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연휴와 개교기념일 (2)
주수혁의 경호원 겸 비서 역을 수행 중인 김철.
그는 추석을 맞아 오랜만에 큰집에 방문했다.
김철의 집안은 명절이 되면 큰집으로 모이긴 하지만, 딱히 친척 간의 항렬이나 복잡한 차례 절차를 따지는 곳은 아니었다.
그저 연휴가 끼었기에 오랜만에 친척끼리 얼굴을 볼 겸 모이는 것뿐.
차례상은 아주 간결하게 준비하고, 시간이 되는 이들만 모여 대화를 나누고 명절 음식을 나눠 먹다 헤어지곤 했다.
큰집에선 친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김철도 그걸 알았기에 이 자리에 오기로 마음먹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대기업 들어간 우리 철이 아니야!”
“얼굴을 몇 년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네, 허허허.”
“그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큰아버지, 큰어머니.”
김철은 아주 오랜만에 휴가를 사용해 큰집에 방문했다.
주수혁은 키모폴레이아 사건 이후로 계속 집중하지 못하는 김철에게 억지로 휴가를 가도록 시켰다.
처음엔 김철이 가지 않겠다고 버텼으나 주수혁은 명령을 철회하지 않았다.
―저는 이명을 받은 이후로 자주 이계 공략을 나가잖아요. 형은 경호를 위해 따라올 거고요. 이러다간 형이 다칠지도 몰라요.
돌려서 표현하고 김철을 걱정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김철이 방해된다는 뜻이었다.
제 부족함을 통감한 김철은 순순히 휴가를 갔고, 도저히 집에 혼자 있을 기분이 들지 않아 큰집에 찾아갔다.
김철의 백부와 백모는 일벌레인 김철이 갑자기 왜 고향을 찾았는지는 묻지 않고, 그저 따뜻하게 맞아 줬다.
“우리 아들놈이 올해 은광고 갔다는 말은 했나? 이제 철이 후배가 됐어.”
“벌써 현구가 고등학생이 됐나요?”
“그래. 허허, 바빠서 못 들었나 보네! 이번엔 학교에서 무슨 스포츠 대회 했는데 상도 받아 왔더라고.”
김철의 백부는 미뤄 둔 아들 자랑을 줄줄 늘어놓았다.
그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김철은 속으로 반성했다.
제 일로 소원했다고 하지만 사촌 동생이 제 후배가 됐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니.
축구에 죽고 못 살아서 축구 교실에도 열심히 다녔는데, 이능이 개화하는 바람에 크게 실망하던 사촌 동생 김현구의 얼굴이 새삼 떠올랐다.
그 이후로 심기일전해서 이능을 갈고 닦아 한국 최고 명문고에 입학하기에 이르렀나 보다.
‘은광고에 입학했으면 집 나가서 기숙사 생활 하고 있겠구나. 서울에 있으면 돈 쓸 일도 많을 텐데 간만에 현구 얼굴 보고 용돈이나 줄까.’
집안의 어른들을 차례로 뵙고 인사를 마친 김철은 사촌 동생의 방으로 향했다.
지갑에서 수표를 몇 장 꺼내 준비한 봉투 안에 채워 넣고 있을 때였다.
휘이, 휘…….
귓가를 스친 휘파람 소리에 김철이 지갑을 떨어뜨릴 뻔했다.
김철이 들었던 소리에 비하면 어설프고 이능파도 실려 있지 않았지만, 계속 찾아 헤맸던 그 음이었다.
김철은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달렸다.
쾅!
노크도 하지 않고 급하게 문을 열자 오랜만에 보는 사촌 동생 김현구의 모습이 보였다.
김현구는 플레이어답게 김철이 접근 중인 걸 알았는지 놀라는 대신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철이 형! 진짜 오랜만이네. 여기 앉아.”
김현구는 축구공을 리프팅하는 것을 멈추고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그러나 김철은 자리에 앉는 대신 사촌 동생의 팔을 덥석 움켜쥐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 곡, 어디서 들었어?”
“엉?”
“방금 휘파람 불고 있었잖아.”
김철의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김현구는 순순히 답했다.
“우리 학교에서 사관학교 고등부랑 스포츠 교류전 한 거 들었어?”
주수혁이 치열했던 경기를 몇 번 언급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김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현구가 힘이 풀린 김철의 손에서 빠져나와 디바이스를 켜 영상을 재생했다.
“개막식 할 때 우리 학교에서 누가 벽사의 검무를 췄는데, 그때 나오던 곡이야.”
김철은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화면 너머에서 흰 범의 가면을 쓴 학생이 벽사의 검무를 추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스킬을 사용하고 있어. 이 정도라면 그 영웅과 관련이 있을 법해.’
김철은 온 신경을 집중해 휘파람 소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음소거 상태 같은데 소리 좀 키워 봐.”
