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04화 (304/925)

52. 연휴와 개교기념일 (1)

9월 마지막 주가 시작되었다.

추석 연휴와 개천절이 포함된 주라 직장인들은 이번 주만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학생들은 아니었다.

특히 은광고의 경우 개교기념일을 눈앞에 뒀는데도 좋은 소리를 하는 학생이 하나도 없었다.

“휴일이 있는데 휴일이 아니야…….”

“개교기념일 다음 주가 중간고사라고? 미친 거 아님?”

“10월 3일 개천절이 개교기념일이고, 추석 연휴와 겹치는 데다 중간고사 직전이니 휴일의 의미가 없군요. 게다가 이번 10월 3일은 토요일입니다.”

월요일 아침, 1학년 0반 곳곳에서 죽어 가는 소리가 나왔다.

은광고의 개교기념일은 황명재단의 재단설립일이라는 말이 나오자 아이들이 황지호를 쳐다봤다.

설정상 황명재단 이사장 황명호의 친척이라는 걸 반 애들이 다 알고 있던 탓이다.

“……황명재단은 왜 개천절에 재단을 세운 거야?”

“지호야, 진짜 황명재단이 일부러 이날을 개교기념일로 삼은 거예요? 학생들 놀지 말고 공부하라고요?”

“하하하! 하하하하하!”

한이와 사월세음의 질문에 황지호가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정신없이 처웃었다.

황명재단이 저 날에 재단을 세운 이유야 뻔했다.

개천절은 신인이 은광구를 신역으로 삼고 즉위한 날이니까.

“추석 때 조금 쉬려면 미리 공부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힘내자!”

김유리가 아이들을 달랬다.

김유리는 광림이 폭주할까 봐 여태껏 친척과 교류를 끊고 있었다고 한다.

‘이번 기회에 친척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네.’

김유리의 격려에 힘입어 아이들이 정신을 추스르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응…… 이제 와서 추석이나 중간고사 날짜를 바꿀 수도 없고.”

“지익회에서 나눠 준 간식 있는데 같이 먹어요! 기숙사생끼리는 다 먹기 힘든 양을 주셔서요.”

중간고사까지, 또 연휴 같지도 않은 연휴를 향해 하루하루 시간이 줄어들었다.

시간은 금방 흘러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다.

기숙사생끼리 야간 스터디를 하기 위해 빌린 스터디 룸에는 네 명뿐이었다.

“추석 연휴에 기숙사에 남는 사람은 이 네 분입니까?”

“어. 나랑 너랑 부반장이랑 쟤.”

맹효돈이 기숙사에 남은 목우람, 나, 권레나를 차례차례 가리키며 말했다.

기숙사생은 우리 넷 외에도 한이와 사월세음이 있긴 했지만 둘은 밖에서 추석 연휴를 보낼 예정이었다.

한이는 보육원 사람들과, 사월세음은 가족들과.

한이는 성적이 우수했고 사월세음은 중간은 갔기 때문에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권레나는 권제인이랑 보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영원의 호수 쪽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하지만 권레나는 기숙사에 남겠다고 했다.

사월세음이 없어서 그런지 권레나는 조금은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기숙사에 남은 학생들을 위해 추석 특식이 나올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크게 기대됩니다.”

“어. 이번에 전 뷔페 한대.”

“진짜입니까! 전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간다고 들었습니다만.”

추석 먹거리 이야기가 나오자 권레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권레나는 늘 출석했으니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게 오랜만에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음…… 추석이기도 하고 중간고사 기간이기도 하니까 저번처럼 달토끼떡 나왔으면 좋겠다.”

“어, 그거 맛있었는데.”

“달토끼떡? 설마 토족이 만드는 떡 말씀하신 겁니까?”

아이들이 달토끼떡 홈페이지 정문에 광고가 걸린 햇멥쌀 모시송편 한정판 세트를 보며 군침을 삼켰다.

돈 없는 목우람과 달리 착실하게 알바비를 저축한 권레나와 맹효돈이 눈 딱 감고 비싼 달토끼떡 세트를 지르려 했지만, 이미 매진된 상태라 아이들이 크게 실망했다.

다행히 이번 건에 있어선 우리 반 아이들에게 부반장다운 면모를 보여 줄 수 있었다.

“추석에 가져올게. 같이 먹자.”

“헐, 부반장 너 이거 예약했어?”

“의신아……!”

며칠 전, 옥토연이 추석에 가장 좋은 송편 세트를 보낼 테니 전부 먹고 소감을 말하라며 메시지를 잔뜩 보냈다.

추석 전날 퀵으로 보내 준다고 했으니 당일에 기숙사에 남은 아이들과 함께 달토끼떡을 먹을 수 있을 거다.

“그럼 오늘 공부를 하자.”

“네! 레나 님, 힘냅시다!”

“어제 외우라고 한 공식은 다 외웠지?”

나와 목우람의 말에 권레나는 시들시들해졌고 맹효돈의 눈에선 초점이 사라졌다.

“응…….”

“……아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고통받는 건 싫었지만, 굳게 마음을 먹고 둘을 굴렸다.

