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동생 (4)
1학년 구역과 2학년 구역을 잇는 산책로.
두 구역을 잇는 산책로는 여러 개 있었는데, 금찬솔과 왕찬솔이 안내하는 길은 지도에도 안 나온 으슥한 곳이었다.
‘대체 어디로 갈 생각이지?’
금찬왕찬은 폐쇄된 경비원 초소 앞에 멈춰 섰다.
경비 시스템의 일부가 무인화되기 전, 넓은 은광고 부지를 순찰하는 경비원의 거점으로 마련됐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그런 건 표면적인 이유일 거고, 실상은 보초를 서는 황명 재단 호족들의 휴게소였겠지.’
플마고 설정집 중 은광고 시설 안내 파트에서 두세 줄 정도로 존재 여부만 언급된 장소였고, 위치를 비롯한 자세한 정보는 없었다.
그런데 이 0반 선배놈들은 여길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금찬솔과 왕찬솔이 휙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라.”
“들어가!”
인적이 드문 곳으로 1학년 후배를 끌고 와 저런 소리를 하는 건 위험하지 않나?
억지로 굳힌 두 사람의 얼굴에 어린 짙은 장난기와 기대감이 살짝 보이지 않았다면 도망쳤을 거다.
‘오늘은 좋은 일도 있으니 어울려 줄까. 저번 제갈재걸 일로 고마워하고 있으니 나한테 심한 짓도 안 할 거고.’
0반 선배놈들께 자비로운 마음을 베풀어 장난질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초소 건물은 낡았는데, 여닫이 손잡이는 반질반질한 게 뭔가를 준비한 것 같았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을 때였다.
‘……이게 뭐야!’
문이 열리고 보인 건 수많은 제갈재걸이었다.
좌를 봐도 제갈재걸, 우를 봐도 제갈재걸, 아래와 위 어디를 봐도 제갈재걸이 있었다!
교실만 한 크기의 초소 안에 온통 제갈재걸이 가득했다.
이 정신 나간 선배놈들은 학교 안에 이런 걸 만들고 있었나.
제갈재걸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답게 제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라 그런지 뭘 입어도 잘 어울리네. 저걸 어디에서 다 구했지?’
인쇄물을 통해 2D, 홀로그램을 통해 3D로 구현된 제갈재걸은 각기 다른 차림을 하고 있었다.
검소한 제갈재걸에게 저만한 수의 옷이 다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자선 화보나 인터뷰 등등을 포함해 정말 영혼까지 끌어모은 것 같았다.
“어떠냐! 신문부가 만든 화보집보다 훨씬 낫지?”
“우리가 만들면 더 잘 만들 수 있어! 봐라!”
“3차원으로 즐기는 화보집이다!”
신문부가 스승의 날 때 만든 제갈재걸 잡지에 묘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그건 5월 얘기가 아닌가. 왜 10월 말에 들어서 이 짓을 하는 거지?
“제갈 쌤의 멋짐을 알리기 위해 학교 축제 때 기획전을 열 생각이거든. 가제는 ‘제갈재걸 선생님 3D 화보집’ 이고, 이건 프로토타입이야!”
“그래! 이런 외진 곳에선 제갈 쌤의 위대함을 표현할 수 없어!”
“축제 때는 더 크고 멋지고 아름답게 할 거다. 장소도 규모도 더 어마어마하게 할 거야!”
축제는 12월에 기말고사가 다 끝난 후에 하지 않나?
그리고 프로토타입이라면 이게 끝이 아니란 말인가.
한가한 2학년 0반 선배놈들께선 축제에 장기 프로젝트를 발표할 예정인 듯했다.
할 말을 잃고 있는데, 갑자기 금찬솔과 왕찬솔이 정색하며 말했다.
“아, 그런데 제갈 쌤 팬이 지금 이상으로 많아지면 곤란하니까 엄격하게 초대객을 따질 예정이다.”
“그래, 지금도 팬이 너무 많아.”
“특히 그 첫 제자인지 나발인지 바쁘다고 징징거리면서도 계속 연락해 대!”
제갈재걸의 팬이 늘어나면 곤란하다고?
몇 초 전에는 제갈재걸의 멋짐을 알리기 위해 기획전을 열 거라고 하지 않았나?
금찬왕찬 선배놈들이 정말 뭘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홍규빈은 계속 주기적으로 징징대나 보네.’
최근엔 일을 따로 시키지 않았지만, 남궁 그룹 건을 포함해 여전히 일이 많은 듯했다.
그래도 매일같이 제갈재걸한테 연락할 정도면 아직 여유가 있는 게 아닐까?
