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15화 (315/925)

53. 두 번째 시도 (5)

3/4분기 학생 대표 회의는 평소보다 느리게 진행되었다.

회의는 기본적으로 각 자치 기구와 학급의 활동 내역 보고가 선행되는데, 3학년은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 활동이므로 원활한 인수인계를 위해 꼼꼼하게 보고하는 것 같았다.

또 2학기에 들어서 처음으로 사관학교와 교류전도 치렀으므로 그때 사용된 인력과 예산, 집행 과정 등을 보고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음은 디바이스를 통해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학생회 측에서는 다음 교류전을 위해 교사, 학생, 일반인 참관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첫 교류전에 정신없었을 텐데 이런 부분까지 생각하다니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많은 학생회다운 기획력이었다.

학생회의 보고를 담당한 유상희가 물 흐르듯이 설문조사 결과를 집계한 그래프를 설명한 데에 이어 건의 사항을 발표했다.

“건의 사항으로 종목의 수를 늘려 달라는 요청이 가장 많이 들어왔습니다. 요청이 들어온 건 육상, 수영, 체조 등을 포괄하는 기초 종목과…….”

충분히 종목이 많아서 일정 조정에 고생을 했다고 들었는데, 다음 교류전은 종목이 더 늘어나는 건가.

학생회에 소속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수고가 눈앞에 그려졌다.

그때, 앞을 보며 발표하던 유상희가 순간 시선을 조금 내려 내 쪽을 흘끗 봤다.

“체스, 바둑, 장기, e스포츠 등의 마인드 스포츠도 교류전 종목에 포함시키자는 의견을 긍정적으로 검토 중입니다. 이 부분은 차후 사관학교 고등부와 논의할 예정입니다.”

체스 이야기가 언급되자 유상희 외에도 다른 이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꽂혔다.

금찬솔과 왕찬솔은 2학년 0반 연가람이 진 게 떠올랐는지 아주 못마땅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내가 올해 체스 대회에 우승했으니 당연히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럼 천동하도 나가겠지?’

타교와의 교류전이니 분명 단체전 방식으로 시합을 하게 될 거다.

천동하와 한팀이 되어 단체전 전략을 짜는 것도 재밌을 것 같은데.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체스 외에도 신경 쓰이는 단어가 있던 탓이다.

‘그런데 e스포츠면…… 게임을 하게 될 텐데. 고등학생에게 인기가 있을 게임으로.’

지금도 국제 대회가 열리는 유명 게임 대회가 있긴 하지만, 플마고 속 전개상 내년에 세계의 게임 시장 판도를 뒤집어 놓는 초대박 온라인 게임이 출시된다.

은광고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니 그 게임이 교류전 e스포츠 종목으로 꼽힐 가능성이 컸다.

‘……플마고는 국민망겜이었지만, 게임 속 게임은 갓겜이었는데.’

그 게임은 갓겜으로서의 모든 요소를 갖췄었다.

게임 속의 묘사를 보면서 ‘플마고 운영진들이 갓겜의 요소를 알면서도 왜 플마고는 망겜으로 만든 걸까.’라고 의문을 품을 정도였다.

“한중일 교류전은 중국 측의 강력한 요청으로 내년 이후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일본 측에서 일정을 당길 것을 계속 요구하고 있지만 은광고는 올해 내에 교류전을 여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유상희는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지 않았지만, 중국에 직접 취재하러 다녀온 신문부는 그 이유를 대충 알고 있었다.

신문부가 중국 플레이어 양성소를 방문할 당시 플레이어의 폭주를 유도한 습격이 있었다.

폭주의 원인이 외부에 있음을 파악한 공안은 플레이어 양성소를 폐쇄하고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하는 중이다.

조사의 진척도는 현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니 교류전을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닐 거다.

‘일본이 일정을 당기고 싶어 하는 이유는 짐작이 가.’

현재 일본에서 가장 유망하다는 어느 신예 플레이어 때문일 것이다.

올해 화족 출신만 입학이 허락되는 여학교에 들어간 그녀의 활약은 가끔 한국에서도 기사로 나올 정도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그 천재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은 거겠지.’