목우람은 권레나를 아직 어려워하는 것뿐만 아니라 과대평가하고 있어 공부를 제대로 도울 수 없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

애들 공부를 봐주며 내 공부도 틈틈이 할 때였다.

딩동.

중간고사 전 과목 40점이 확정된 놈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황지호] 추석 때 우리 집에 들러라.

[나] 바빠.

[황지호] (사진)

황지호는 사진을 하나 첨부했다.

‘설마, 이건……!’

사진에는 작은 사이즈의 한복들이 찍혀 있었다.

[황지호] 후예들과 신수의 추석빔을 맞췄다. 네가 와서 보지 않으면 실망하겠지.

올무와 후예들이 새 옷을 맞추고 기다리고 있다고?

이건 안 갈 수가 없었다.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야 했다.

바로 답변을 작성했다.

[나] 갈게.

*    *    *

중간고사 기간을 앞두고 탁거산 도인의 맹훈련도 잠시 중단되었다.

탁거산은 처음에 까짓거 공부랑 훈련을 병행할 수 있다며 우겼지만, 1학년 0반 맹효돈의 담임 함근형이 험악한 얼굴로 이를 제지했다.

―효돈이 장래를 생각하시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차피 저놈은 머리 쓰는 일은 영 아니지 않나. 좋은 성적이 필요한가?

그러자 함근형은 맹효돈의 수학 쪽지 시험 결과표를 보여 줬다.

결과표에는 맹효돈의 점수 외에도 맹효돈과 같은 과목을 수강 중인 학생들의 평균 점수도 표기되어 있었다.

평균 80점이 넘는 시험에서 맹효돈은 20, 30 점을 맞고 있었다.

‘와, 저 새끼 진짜 돌머리네.’

방윤섭도 점수가 개판이긴 하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건 방윤섭만이 아닌지, 탁거산도 깜짝 놀랐다.

헛기침을 몇 번 한 탁거산이 수제자의 실드를 쳤다.

—허허…… 정답률이 표시된 거 보니 오지선다형으로 시험이 진행됐군. 찍어도 20점이 나오는 시험 아닌가? 내 제자가 찍기 실력은 보통 이상이구먼!

탁거산은 그렇게 긍정적으로 말했지만, 함근형은 고개를 저으며 맹효돈의 시험지를 공개했다.

빽빽하게 무언가를 연구하고 식을 전개한 게, 맹효돈 나름의 노력이 엿보였다.

―맹효돈은 풀어서 20점 받았습니다.

함근형의 팩트 폭력에 탁거산이 친 피의 실드가 깨졌다.

탁거산이 탄식했다.

―……공부한 것과 안 한 것과 차이가 없지 않은가!

―이대로 가면 맹효돈은 낙제합니다. 낙제 후, 재시험에도 낙제 점수가 뜨면 유급하게 됩니다. 맹효돈을 중졸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탁거산의 마음이 꺾였다.

은광고를 졸업한 탁거산은 늘그막에 본 수제자가 무사히 은광고를 졸업하길 바라고 있었다.

―……중간고사 끝날 때까지 훈련은 쉬겠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함근형의 담판을 지켜본 방윤섭은 크게 안심했다.

지독하게 굴려 대는 훈련도 하기 싫었지만, 중간고사 공부를 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맹효돈만큼 처참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방윤섭의 필기 점수는 바닥을 기어 조금 불안했다.

그래서 우울한 얼굴로 추석을 앞두고도 학교에 등교해 공부하기로 했다.

쾌청한 가을 날씨, 멋진 은광고의 교정, 이동 중에도 공부에 몰두하는 한국 최고 명문고의 학생들.

이를 본 방윤섭의 머릿속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

‘아, 공부하기 개 싫다.’

탁거산이 시키는 훈련도 하기 싫지만 공부하기도 싫었다.

맹효돈을 보면 욱하는 감정이 들어 저도 모르게 얼마 전 또 삼촌의 전자 담배를 가져왔는데, 담배가 당겼다.

억눌렀던 흡연 욕구가 피어올라 으슥한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방윤섭의 머리 바로 위쪽 나뭇가지에 매달려 이쪽을 보는 곱슬머리의 학생과 마주쳤다.

“으악!”

찔리는 구석이 많은 방윤섭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선량한 인상의 곱슬머리 소년이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잘 보니 나무 위에 있던 소년은 아는 인물이었다.

1학년 0반에 새롭게 등장한 괴짜, 목우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뭐, 뭐야! 넌! 지금 뭐 하는 건데!”

“전 1학년 0반 목우람이고 현재 단체 스터디의 쉬는 시간을 활용한 부업 중입니다.”

“부업? 근로 알바 말하는 거냐? 대체 뭔 알바를 하느라 거기에 있는 거냐고!”

목우람은 단호하게 그 말을 부정했다.

그 뒤로 이어진 말은 방윤섭을 환장하게 하는 말들뿐이었다.

“근로 아르바이트가 아닙니다. 시험 2주 전부터 근로 아르바이트는 전면 중단되었습니다. 저는 현재 방윤섭 학생의 흡연 적발 부업을 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대체 왜!”

