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28화 (327/925)

54. 동생 (8)

호사가 진족의 주최로 열리는 ‘비정기 오찬회’는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왔다.

이 사교 모임의 시작은 대규모 유괴 사건이었다.

어느 만석꾼 아들의 생일잔치에 온 귀한 집의 아이들이 여덟이나 유괴되었고, 범인은 아이들을 풀어 주는 대가로 큰 몸값과 만석꾼의 목숨을 요구했다.

만석꾼이 책임을 져 모든 몸값을 물고 제 목숨을 끊으려 할 때였다.

―내가 아이들을 구해 주마. 단, 조건이 있다.

어느 진족이 홀연히 나타나 만석꾼에게 제안했다.

만석꾼은 반신반의했으나 진족이 밝힌 정체를 듣자 그에게 진정 일기당천의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고 곧바로 응했다고 한다.

―조건이 뭡니까?

상대는 조금 쑥스러워하면서 말했다.

―……나는 자식 복이 없다. 내 동족 모두가 그렇지. 그러니 네 자식이 어른이 될 때까지 가끔 이야기를 나누게 해 다오.

호사가 진족은 아이들을 모두 구했고, 만석꾼은 약조에 응했다.

그리고 호사가 진족의 제안에 관해서 알게 된 아이들의 부모 모두 은혜를 갚겠다며 제 아이들을 호사가 진족이 부르는 자리에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비정기 오찬회’는 어느덧 유력 인사의 자제들의 사교의 장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너도나도 자신의 자제들을 이 자리에 보내려 했는데, 그러다 보니 사람의 수를 줄이게 되었다.

―이래서야 단란히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듣기 어렵구나.

―나와 약조한 만석꾼과 가까운 아이들부터 부르겠다. 알아서 초대해.

그 결과 만석꾼과 그의 후손들이 초대장을 보내는 역을 맡게 되었다.

초대하는 조건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대략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유력 인사의 자제일 것.

둘째, 플레이어일 것.

셋째,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일 것.

그 결과, 예의 ‘비정기 오찬회’의 초대장을 받는 이는 서른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주수혁과 도원우는 초대에 응해 오찬회에 참석했다.

“원우 형, 안녕하세요. ……시후는요?”

“야구 보러 갔다. 네가 표 줬다고 하던데.”

“시후 친구가 주오 팬이라서요. 친구에게 줄 용도라고 생각했는데…….”

도시후가 고등학생이 되자 비정기 오찬회의 초대장이 날아왔으나, 늘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오지 않았다.

“그놈도 생각하는 게 있겠지. 내버려 둬.”

“……네.”

도원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게 도시후를 걱정하는 듯했다.

두 사람이 침묵하는 사이, 도원우의 디바이스에 진동 알람이 울렸다.

도원우가 디바이스를 확인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준열이한테 연락 왔다. 금찬솔과 왕찬솔이 주최자의 정체를 밝히겠다고 스태프 구역에 잠입한 걸 잡았다는군. 혜지도 그쪽에 있다고 한다.”

“하하하, 선배님들은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나 봐요.”

“이제 내가 안 오면 네가 그놈들 잡으러 가야 한다.”

호사가 진족은 제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고, 은혜를 입은 유력 인사들의 후손들도 적극적으로 밝히려 들지 않았다.

그래도 저 금찬솔과 왕찬솔은 예외였다.

‘……내년부터는 원우 형 없이 0반 선배님들을 상대해야 하는구나.’

주수혁은 도원우의 뒷모습을 보며 미묘한 감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도시후가 도원우의 안부를 물었는데…… 도원우는 평소대로였다.

조금 멍하니 있는 주수혁의 등을 누가 툭 쳤다.

“얍, 안녕!”

주수혁을 부른 건 남궁규연이었다.

“어? 이번엔 규연이 너도 왔네.”

“원래 올 생각이 없었음요. 어제 규빈이 오빠가 갑자기 여기 가 보라길래 온 거임.”

“규빈이 형이?”

“넵,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는데? 진귀한 걸 볼 수 있을 것 같대나.”

주수혁이 조금 놀란 눈으로 말했다.

“혹시, ‘그 스킬’하고 관련 있는 거야?”

남궁규빈, 아니, 홍규빈은 예지 스킬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남궁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주최자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정문이 열리고, 가면을 쓴 누군가가 등장했다.

“직접 등장하신 건 처음인데.”

“매번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지 않았나?”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면을 쓴 주최자는 똑바로 어느 지점을 향해 걸었다.