그녀의 대변인이 인터뷰에서 늘 나이를 강조하는 걸 보면 누구라도 이유를 짐작할 거다.

그럴듯한 성과를 거둔 이가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사람들의 주목도가 커진다.

나도 경험해 봐서 안다.

내 대국 결과가 나온 기사의 헤드라인엔 항상 내 나이가 붙어 있었으니까.

‘그래 봤자 주수혁과 안다인이 있는 한 그 나이대에선 세계 제일의 천재가 되는 건 불가능할 텐데.’

이명을 받은 이후로 더욱 화려한 활약을 보여 주고 있는 타이틀 히어로와 타이틀 히로인을 생각하니 가슴이 웅장해졌다.

학업과 병행하면서도 저런 성과를 보이니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다음 안건은 올해 학교 축제 준비에 관한 사항입니다.”

어느 사이에 여기에 앉은 학생 대표들이 가장 기대하고 있는 주제가 나왔다.

“축제의 경우, 일정에 변동 사항은 없습니다. 기말고사를 치른 다음 주에 학교 축제를 열 예정입니다. 4/4분기 학생 대표 회의는 축제가 끝난 후에 열릴 예정이오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축제라는 말에 김유리가 들뜬 얼굴을 했다.

축제가 끝난 후에 무슨 일이 있을지 생각하면 들뜨고만 있을 순 없었지만, 들뜬 아이들을 보니 축제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그럼 마지막으로, 차기 학생 대표를 소개하겠습니다.”

학생 대표 회의를 마무리하기 전, 도원우가 그렇게 말하자 총선거를 통해 선출된 차기 학생 대표들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차기 학생회장 염준열.

차기 선도부장 천동하.

차기 지익회장 계이담.

차기 총동아리회장 허채아.

넷 중에 계이담을 제외하면 전부 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였다.

차례차례 학생 대표 소개를 마친 도원우가 좌중에 인사를 했다.

다음에는 저 자리에 염준열이 설 테니 도원우가 학생 대표 회의를 진행하는 건 마지막인 셈이다.

“은광고의 새 학생 대표들과 함께 학교를 잘 이끌어 주시길 바랍니다. 이상으로 3/4분기 학생 대표 회의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단정하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도원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 있는 게, 시원섭섭한 기분인 것 같았다.

곧게 서서 회의장을 돌아보는 모습이 마치 플마고 속에 등장한 완벽한 명문고의 학생회장 그 자체였다.

은광고의 학생회장에 걸맞은 모습이었지만, 뭔가 의아하게 느껴졌다.

‘……오늘도 추하지 않았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생겼지만 왜 추하게 굴지 않냐고 따질 수도 없으니 우선 지켜보기로 했다.

평소에는 회의가 끝나면 다들 조용히 자리를 뜨는데 오늘은 다 같이 박수를 보냈다.

아직 10월 중순이니 3학년들이 등교하는 날은 많이 남아 있었지만, 앞으로는 수험과 진로 준비로 바빠질 테니 얼굴을 보기 힘들어질 거다.

그 생각에 회의장에 있는 3학년들의 얼굴을 보며 나도 잠시 감상에 잠겼다.

3학년 0반 선배놈들은 이 자리에 없긴 했지만.

딩동.

회의장을 빠져나가 기숙사로 향할 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황지호] 학생 대표 회의는 끝났나?

타이밍이 지나치게 절묘하다.

노친네가 의문문으로 메시지를 보내긴 했지만 저 문장이 ‘학생 대표 회의가 끝난 거 다 안다.’라고 읽혔다.

그런데 학생 대표 회의가 끝났는데 황지호가 뭐 어쩔 건가.

대충 흘려 보고 다시 기숙사로 향할 때, 추가로 메시지가 왔다.

그 메시지는 무시하기 어려웠다.

[황지호] 슬슬 두 번째 시도를 하려 한다.

‘두 번째 시도’라는 단어에 옥상에 서 있던 권레나가 잠깐 머릿속에 스치다 사라졌다.

왜 저놈은 단어 선택을 저렇게 하는 건가.

