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동생 (7)
이명 ‘내장산의 성자’, 본명 ‘여래훈’.
플레이어블 캐릭터 여래훈은 전투에 참가는 하되 싸우지 않는 서포터 캐릭터였다.
축복 등의 버프를 주고 상태 이상을 회복시키고 결계를 쳐 데미지를 경감시키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여래훈은 성자(聖者)라는 이명답게 싸우지 않는 플레이어블 캐릭터였다.
‘스님이 된 계기도 그랬지.’
출가하여 사미가 되기 전, 여래훈은 래퍼를 꿈꾸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집안에서 불교를 믿어 여래훈도 자연스레 불교 신자가 되었지만, 속세를 떠나 승려가 될 만큼 독실한 불교 신자는 아니었다.
여래훈이 출가를 결심한 건 남들보다 늦게 강력한 이능을 각성했을 때였다.
이능을 타고난 이가 플레이어 관련 직종에 종사하지 않으면 배척당하는 사회 분위기를 고려해 봤을 때, 그가 래퍼로서 데뷔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플레이어로서 이계를 공략하고 에너미와 싸우는 것도 싫었고 꿈이 무너진 좌절감에 견디지 못한 그는 종교에 귀의했다.
‘싸우는 걸 꺼려 하는 플레이어들이 종교에 귀의를 많이 했다고 했지. 여래훈도 그런 계기로 종교를 가지게 됐어.’
사미가 된 그는 사미계(沙彌戒), 보살십계율(菩薩十戒律)을 지켜야 했다.
그 열 가지 계율 중에는 불살생계(不殺生戒),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항목이 존재해 여래훈은 플레이어로서의 삶에서 벗어났다.
그러다가 터진 게 ‘내장산 국립 공원 내장사 사건’이었다.
내장산에 발생한 이계를 공략하던 프로 플레이어 팀이 전멸하고 구조 요청을 하는 게 늦어 산 전체에 에너미가 범람했다.
그때 승려들을 비롯해 내장사로 대피한 등산객, 신도를 구한 게 여래훈이었다.
여래훈은 내장사 전체를 결계로 감싸 에너미의 침입을 막아 지원이 올 때까지 사찰과 사람들을 지키고, 지원을 온 프로 플레이어 팀이 에너미를 전멸시킨 후에는 오염된 토지를 정화했다.
그 이후, 여래훈은 에너미 토벌 이력이 없는 데도 이례적으로 플레이어SAT-K로부터 이명을 받게 되었다.
그 내장산의 성자 여래훈의 광림 ‘안식의 손길’은 서포트형으로, 연비는 상당히 나쁘나 ‘삿된 것으로부터 대상을 보호한다’라는 추상적인 내용의 축복을 실현한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플레이어의 궤적을 통해 여래훈의 광림을 사용한 적이 있었고, 그 결과물이 권레나의 바이올린 케이스 안에 들어가 있었다.
‘……입학 첫날에 권레나의 리본을 줍고 돌려주기 전에 ‘안식의 손길’을 사용했는데. 설마 그걸 알아챈 건가?’
여래훈은 권레나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보다 생각에 잠겼다.
기억 속을 헤집는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여태까지 자신이 축복을 내렸던 모든 인물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리는 듯했다.
여래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주변은 점차 더 소란스러워졌다.
“래퍼 래훈이다……!”
“뭐야, 저 애들이랑 아는 사이인가?”
“실물이 더 잘생겼다!”
“오빠, 얼굴에 김 묻었어요, 잘생김!”
그건 인정했다.
여래훈은 실물이 더 인물이 훤했다.
플마고 인게임에서 본 모델링과 이 세계에서 지면과 화면 너머로 본 여래훈의 모습 중에 지금이 가장 잘생겨 보였다.
환속한 이후 머리가 많이 길어서 이제 완전히 일반인 같아져서 그런 건가?
한창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속으로 칭찬하고 있자니 여래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안녕.”
여래훈이 싱긋 웃으며 친근한 태도로 인사했다.