“아, 소리는 녹음 안 됐어. 뭐 방송 장비를 남궁 전자 거로 썼는데 기계가 터져서 음향 기기가 맛이 갔다고 하더라.”
소리가 녹음되지 않은 게 아쉽긴 했지만 김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김현구는 김철의 속도 모르고 그의 표정이 좋아지자 스포츠 교류전 이야기가 나온 걸 빌미로 첫 축구 시합에서 MVP를 탄 걸 자랑했다.
김철은 사촌 동생에게 줄 용돈 봉투에 수표 몇 개를 더해 주며 그를 크게 칭찬했다.
김철은 자신이 키모폴레이아호를 구한 진짜 영웅의 단서를 잡았다고 확신했다.
* * *
이 세계에서의 첫 추석을 맞이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추석이라고 하지만, 이 세계에서 나의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둔 적이 없는 대국 기록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 세계에서 있던 적이 없던 가족의 흔적도 있긴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부 ‘은광고 1학년생 조의신’이라는 신분이 의심받지 않을 수준에서 존재하는 가짜일 뿐이었다.
가짜 사진, 가짜 유골, 가짜 행적.
이 세계에 없던 가족들의 흔적이 이 세계에 산재해 있었다.
그 가짜 흔적이 너무나도 생생한 탓일까.
내게 있어 가족의 죽음은 먼 과거의 일인데, 자꾸 마지막으로 보낸 가족과의 추석이 생각났다.
‘그날 부모님과 더 대화하고 동생들과 더 놀걸.’
가족과의 마지막 추석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추억거리가 없었다.
토너먼트가 얼마 남지 않아 출국이 가까웠던 시점이라 추석 당일을 제외하면 혼자 밥을 먹고, 대화도 거의 하지 않았으니까.
옛 생각을 하면 할수록 손이 식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후회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할 수 있는 걸 하자’
이 세계에 피가 이어진 사람은 한 명도 없지만, 신세를 진 사람은 많이 있었다.
추석이 가까워지면서 추석 전에 챙겨야 할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선물을 보내니 그나마 옛 생각이 덜했다.
또 추석 당일에는 기숙사에 남은 우리 반 아이들이 나 말고도 셋이나 있었다.
아침 일찍 만나 함께 호화스러운 명절 식단을 맛보고 옥토연이 보내 준 달토끼떡 송편을 먹고 공부를 하니 추석 생각이 덜했다.
“아침 전 뷔페의 테마는 야채였죠. 점심과 저녁도 기대됩니다.”
“점심은 생선이고 저녁은 고기래.”
“전어전 먹고 싶다. 메뉴에 있냐?”
“메뉴판에 가을전어전이 있습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아이들은 점심 전 뷔페를 기대하며 들떴다.
추석인데도 기숙사에 남아 공부하는 처지를 비관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들 얼굴이 밝았다.
목우람은 눈치가 없었지만 천성이 밝았고, 미식가 맹효돈은 명절을 맞이해 한층 수준이 올라간 기숙사 급식에 감탄했으며 권레나는 며칠 사이 조금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볼게.”
“어. 좀 있다 보자.”
“다녀와.”
안심하고 자리를 뜰 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황지호가 보낸 메시지였다.
[황지호] ……결국 오전에 오지 않았군. 가능하면 일찍 오라고 말했을 텐데.
[황지호] 점심을 먹기 전에는 와라.
오전에는 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는데 뭔 소리를 하는 걸까.
황지호는 나보고 아침 일찍 오든가 전날 와서 자고 가라는 헛소리를 했다.
한가위 오전은 원래 가까운 친지들과 보내는 것 아닌가.
호족끼리 단란하게 보내야 할 자리에서 눈칫밥을 먹는 건 사양하고 싶기에 점심이 지난 시각에 방문하기로 했다.
‘오후면 가까운 친지가 아니라도 손님이 오고 가기에 적당한 시간이니까 이젠 괜찮겠지.’
사실 추석 당일에 찾아가는 건 사양하고 싶었는데, 올무와 후예들이 기다리고 있다니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미리 마련한 명절용 선물을 챙겨 평소보다 무거운 걸음으로 황명호 대저택으로 향했다.
* * *
황명호 대저택.
도착하니 황금색의 도포와 호랑이가 수놓인 쾌자를 입은 황지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지호는 다짜고짜 한지로 포장한 옷함을 내밀었다.
“네 몫의 추석빔도 새로 맞췄다, 입도록.”
“왜.”
“얼마 전에 선물을 주지 않았느냐. 보답이라고 생각해라.”
슈퍼에서 파는 솔잎맛 음료의 답례치곤 좀 지나치지 않나?
그러나 거절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은호의 후예들이 복건과 아얌까지 갖춰 착용하고 부탁하니 더 그랬다.
