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연휴와 개교기념일 (3)
“하겠습니다.”
“안 됩니다.”
부자의 답변이 엇갈렸다.
적호는 예전에 저택의 5층에서 ‘리플레이’에 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어서 내가 설명을 마치기 전에 내 뜻을 눈치챘다.
적호에게 한마디 들을 각오를 했는데 적호는 나 대신 황지호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내가 김신록의 목숨을 구하고 부자 사이가 가까워지도록 주선했던 걸 감안해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린 걸까.
적호는 황지호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황호, 조의신의 그 이능은 손민기에게 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갑자기 제 아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걸 보고 이야기하는 게 이해하기 쉬울 것 같군.”
“……이게 뭡니까?”
황지호는 적호가 저를 탓할 줄 알았는지 준비한 자료를 건넸다.
적호에게는 홀로그램을 전송하고 김신록에게는 인쇄된 종이를 내밀었는데 이 상황에서도 후예의 아날로그한 취향을 존중해 주는 듯했다.
손민기의 관찰 일지, 건강 검진과 이능파 검사 결과를 확인한 적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신이 불안정해지는 게 눈에 띕니다. 수면을 취하는 시간이 크게 줄었군요. 이능파의 밸런스도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으니 폭주를 막기 위해 광림과 스킬도 봉인하는 편을 고려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럴 예정이다. 그깟 이능 폭주해 봤자 별 피해 없겠지만, 싹은 잘라 둘 생각이다.”
인쇄된 자료를 빠르게 한 번 완독한 김신록이 종이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그 종이에는 날짜별로 손민기의 주요 수치 변화가 적힌 표가 있었다.
“날짜가 볼드체로 인쇄된 부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호전되던 손민기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것과 관계가 있습니까?”
“조의신이 손민기에게 그 능력을 사용한 날짜를 표기한 거다.”
황지호가 손민기에게 의료진을 붙인 이후, 그는 손민기의 관찰, 검사 결과를 하루 단위로 나에게 넘겨줬다.
그래서 리플레이 사용 전후로 손민기의 상태가 어떻게 변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가설을 하나 세웠다.
‘리플레이의 초기화 타이밍은 사용한 상대의 정신적인 안정도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리플레이를 거듭 사용할수록 초기화까지의 시간이 길어지는 손민기.
리플레이를 두 번 사용하는 동안 초기화까지의 시간이 짧아진 유상훈.
둘을 비교하면 가설이 쉽게 세워졌다.
유상훈은 건전한 정신을 지녔으며 열중 중인 취미가 있고 그를 위해 주는 가족과 친구가 있다.
그에 반해 손민기는 어떤가?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통설을 믿으면 유상훈보다 수명이 길지도 모르겠지만, 그뿐이다.
“……조의신이 사용한 능력의 영향을 받아 상태가 나빠진 것 같습니다만.”
“그래. 조의신은 레벨 업을 시도한다고 했지. 그러기 위해선 횟수를 채워야 한다. 가능하면 많은 이들에게 이 능력을 사용했으면 하는군.”
생각에 잠긴 적호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눈을 뜬 그는 김신록을 한 번, 나를 한 번 번갈아 보다 입을 열었다.
“조의신, 제 아들은 안 됩니다. 그 이능은 저한테 쓰십시오.”
아마 지금 단계에서는 적호한테 사용이 안 될 것 같은데.
내가 말하기 전, 김신록이 먼저 답했다.
“황호 님께는 사용이 안 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능력에는 제한이 있는 것이겠죠. 실기 시험 13조 학생들에게는 사용이 가능했다고 하니, 저도 될 겁니다.”
“아들아, 정말 괜찮겠느냐?”
적호가 역용술 없이 본모습을 한 김신록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딱딱하게 말했다.
청소년 수련회 사건을 계기로 둘이 화해할 때 무슨 대화를 나눈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날 이후로 적호는 김신록에게만 반말을 사용했다.
‘김신록이 부탁한 거겠지?’
적호가 열심히 설득했지만 김신록은 이미 제 뜻을 굳힌 듯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날 일을 똑똑히 기억해 낼 수 있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결국 적호가 꺾였다.
적호는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그만두거라.’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김신록은 적호의 걱정 가득한 말에 기뻐하면서도 그 말을 들을 생각은 없는지, 황지호가 안내한 자리로 향했다.