그곳에는 오늘 처음 온 초대객이 서 있었다.

‘어? 쟤는 0반의…….’

주최자는 곱상한 눈을 한 초대객, 고등학생의 모습을 한 황호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군.”

*    *    *

오늘 주오 드래곤즈 타선이 뻥뻥 터져서 초반부터 치고 가는 덕에 경기 내내 여유가 있었다.

그렇게 긴장했던 장남욱이 시원하게 김칫국을 마시며 앞으로의 경우의 수를 따질 정도였다.

장남욱의 투 머치한 토크에 지친 한이는 고개를 돌리고 쿠앤크 셰이크를 흡입했으나 도시후는 끈기 있게 그 이야기를 들어 주고 가끔 맞장구도 쳤다.

‘나도 누가 들어 주면 올무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에 관해서 저만큼 말할 수 있는데.’

올무 이야기는 타이틀 히로인 안다인이 들어 주긴 하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에 관해 이야기하긴 어려운 상황이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경기에 관해 결론만 말하면, 한국시리즈 3차전 승리는 주오 드래곤즈가 가져갔다.

SZ 스타즈 홈에서 치러진 1, 2차전에서 주오 드래곤즈가 1승 1패를 했으니 현재로선 2승 1패다.

즉, 주오 드래곤즈가 앞으로 2승만 하면 15년 만에 KBO 리그의 최종 우승 구단이 될 수 있다.

장남욱은 희망적인 관측을 하며 내내 들떠 있었다.

‘타이틀 히어로의 구단이 잘되면 나도 좋긴 하지.’

야구는 끝까지 가 봐야 안다고 하니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긴 하다.

그래도 주오 드래곤즈를 응원하기로 했다.

“야구장 처음 와 봤는데 재밌었어! 응원가 따라 부르는 거랑, 같이 구호 외치고 응원봉 두드리는 것도 하다 보니까 점점 재밌더라.”

“수혁이네 회사가 주오지? 나도 이참에 주오 드래곤즈 팬 할까.”

그 말에 장남욱이 곧바로 영업에 들어갔다.

“잘 생각했어, 얘들아. 주오 드래곤즈에서 WBC나 아시안 게임 같은 국가 대표로 차출되는 선수가 많아서 우리 팀 팬이 되면 국가 경기 보는 즐거움이 늘어나.”

“국가 대표 선수가 소속된 팀이었습니까?”

“응, 오늘 엔트리에 나온 선수 중 대부분이 국대 경험이 있거나 다음에도 국대에 차출될 가능성이 많아. ……아.”

성공적으로 끝날 뻔한 장남욱의 영업은, 그의 성실하고 정직한 성격 때문에 망했다.

“……국대 훈련에 참가하느라 정규 리그 쪽에서 팀 훈련 부족으로 인해 수비에 가끔 구멍이 생기고 타격감이 떨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하긴 하지만. 그리고 우리 쪽에 제대로 된 마무리가 없어서 가끔 불펜이 폭발하는 바람에 역전패도 자주 당하긴 해. 그래서 우리 팀이 만년 2등인가 봐.”

영업으로 시작했던 말이 경고로 끝났다.

장남욱은 영업에서 일하면 안 될 것 같다.

장남욱의 말을 들은 예비 주오 드래곤즈 팬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고민에 들어갔다.

“그 플레이리스트에 나오는 독고미로 말인데, 너희 반이라면서. 버스킹 영상에 나온 게 우람이랑 레나 맞지? 피아노가 우람이, 바이올린이 레나.”

“응, 맞아.”

장남욱이 망친 분위기를 살린 건 도시후였다.

도시후는 눈썰미가 괜찮은 편인지 뒷모습만 보고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두 사람이 반주를 했다는 걸 바로 알아봤다.

“노래 잘하더라, 음색도 좋고. 플레이리스트 출연진들이 애국가 다 같이 부를 때에도 미로가 부르는 파트는 뭔가 다르더라.”

독고미로 이야기에 낯선 도시후를 경계하던 민그린이 처음으로 길게 말을 했다.

“……그치? 미로 노래는 라이브로 듣는 게 더 좋은 거 같아.”

“반주가 없는데도 잘 불렀지.”

“음정과 박자 모두 정확했습니다. 마이크 소리가 울리는 구장 안에서 그렇게 부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멋진 노래 솜씨였습니다.”

보통 스포츠 경기를 하기 전에는 애국가 제창 시간을 갖는다.

정규 리그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녹음한 애국가를 틀어 주는 선에서 그치는데, 한국시리즈에서는 가수나 합창단을 초청해 무반주로 애국가 라이브를 하곤 한다.