기억해 뒀다가 일이 생기면 홍규빈을 부려 먹어야겠다.
‘그런데 왜 나를 여기에 끌고 온 거지?’
이 의문은 이어지는 선배놈들의 말에 바로 풀렸다.
“자, 좋은 걸 보여 줬으니 너도 대가를 줘야지!”
“그래, 우리 반 빼면 이거 본 거 너밖에 없거든.”
“부탁 하나 좀 들어주셈.”
나한테서 뭘 뜯어내려고 여기까지 불러냈나 보다.
강매당하는 기분이었지만, 실제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좋은 화보집을 감상했으므로 기꺼이 응하기로 했다.
“네, 말씀해 보세요.”
“크으, 0반 후배님은 말이 통하네!”
“수상한 부반장님께 좋은 걸 보여 줬으니 당연한 반응이지!”
금찬솔과 왕찬솔은 내가 거절하는 건 생각도 안 했다는 태도였다.
염치없는 모습이었으나 실제로 저 선배놈들은 좋은 걸 만들었고 내가 그걸 좋다고 생각했으니 어쩔 수 없긴 했다.
“우리가 플레이리스트 파이널 라운드 생방송 방청권 구하려고 개난리를 쳤는데 못 구했거든.”
“크윽, 경쟁사가 후원하는 프로그램이라 연줄도 못 써!”
“그런데 님들 독고미로한테 초대받아서 플레이리스트 파이널 라운드 생방송 방청 간다면서.”
저건 어떻게 안 건가.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방청권 구할 능력은 없어도 후배들이 방청 간다는 정보를 입수할 능력은 있나 보다.
“미로는 자기 제외한 반 아이들하고 담임과 부담임 선생님 초대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님들 반은 출석률이 망했잖아요. 자리가 남을 거 아님?”
뼈아픈 소리였지만 출석률이 망했다는 건 맞는 말이었다.
‘여전히 등교 안 하는 애들이 많지.’
우리 반 총원은 16명.
이 중 현재 등교하지 않는 건 6명.
그 여섯 명 중, 방송 촬영이 끝나면 등교할 예정인 독고미로를 제외하면 여전히 5명은 등교 거부 중이다.
즉, 우리 반 총원을 고려해 독고미로가 방청권을 준비했다면 다섯 자리가 남는 셈이다.
‘김유리는 여전히 등교 안 하는 애들 간식도 꼬박꼬박 챙기고 있으니까, 방청권 수도 그렇겠지.’
우리 반의 착하고 능력 있는 반장은 준비성이 좋다.
언제 어느 때 반 아이들이 등교하더라도 쉽게 적응하도록 늘 배려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등교하지 않는 아이들 몫의 방청권까지 준비했을 거다.
‘하지만 등교할 가능성은 적어. ……아니, 없겠지.’
독고미로의 파이널 라운드에 빈자리를 남겨 두는 것도 그렇고, 이번 자리는 2학년 0반 선배놈들에게 좀 줘도 되지 않을까?
나는 보험을 조금 걸어 두고 그 자리를 내주기로 했다.
“네, 아마 다섯 자리 남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등교 안 하는 애들이 방청일 되기 전에 학교를 나올 수도 있어서…….”
“후배님이 등교하신다면 바로 저희는 자리를 뜨겠습니다!”
“제발 그 다섯 자리를 두고 입후보하게 해 주십쇼!”
금찬솔과 왕찬솔이 딸랑이가 되었다.
당장 자리에 앉히고 안마라도 해 줄 기세였으나 그건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선배놈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 줬다.
“네, 그럼 말해 볼게요.”
“됐다! 생방송 방청권!”
“아자! 미로야, 우리가 간다!”
“한 자리는 제갈 쌤이고, 남은 네 자리 두고 싸워야겠네.”
“순위제로 해야 돼. 중간에 후배님들이 등교할 수도 있잖아!”
조만간 2학년 0반에서 피바람이 불 것 같다.
두 딸랑이들은 쾌재를 부르다 바쁘게 움직였다.
“자, 그럼 여기 정리하고 가자!”
“후배님, 잠시만 기다리십쇼! 가는 길까지 모셔다드리고 간식도 드리겠습니다!”
“넵! 저희가 1학년 0반 후배님들을 위해서 에어 호텔에 가을 특선 밤 크림 몽블랑, 단호박 피스타치오 다쿠아즈 세트를 배달시켜 뒀습니다!”
금찬솔네 에어 호텔이면 ‘이카로스’였지.
이카로스의 가을 한정 디저트 세트는 인기도 맛도 좋으니 반 아이들도 기뻐할 거다.