응접실 안쪽, 풋 스툴이 분리된 타입의 리클라이너 위에 김신록이 앉았다.
“조의신의 이능은 대상이 잠든 후에 발동한다. 향록에게 받은 수면향을 쓸 생각이다. 전원 내 뒤에서 한발 물러나라.”
황지호가 황금 향로를 꺼내며 경고했다.
전설계 호족과 웅족의 후예인 김신록을 재울 수준의 향이면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갔다.
“준비되면 말하도록.”
황지호의 말에 전용 메뉴를 열어 리플레이 항목을 선택하기 위해 손을 들었을 때였다.
문득 검은 도포의 소매에 시선이 멎었다.
오늘 호랑이들이 나에게 새 옷과 명절 음식을 줬는데, 나는 그들의 후예에게 악몽을 주게 생겼다.
그 생각에 쉽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끄응…….
품에 안긴 올무가 끙끙거리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올무는 오방색의 비단실을 물고 있었는데, 입으로 내가 착용한 세조대를 당겨서 주의를 끌려다가 실패했나 보다.
“…….”
백호군이 이쪽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최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와 눈이 마주치니 정신이 번쩍 났다.
‘제대로 된 수를 놓지 못하고 망설이면 악몽이 현실이 되겠지.’
무겁게 느껴지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리플레이 목록 속의 김신록을 택했다.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황지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이능파를 끌어올렸다.
파아아……!
빛무리가 황금 향로를 감싸자 그 표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지호가 향로에 향을 사르는 것과 동시에 결계를 발동시켰는데, 향의 연기와 결계의 벽 탓에 김신록의 모습이 조금 흐리게 보였다.
시야가 막히는 걸 방지하기 위해 스킬을 발동시켰다.
〈스킬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안구에 이능파가 모이는 감각과 함께 눈앞이 확 트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구름과 호랑이가 새겨진 황금 향로의 표면이었다.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들이 어느 사이엔가 움직이고 있었다.
‘불이 들어오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았는데.’
향이 퍼져 갈수록 호랑이는 구름 사이를 높게 도약하며 향로의 상단부로 향했다.
향로의 상단 부분에서 빛의 입자가 섞인 수면향이 흘러나왔기에 마치 호랑이가 구름 안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수면향이 짙어지자 김신록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가 완전히 눈을 감아 잠이 들었을 때였다.
휘이이……!
‘안광’ 스킬이 발동한 눈에 일순 김신록이 검은 안개에 삼켜지는 듯한 광경이 비추어지다 사라졌다.
* * *
피와 근원이 이어진 존재가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후예로서는 비참한 일이었으나 김신록은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겪어 왔기에 냉정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응전은 불가능하다. 도망쳐야 해.’
현재 위치는 13조의 실기 시험이 치러질 예정인 체육관 앞.
은광고 교내 부지 안에 웅족이 침입한 건 보통 사태가 아니었고, 김신록에게는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지만 김신록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즉각 떠올렸다.
‘즉시 이탈해서 지원을 부른다.’
황호는 학교를 비운 상태였고 백호는 신역 어딘가에 있겠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아버지의 연락처도 떠올랐으나 바로 생각을 바꿨다.
‘……적호 님께는 연락하지 않는 게 좋겠지.’
김신록은 첫 번째로는 은휘관에 대기 중인 황호의 비서에게, 두 번째로는 이 주변에 있을 남옥시인 제갈재걸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로 정했다.
그러나 그 수는 바로 막혔다.
디바이스 통신 기능이 완전히 차단되어 통화도, 메시지 발신도 불가능했던 탓이다.
크르륵……!
디바이스의 조작을 중단했을 때, 웅족이 부린 권속이 김신록을 덮쳤다.
김신록은 손에서 굴리던 압정을 움켜쥐고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웅족이 부리는 권속 에너미를 노리려 했으나 공격 모션을 취하기 전에 손이 굳었다.
‘권속에게도 공격은 불가능하군.’
후예의 제약 탓에 반격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웅족이 부리는 권속의 희귀도가 상당히 낮기에 위기감은 느끼지 못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도주할 수 있다.’
제갈재걸의 동선을 머릿속에 그릴 때였다.