“보상으로 우리 반 부반장에게 빵을 받기로 했습니다.”

처음 넷이었던 1학년 0반은 어느 사이엔가 열 명이 되었다.

최근 등장한 0반 놈, 목우람은 호구였지만 머리 나사가 어딘가 빠져 있는 또라이였다.

그 또라이가 자신을 노린다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최근 담배를 피우시지 않는군요. 아쉽습니다. 피우실 때는 꼭 저를 불러 주시길 바랍니다.”

“뭐래! 꺼져!”

“아, 쉬는 시간이 끝났으니 저는 가 보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휙!

목우람은 다시 가볍게 나무 위로 뛰어올라 지익회관을 향해 날 듯이 뛰어갔다.

척 봐도 방윤섭이 도망쳐도 따라잡을 만한 고수의 몸놀림이었다.

방윤섭은 교복 안주머니에 있는 전자 담배를 더 깊숙하게 숨겼다.

목우람이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몰라 마음이 불안해졌다.

‘아, 저건 또 뭐야.’

도망치듯 향한 도서관에서 그다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인물들을 목격했다.

은광고가 자랑하는 두 천재, 주수혁과 안다인.

둘은 우연히 만났는지 열람용 책상에 마주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가끔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애틋하고 표정이나 몸짓에서 깨가 쏟아졌다.

물론 저 두 사람은 아직도 사귀기는커녕 상대의 마음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놀고들 있다.’

그러나 저 두 천재는 놀고도 수석을 할 인물들이었다.

두 천재의 뒤를 1학년 0반의 부반장 조의신이 쫓고 있다고 하지만 두 사람이 수석을 놓칠 것 같지 않았다.

어쩐지 욱하는 기분이 차올라 방윤섭은 둘이 안 보이는 구석으로 향했다.

그러나 오늘은 도서관 어디에 가든 잘난 놈들이 넘쳐 나 방윤섭이 앉을 곳이 없었다.

‘아, 그냥 집에서 할걸.’

하지만 방윤섭은 자신이 집에 있으면 절대 공부를 하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았다.

엄마가 깎아 주는 과일을 먹고 퍼져 자다가 등짝을 맞고 집 밖으로 쫓겨날 미래가 쉽게 상상되었다.

방윤섭은 사람을 피해 계속 걸었다.

‘……도서관이 이렇게 넓었나? 하긴 그 책들 다 보관하려면 넓어야지.’

홀로그램 타입의 책을 읽을 수 있는 보급형 디바이스의 등장으로 종이책을 읽는 사람이 줄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종이책을 선호하는 독서가는 세계 어디에서나 존재했고 전 세계에선 오늘도 종이책 타입으로 신간이 발행되고 있었다.

은광고의 도서관은 매일 세계에 발매되는 신간의 수보다 더 빠르게 장서 수가 늘어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기묘한 통계 결과는 도서 수집광 은광고의 교장이 신간에 덧붙여 세계 각지에 숨어 있는 희귀서와 고서를 사들인 결과물이었다.

어마어마한 수의 책을 보관하기 위해 은광고의 도서관은 시도 때도 없이 증축되거나 구역 이름을 붙여 새롭게 신설되곤 했다.

이곳 중앙 도서관도 올해 말에 증축 계획이 잡혀 있는 상태였다.

‘여긴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도서관 지도를 봐야 하나.’

방윤섭은 생각 없이 걷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도서부의 주요 업무로 주기적으로 도서관 투어를 여는 것과 도서관에서 길 잃은 학생을 픽업하는 것이 있는데, 자신이 미아가 됐다니 공연히 화가 치솟았다.

방윤섭은 자력으로 길을 찾기 위해 씩씩거리며 책더미를 헤맸다.

30분 정도 서가를 걸었을 때, 처음으로 사람을 발견했다.

‘이런 곳에도 열람석이 있나?’

낡은 나무 바닥 위, 4인용 테이블과 의자, 한 명이 누울 정도 되는 크기의 소파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열람석에 여학생이 한 명 앉아 있었다.

평범한 인상의 여학생은 어딘가 지쳐 보였다.

‘뭐 여기까지 와서 공부를 해? 쟤도 길 잃었나. 아, 잠깐. 어디서 본 얼굴인데.’

방윤섭은 곧 어느 사건을 떠올렸다.

한때 이능을 잃은 학생들이 부정 입학자임이 밝혀져 학교가 뒤집혔던 적이 있었다.

이 사건에 휘말려 본의 아니게 부정 입학 하게 된 학생이 하나 있었다.

저기에서 외롭게 공부하는 아이가 그 선의의 피해자였다.

‘……상위 50%에 들어서 재학하는 걸 허락받았다고 했는데.’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혼자 이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공부하는 아이를 보니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방윤섭은 충동적으로 여학생의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 가방을 열었다.

거칠게 노트와 필기구를 꺼내느라 꽤 시끄러웠는데, 상대는 딱 한 번 방윤섭을 흘끗 봤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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