권레나는 긴장하긴 했지만, 권제인을 처음 봤을 때에 비하면 비교적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근 가장 화제성이 큰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 후보보다는 동경하던 바이올리니스트 쪽이 더 권레나를 긴장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잠시 뜸을 들이던 여래훈이 입을 열었다.
“혹시 불교 믿어?”
“……네?”
여래훈의 말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뜬금없는 말이긴 했지만, 여래훈은 원래 플레이리스트 방송 중에도 뜬금없는 소리를 자주 했다.
가끔 사차원적인 발언으로 큰 웃음을 주면서도 여래훈 본인은 진지한 건지, 의도한 건지 알 수 없는 게 예능 방송 내의 그의 캐릭터였다.
여래훈이 권레나에게 말을 더 걸기 전에 누군가가 여래훈에게 말을 걸었다.
“래훈이 오빠!”
인파 사이로 등장한 건 독고미로였다.
독고미로는 오늘도 화려한 투톤 분홍색 머리였는데, 머리 모양은 저번에 봤을 때와 또 달랐다.
독고미로는 매번 다른 헤어스타일, 다른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기도 하고, 양 갈래로 높게 묶기도 했는데, 오늘은 높게 한쪽으로 머리를 묶은 사이드 포니테일에 야구공 모양의 장신구가 달린 머리핀과 머리끈을 착용하고 있었다.
독고미로와 여래훈은 방송 밖에서도 친하게 지내는지 친근하게 말을 나눴다.
잠시 이야기를 하던 두 사람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향했다.
나와 우리 반 아이들이 독고미로에게 작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인사하자, 여래훈이 독고미로에게 물었다.
“오늘 경기장에 온다고 했던 미로 친구야?”
“네, 우리 반 애들이에요!”
“그래? 소개해 줄래?”
독고미로가 밝은 목소리로 우리 반 아이를 하나하나 소개해 줬다.
특히 한이를 소개할 때는 가장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제 초등학교 동창, 한이에요.”
“……안녕하세요.”
“그래. 미로가 절친이라고 하던 애가 너구나.”
여래훈도 그런 독고미로의 태도를 안 건지 한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에 반해 한이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독고미로와 한이 둘 사이에는 아직 미묘한 감정의 골이 남아 있는 듯했다.
“아, 맞다. 래훈이 오빠, 지금 애국가 부르는 연습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한대요. 빨리 가요. 얘들아, 다음에 봐!”
멀리에서 보니 카메라도 보이는 게 슬슬 플레이리스트 촬영도 하려는 듯했다.
다음 주가 마지막 방송이니 애국가를 부르는 출연진의 모습은 길게 나가진 않겠지만, 어쨌든 촬영은 해 두나 보다.
여래훈은 여전히 권레나의 바이올린 케이스가 신경 쓰이는 눈치였지만, 촬영과 리허설을 앞둔 탓에 일단은 한 수 접고 물러났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
“네? 아, 안녕히 가세요. 미로야, 다음에 봐!”
여래훈은 마지막으로 갈 때도 권레나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흘끗 보다 갔다.
반 아이들은 갑자기 유명인 여래훈의 등장해 깜짝 놀라 있다가 뒤늦게 실감이 났는지 들뜬 얼굴로 이야기를 나눴다.
“래퍼 스님이라고 들었는데 스님 같지가 않네. 그냥 연예인 같은데.”
“그래도 레나한테 불교 어쩌고 하지 않았어?”
“불교 소리 들었을 땐 좀 놀라긴 했는데…… 음, 목소리 엄청 좋더라!”
여래훈 이야기로 들뜬 와중에도 혼자 심각한 인물이 있긴 했다.
목우람이 그랬다.
“……레나, 그 바이올린 케이스에 뭐가 있습니까?”
“응? 아, 바이올린이랑 그냥 이것저것…….”
목우람도 그날 기숙사 옥상에 있었으니 봤을 줄 알았는데.
목우람은 그때 이야기를 듣고 기숙사 벽에 매달려 통곡하느라 정신이 없어 권레나의 바이올린 케이스에서 나온 내용물을 보지 못했나 보다.
“음악 하는 사람이니까 바이올린이 신경 쓰였나 보지.”