“아아, 이제 왔구나!”
권속을 부려 공격하던 웅족이 갑자기 직접 달려들었다.
김신록이 급히 뒤로 피했을 때였다.
‘뒤에 누가 있어……!’
깨닫는 게 늦었다고 파악한 직후, 왼쪽 다리가 불에 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어?’
퍽, 휘잉, 콰직, 우드득.
귓가에 살이 베이고 뼈가 부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적나라한 소리가 멎기 전에 타오르는 듯한 감각이 통각으로 바뀌었다.
“……!”
김신록의 무릎 밑이 형태와 기능을 잃었다.
지지대를 잃은 김신록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김신록은 반사적으로 공격이 가해진 뒤편으로 돌아 손을 들어 올렸다.
‘……스킬이 써진다!’
기껏해야 R급 정도 되어 보이는 하찮은 희귀도의 권속에게도 공격 모션을 취하지 못했는데, 이자는 달랐다.
기습을 가한 자는 압도적으로 강했지만 웅족은 아니었다.
그러나…….
쾅!
“하하!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웅족이 김신록의 손을 걷어찼다.
웅족이 시야에 들어온 것과 동시에 손가락 끝에 모인 이능파가 산개했다.
통증과 굴욕으로 김신록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버려진 후예의 말로가 이것인가. 우리의 후예 중에 이런 혼혈이 없어서 다행이군.”
그 뒤로 김신록의 기억은 분명치 않았다.
김신록은 웅족이 푼 저급한 에너미를 피해 기어서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숨통을 바로 끊지 않는 게 가지고 놀다 죽이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저건…….’
김신록이 정신을 차려 보니 복도를 지나 체육관 안에 도달해 있었다.
저편에 은광고 시험을 보기 위해 온 중학생들이 보였다.
‘13조는 그러니까…… 세 명? 아니, 네 명이었나…….’
김신록은 마지막 힘을 짜내 학생들에게 외쳤다.
“도망······ 쳐라······.”
온 힘을 다했는데 바람 소리 같은 작은 목소리밖에 나오질 않았다.
김신록은 제 기력이 다했다는 걸 깨달았다.
공포와 허무감, 무력감이 김신록을 엄습했다.
‘눈앞에서 학생들이 죽어 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웅족의 권속에 의해 학생들의 기척이 전부 사라지고, 김신록의 생명도 꺼져 갔다.
마지막에 다다르니 주마등처럼 많은 얼굴들이 뇌리를 스쳤다.
이번에 사용한 신분의 가짜 이름을 붙여 준 악우(惡友).
자신을 호족의 후예로 대해 준 스승.
부채로 눈을 가리고 자신을 보려 하지 않던 어머니.
붉은 형틀에 묶여 자신을 보던 아버지.
그게 김신록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잠든 직후 평온해 보였던 김신록의 얼굴에서 빠르게 핏기가 사라졌다.
안광 스킬을 발동하지 않아도 김신록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안 되겠습니다. 깨워야겠습니다!”
적호가 김신록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적호는 이능파를 불어 넣어 김신록을 깨우려는 듯 붉은 기운을 몸에 감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호군이 적호를 만류했다.
“기다려라.”
“백호, 비키십시오!”
“이제 눈을 뜰 거다.”
그 말대로 김신록이 바로 눈을 떴다.
백호군의 팔을 떨쳐 내려고 버둥거리던 적호가 움직임을 멈췄다.
김신록은 벌떡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 자신이 꿈에서 깨어났다는 실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적호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아버…….”
김신록이 적호를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려다가 말을 멈췄다.
아직도 눈앞에선 아버지라고 말을 못 하나 보다.
갑자기 숨 막힐 정도로 어색해졌다.
“눈에 띄는 이상은 없군.”
말없이 김신록을 살피던 황지호가 이상을 찾지 못한 건지 안심한 얼굴로 차를 내왔다.
김신록이 일어나자마자 마시게 하려고 미리 준비한 모양이었다.
“수면향의 흔적도 지울 겸 전부 마시도록.”
황지호가 오미자차를 건네자 김신록이 조금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김신록이 찻잔을 전부 비우자 입을 열었다.
“……제가 그날 긴 꼬리와 마주친 것 같습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