“신수는 의신이 형이 옷 갈아입을 때까지 안 나올 거래요!”
“신수를 만나고 가실 거죠?”
그 말에 결국 옷함을 받아들였다.
방을 빌려 도포에 술띠까지 착용하고 나오니 그제야 호랑이들이 만족한 얼굴을 했다.
“잘 어울리는군.”
“의신이 오빠, 잘 어울려요!”
“……고마워.”
민망한 인사를 주고받다 보니 어디엔가 숨어 있던 올무도 드디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사는 한복도 잘 어울렸다.
올무는 색동저고리를 착용했는데 이 부담스러운 선물을 감수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오셨군요, 조의신 군. 다들 기다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이 자리엔 김신록도 있었다.
적호와 나란히 붉은 비단의 마고자를 입었는데 잘 어울렸다.
색은 다르지만 나도 한복을 입고 이 자리에 섞여 있으니 어색한 기분이 들어 괜히 이 자리에선 별 의미 없을 고증을 지적했다.
“한복이어도 디자인을 보니 다들 시대가 제각각인 거 같은데.”
“하하하하! 5천 년을 산 이 몸의 눈엔 몇백 년의 차이는 아무렇지 않다. 오로지 입을 이들을 고려해 디자인과 색을 택했지.”
그래서 백호군만 흰 비단으로 만든 답호를 입은 건가?
답호 위에 은사로 수놓인 호랑이가 백호군의 곧은 자세와 아주 잘 어울리긴 했다.
“의신이 형, 같이 사진 찍어요. 신수와 투 샷도 찍어 드릴게요.”
“산령까지 나오게 다 같이 단체 사진 찍어요!”
후예들이 보채 어쩔 수 없이 호랑이 가족사진에 나도 끼게 되었다.
산령은 개량형 한복을 걸치고 허공을 돌아다니다 사진을 찍자는 말에 냉큼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전원이 찍힌 사진을 포함해 수십 장의 사진을 찍고 난 후에야 호랑이들과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호랑이들의 덕담에 이어 나온 화제는 나잇값을 잊은 어느 노친네의 초등학교 생활에 관해서였다.
“친우에게 고통을 준 무엄한 인간들을 벌하고, 예상치 못한 소득도 얻었다.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예상치 못한 소득이라는 말이 걸리긴 했지만 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황지호의 말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었다.
“너 아직도 학교 다녀?”
“그래, 광일초등학교를 접수할 생각이다.”
노친네가 패왕도 안 할 법한 헛소리를 했다.
“시간을 들여 학생들을 재교육하고 거기 교사진을 내 입맛에 맞춰 다 갈아 치울 생각이다.”
대체 왜 생각을 바꾼 건지 모르겠지만, 노친네가 주책인 줄 모르고 이번엔 고등학생에 이어 초등학생 흉내를 계속 낼 생각인 건 확실했다.
“광일초등학교에 상당히 독특한 이능을 가진 아이가 재학 중이더군. 흥미가 생겨서 보육원을 옮기게 할 생각이다.”
“독특한 이능?”
“어린 나이에 이능이 개화했는데, 평소엔 이능파를 발산하지 않으니 아무도 그 아이가 이능이 개화한 걸 모른 것 같더군. 고작 10살에 광림을 제 뜻대로 발휘했는데도 말이다.”
독특한 이능에 보육원.
그 말에 문득 현재 초등학생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떠올랐다.
황지호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이능파를 조금이라도 흘리면 호랑이 같다, 호랑이처럼 보인다고 수선을 부린다.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본질을 느끼는 것일 텐데 이능의 개념을 모르니 제 눈에 그렇게 보인다고 착각하더군.”
황지호가 점찍은 아이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게 확실했다.
황지호는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였다.
“조의신, 그 아이가 있는 보육원에 기부하고 있던데. 설마 그 아이의 비밀을 알고 있던 건 아니겠지.”
나는 답하지 않았다.
이계 공략으로 큰돈을 버는 은광고 구성원들이 어딘가에 기부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아마 그 보육원에는 제갈재걸도 기부하고 있을 거다.
나는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신문부 고문이신 제갈재걸 선생님 따라서 기부한 건데.”
“하하하! 그런 걸로 해 두지.”
황지호가 직접 조리했다는 명절 음식으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응접실로 이동했다.
이제부터 말할 사항은 추석과 어울리지 않았기에 은호의 후예들은 거실에 두고 왔다.
이동한 모두가 앉자 상석에 자리 잡은 황지호가 내 쪽에 턱짓했다.
“운은 떼 놨다. 구체적인 사항은 내가 모르니 전할 수 없군.”
“다음은 내가 말할게.”
나는 김신록을 보며 입을 열었다.
“김신록 선생님께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김신록에게 리플레이를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