목우람의 말대로 구장 안에서 무반주로 실수 없이 애국가를 완창하기 위해선 상당한 가창력이 요구된다.

어설프게 애국가를 불렀다간 가수의 흑역사로 영원히 박제되고 만다.

그러나 실력파로 구성된 플레이리스트 출연진에게 그런 굴욕은 없었다.

독고미로는 후렴 부분 고음 파트를 담당했는데, 아주 깨끗하게 음을 뽑아냈다.

독고미로의 활약은 애국가 제창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미로는 플레이어로서도 잘 싸울 것 같아. 파울 볼이 좌석 쪽으로 날아왔을 때, 제일 먼저 반응해서 쳐냈잖아.”

플레이어리스트 출연진은 애국가 제창을 마친 후 구장을 뜨지 않고 경기를 끝까지 봤다.

이들은 홈팀인 1루 쪽에 앉아 경기를 관람했는데, 경기 중에 우연히 파울볼이 날아왔다.

바로 반응해 파울볼을 쳐 낸 게 독고미로였다.

“영상 클립 올라왔다! 그땐 멀리서 봐서 몰랐는데, 진짜 빠르다.”

“재생해 보자.”

한이의 제안에 권레나가 홀로그램을 띄워 영상을 재생했다.

화면 속 독고미로는 철구에 스파이크가 가득 박힌 철퇴를 한 손에 들고 파울 공을 쳐 내고 있었다.

은광구의 패왕으로 다닐 때에는 녹슨 못이 박힌 야구 배트를 들고 다녔는데, 그걸 주무기로 삼을 수는 없으니 그와 유사한 둔기인 모닝스타를 택한 모양이었다.

“이 무기는 뭐야? 메이스?”

권레나가 화면을 가리키며 묻자, 목우람이 답했다.

“학교에서 지급한 R급 초보자용 모닝스타 같습니다. 모닝스타는 메이스에 비해 길이가 긴 편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양손으로 사용하는 무기인데,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두르시는군요. 그것도 이런 긴급한 상황에 반응해 공을 쳐 낼 정도라면, 근력과 완력이 상당하신 것 같습니다.”

그거야 패왕 소리를 들을 정도면 보통 힘이 아닐 거다.

패왕의 위용을 느낀 아이들이 조금 놀라워하고 있을 때, 송대석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그린이도 할 수 있다.”

갑자기 송대석이 뭔 소리를 하나 싶긴 했지만, 그건 그렇긴 하다.

사관학교 교류전 당시, 아이스하키를 보러 갔다가 퍽이 펜스를 넘어 날아와 송대석이 맞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민그린이 퍽을 걷어차 링크에 꽂았으니까.

퍽도 차 냈으니까 야구공도 충분히 차 낼 수 있지 않을까?

도시후는 송대석의 말에 민그린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시후도 아이스하키 시합에서 있던 일을 아는지 감탄사를 뱉었다.

“아, 그때 우리 학교랑 하키장에서 시합했을 때 있던 일이지? 발차기 잘하더라.”

“어…… 고마워.”

“그린아, 고마워하지 마!”

민그린 얘기를 먼저 꺼낸 건 송대석인데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송대석이 억지를 부리자 민그린이 타일렀는데, 도시후는 바로 두 사람 사이가 어떤지 알아보고 웃으면서 한발 물러났다.

우리는 독고미로와 플레이리스트, 주오 드래곤즈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의욕에 불타는 장남욱은 도시후를 끌고 훈련을 할 생각인 듯했으나 우리는 카페에 들러 디저트를 먹고 더 이야기를 하다 헤어졌다.

기숙사에 오니 읽지 않은 디바이스 메시지가 쌓여 있는 게 보였지만, 읽을 마음이 들지 않아 내버려 뒀다.

‘급한 연락이면 전화를 하겠지.’

그렇게 변명하고 홀로그램 시계를 가만히 바라봤다.

기숙사 방이 지나치게 조용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아날로그 시계라도 하나 들여올 걸 그랬다.

시계 속 숫자는 계속 바뀌는데 눈이 감기지 않았다.

‘……잠이 안 오네.’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꽃집에 들르고, 꽃집에 들른 다음에 봉안당을 갈 생각이다.

그 이후에 다시 기숙사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천동하를 만나서 황명 연구소에 가기로 했는데…….

내일도 할 일이 많은데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날이 바뀌고 해가 뜰 때까지 혼자 뜬 눈으로 누워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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