발로 밟은 격이었다.
‘이건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자업자득인가.’
교사는 장난으로 포장해 아이들의 부끄러운 사진이나 미납된 청구서 따위를 등에 붙이게 했는데, 아이들이 그 짓을 교사에게 해 버렸다.
아이들은 몰래 교사 등에 교사의 SNS 계정에 달린 폭로 댓글을 인쇄해 붙였고, 교사의 평판은 엉망이었기에 퇴근할 때까지 아무도 귀띔하려 들지 않았다.
결국 교사는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을 때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놀랍게도 반 아이들 다수가 그게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 충격으로 교사가 무단결근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평소에 교사가 하던 짓이었기 때문이다.
‘엮어 내려는 학생도 전부 처리했고, 슬슬 실종되어도 이상하지 않겠지. 향록에게 넘겨야겠어. 이 반엔 엄격한 교사가 배정되도록 해서 학생들의 인성 교육을 다시 하도록 하고…….’
교실에 홀로 앉아 있던 황호는 무단 조퇴를 하기 위해 가방을 쌌다.
그때, 뒷문에서 계속 황호를 빤히 보고 있던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 반 학생이 아니군. 누구지?’
아이의 표정을 보니 적의를 품은 것 같지 않았고 누군가가 시켜서 억지로 못된 장난을 치려는 것도 아닌 듯했다.
순해 보이는 얼굴을 한 아이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점심밥…… 나랑 먹을래? 오늘 반찬으로 꼬마 돈가스 나와. 아직 급식소에서 배식하는 중이야! 같이 먹자!”
아이의 말은 뒤로 갈수록 빨라졌다.
말투가 어딘가 어색한 게 이 말을 황호에게 하기 위해 계속 연습한 것 같았다.
황호는 순한 인상의 아이를 자세히 관찰했다.
머리카락은 초보자가 자른 건지 들쭉날쭉했고 옷은 낡고 사이즈가 맞지 않아 물려 입은 티가 났다.
그러나 옷도, 손톱도 전부 청결했고 눈에는 총기가 흘렀다.
‘유복한 환경의 아이는 아닌 듯하나 이곳에서 본 이들 중 가장 곧고 바른 눈을 하고 있어. 이 반에 배정받았으면 그 교사의 표적이 됐겠지. 운이 좋았군.’
황호는 처음엔 아이를 무시할 생각이었으나 그 아이가 가진 기운이 마음에 들었기에 답하기로 했다.
“혼자 있는 이 몸이 신경 쓰였나? 굳이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내일부터 전학 가서 이 학교에 오지 않는다.”
아이는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초등학생 모습을 한 황호가 겉모습과 맞지 않는 말투를 썼는데도 이상하게 여기지 못할 만큼 놀란 것 같았다.
마치 황호가 전학 가는 걸 진심으로 원치 않는 듯한 태도였다.
“빨리 말 걸걸…… 친해지고 싶었는데…….”
환호는 기운이 빠진 어린 인간을 보니 이 인간과 동갑인 은호의 후예 막내 은재호가 생각났다.
최근에 첫째 은서호와 둘째 은이호가 은광고 입학시험 준비로 잘 놀아 주지 못하자 자주 저런 얼굴을 했다.
황호가 다시 변덕을 부려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나와 친해지고 싶었나? 이 몸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지?”
아이는 우물쭈물하며 바로 답하지 못했다.
황호는 ‘아마 이 몸의 외모겠지.’라는 광오한 생각을 했는데, 아이의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호랑이 같은 점?”
황호가 ‘호랑이’라는 단어에 반응했다.
황호는 평소에 자신이 호족임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았지만, 이 초등학교에서 호랑이스러움을 내비친 기억이 없었다.
초등학교에서의 행적을 몇 번 돌이켜 보다 물었다.
“이 몸의 어디가 호랑이 같다는 거지?”
“그냥…… 가끔 호랑이로 보이는데.”
아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어린 황호의 눈이 조금 반짝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