그동안 사용을 못 하게 하던 ‘리플레이’에 관한 내용이란 걸 알아채긴 했으나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추가로 온 메시지는 위 메시지보다 더 무시하기 어려웠다.

[황지호] 꼬리에 관해서도 이야기할 게 있으니 메시지를 무시하지 말고 오도록.

*    *    *

그날은 어쩐지 가슴이 수런거려 종일 일에도, 연주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조카의 낙제 소식을 받고 충격을 받긴 했으나 답을 밀려 쓴 것 같으니 재시험은 문제없이 통과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도 마음이 계속 불안했다.

그런 중에 늦은 시각에 조의신이 권레나를 마중하러 와 달라고 부탁했다.

조의신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권제인은 묻지 않고 바로 은광고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본 수척한 조카의 모습에 권제인은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레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

재러드 리가 기겁하여 권레나를 에어 리무진에 앉히자 그녀는 바로 눈을 감고 잠들었다.

권레나는 체력, 정신력 모두 한계인 듯했다.

―제가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조의신은 그 말을 끝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리에서 온갖 생각이 들었지만, 기껏 자신을 불러 준 조의신을 추궁할 수 없어서 그대로 팀 빌딩으로 향했다.

다음 날 눈을 뜬 권레나는 권제인에게 어느 사실을 고백했다.

“……환몽 게이트에 관해서 아시나요?”

조카를 괴롭힌 그 존재에 관해 모를 리가 없었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환몽 경매는 권제인의 손에 박살 났을 거다.

권제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말을 시작으로 권레나는 하나하나 고백했다.

“사실, 저, 그…… 환몽 경매에 참가자로 간 적이 있어요. 제자가 되기 전에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숨겨서 죄송해요.”

권레나가 거듭 사과하자 권제인은 바로 어느 사실을 밝혔다.

“……알고 있었어.”

“네?”

“팀 빌딩으로 초대하기 전, 1학년 0반 아이들에 관해 조사를 다 했었어.”

1학년 0반 아이들을 초대하기 전 반 아이들을 조사한 건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재러드 리가 협회에 임의 동행 하게 된 사건을 계기로 꾀돌이에게 부탁해 조의신과 권레나의 뒷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석촌 호수의 수중 이계 공략 당시 호족과 함께 행동하는 조의신이 수상해서.

또, 환몽 게이트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권레나의 양부모 밑에 있던 그녀가 어떤 처지에 있었을지 걱정되어서.

권제인은 거짓말을 하진 않았지만 비겁하게도 진실을 밝히진 않았다.

“……그럼 혹시 세음이 건에 관해서도 아시나요?”

권레나의 말에 권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권레나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어 권제인은 힘을 꽉 줘 그 손을 움켜쥐었다.

“응. 그 아이 건으로 자책하고 있는 걸 알아도 말하지 못했어. 미안해.”

“아뇨! 그건 순전히 제 잘못이니까 권제인 선배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권레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침묵하는 조카를 보며 권제인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왜 의신이가 레나와 있던 걸까. 이상한데. 만약 상담을 했다면 친한 유리나 같은 기숙사 층을 쓰는 한이에게 하지 않았을까?’

순간 조의신이 자신의 입으로 전할 수 없다고 말한 게 떠올랐다.

동시에 입학 첫날에 있던 사건도.

‘설마, 두 번째 시도를…….’

권제인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권제인과 권레나가 서로 손만 잡고 아무 말도 못 하는 상황이 한참 이어졌다.

침묵을 깬 건 권레나였다.

“세음이한테 말하고 사과하고 싶은데, 말하기가 어려워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권제인은 권레나의 강한 마음에 감탄했다.

여전히 자신이 피가 이어진 가족이란 걸 말할 생각도 제대로 못 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레나 잘못도 아닌데.’

권제인은 자신의 조카에게 해 줄 말을 좀처럼 떠올리지 못했다.

그때였다.

“아……!”

잠시 멍하니 있던 권레나가 뭔가 깨달은 듯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저, 이렇게 해 봐도 괜찮을까요……?”

다음으로 이어진 권레나의 말에 권제인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권레나의 발상 자체도 멋졌지만, 권제인이 그 과정을 도울 수 있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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