나는 선배놈들이 홀로그램을 끄고 포스터 위에 암막을 덮고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얌전히 기다렸다.
왕찬솔이 암막 시트를 추가로 가지러 잠시 멀리 갔을 때였다.
“아, 수상한 부반장님아. 미로 말인데…….”
금찬솔이 작은 목소리로 내게 뭔가 말하려 할 때였다.
위이이이잉!
경비원 초소 안에서 사이렌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억! 외부인이 접근한다!”
“빨리 정리해!”
금찬솔과 왕찬솔이 급히 움직였다.
저 선배놈들은 이곳을 숨기기 위해 접근 경보 장치까지 준비한 모양이다.
두 사람이 순식간에 모든 홀로그램을 끄고 암막으로 포스터를 덮어 버린 직후, 밖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2학년 0반 반장과 부반장이 1학년 학생을 납치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순순히 투항하라!”
“급습한다면서 왜 소리를 질러.”
“……아, 맞다.”
큰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진승이었다.
천동하도 같이 온 건지 옆에서 작게 타박하는 소리도 들렸다.
선도부 소속 선배들이 2학년 0반 마수에 걸린 1학년 후배를 걱정해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선도부 차기 부장하고 부부장한테 걸렸네. 자리 옮겨야 할 듯?”
“다음 버전은 좀 색다른 시도를 하고 싶었는데 잘됐네. 후보로 물색한 곳 중에 지하실이 있는 곳 있었잖아. 거기로 할까?”
“아, 그런데 거긴 접근성이 별로지 않아?”
금찬솔과 왕찬솔은 이곳 말고도 학교 내에서 물색해 둔 장소가 몇 군데 있는 모양이다.
둘이 장소 몇 군데를 언급했는데, 전부 학교 안내 지도에는 나오지 않은 장소였다.
‘학교가 워낙 넓다 보니 지도에도 안 나온 거점이 꽤 있구나.’
곧 천동하와 마진승이 초소 안으로 들어왔다.
마진승은 곧장 금찬솔과 왕찬솔한테 달려들었다.
“너희들! 후배 데리고 뭐 하는 거야!”
“귀 따가워! 시끄럽다!”
“후배님이랑 얘기하는 게 뭐가 잘못됨?”
마진승과 금찬솔과 왕찬솔이 티격태격거렸다.
2 대 1인 상황인 데다, 억지를 부리고 말발을 세우는 건 금찬왕찬 콤비가 몇 수 위였기에 마진승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마진승이 일방적으로 털리는 와중에 천동하가 내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의신아, 괜찮아?”
“네, 그냥 이야기만 했어요.”
“이야기를 이런 곳에서 해?”
“선배님들이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으셨나 봐요.”
“……그래.”
상당히 불합리한 설명이었는데도 금찬솔과 왕찬솔을 보며 천동하가 납득했다.
천동하는 추궁하는 대신 초탈한 눈으로 언성을 높이는 셋을 봤다.
앞으로 3학년 때 어떤 고생길이 열릴지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기분인 듯했다.
“1학년 구역까지 바래다줄게.”
“괜찮아요.”
“아니, 또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
천동하는 후배가 또 이상한 놈들에게 시비가 걸릴까 걱정됐나 보다.
우리는 셋을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섰다.
“2학년 때 선도부 들어오는 거 생각해 봤어?”
1학년 구역이 보일 때쯤, 천동하가 입부 권유를 했다.
3/4분기 학생 대표 회의가 끝난 이후 보낸 인사 메시지에 선도부 입부 방법이 소개되어 있어서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입부 권유를 한 건가.
나는 고민 끝에 거절했다.
“선도부 활동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
천동하는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다시 권하지는 않았다.
방금 금찬솔과 왕찬솔이 나를 외진 곳으로 끌고 와서 한 권유에 비하면 매우 신사적인 태도라 크게 비교되었다.
“그럼 우리 연구소에는 관심 없어? 인턴 모집하고 있는데.”
“황명 연구소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천동하는 고등학생 신분이나 현재 황명 연구소 소속의 객원 연구원이었다.
객원 연구원이 후배에게 인턴 자리를 소개하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뭔가 마음에 걸렸다.
적극적으로 낯선 이를 자기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건 천동하답지 않은 태도였다.
나는 그 이유를 묻기로 했다.
“저를 추천하는 이유가 있나요?”
“저번에 말했잖아. 내 동생이 네 팬이라고. 동생이 잘 따르는 우상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
“네……?”
천동하는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내 동생은 나를 형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아.”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