“어, 이제 곧 우리 차례인 거 같은데. 추러스 무슨 맛 먹을지 다들 정했어?”
권레나가 말하기를 꺼려 하는 눈치이자 다들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마침 추러스 구매를 위해 기다리던 줄도 많이 줄어 있어서 화제를 바꾸기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목우람도 바뀐 대화 주제에 응해 호구스러운 발언을 했다.
“……종류별로 하나씩 전부 사고 싶습니다. 혹시 레나……나 반 아이들이 막상 사 봤더니 입맛에 맞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음, 생크림이나 바나나칩, 시럽 같은 토핑 추가 옵션까지 고려하면 수십 개가 넘을 거니까 그냥 하나만 사자.”
결국 목우람이 고집을 부려 추러스를 네 종류 사긴 했지만, 그 외에는 별문제 없었다.
간식을 몇 개 더 사고 음료를 사 들고 자리에 앉기 위해 이동했다.
우리의 인원은 총 여섯 명.
중앙석 한 테이블에 앉는 사람은 네 명.
우리는 두 테이블로 앉게 되었다.
“그럼 한 테이블은 모르는 사람이랑 앉겠네.”
“사다리 타기 해서 자리 정할까?”
“안 돼! 난 그린이 옆에 앉을 거야! ……모르는 사람하고도 별로 앉기 싫어.”
“대석아, 그냥 아무 데나 앉아!”
송대석은 민그린 옆에 앉되, 우리 반 아이들로만 구성된 테이블에 앉고 싶은 모양이다.
초등학생이 자리 투정하는 것과 별반 다름없는 태도였지만, 낯선 사람들 사이에 민그린을 앉혀 두는 건 아직 이른 것 같아서 나도 그 의견에 찬성했다.
결과적으로 나와 한이가 다른 테이블에 앉게 되었는데, 그쪽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둘 다 아는 얼굴이었다.
“의신아, 반 친구들이랑 같이 야구를 보러 왔구나. 잘 왔어.”
“어? 안녕.”
장남욱과 도시후였다.
‘자리가 붙어 있는 게 우연 같지는 않은데. 혹시 주수혁이 두 사람에게도 표를 준 건가?’
주오 드래곤즈 골수팬 장남욱은 로고가 박힌 야구 모자, 목에 거는 응원 수건, 응원 봉 막대기, 어센틱 유니폼으로 철저한 응원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장남욱은 그냥 평범한 차림으로 온 나를 보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10월 말이라 날이 선선하긴 하지만 볕이 세니까 모자를 쓰는 걸 추천할게. 야구장에 왔으니까 기왕이면 야구 모자를 쓰는 게 좋겠지.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더라도 눈 쪽에 그늘을 만들어 자외선이 안구 건강을 해치는 걸 막는 게 좋…….”
“아, 오늘 처음 본 애들도 있는데 소개해 줘!”
끊임없이 움직이는 입 모양을 읽던 한이가 점점 아득한 얼굴을 하자 도시후가 눈치껏 말을 끊었다.
도시후가 눈치를 발휘할 정도면 장남욱이 경기를 앞두고 정말 많이 긴장한 듯했다.
스포츠 전문 방송사와 야구 정보 포털 사이트에서도 어느 팀이 우승할지 예상할 때 의견이 반반 갈릴 만큼 팽팽한 상황이니 많이 긴장될 거다.
“그러고 보니 효돈이가 안 보이는데. 효돈이는 오늘 안 왔어?”
“뭐 연습하고 있나 봐.”
“그렇구나. 효돈이는 성실하구나! 시후야, 우리도 야구만 보고 실습 연습하러 가자.”
“그래, 그래.”
장남욱은 맹효돈의 부재를 이제 눈치챌 만큼 떨고 있었나 보다.
우리 반 아이들과 두 사람의 소개를 마친 후, 우리는 어린이날 잠실 야구장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 그러고 보니 의신이는 1학기 때 야구장에 갔었지. 어린이날에 잠실 더비 매치 때 이계가 나온 사건이었지?”
“야구장에 있던 사건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방문 전 사전 조사를 위해 검색했더니 어린이날 사건이 나오더군요. 은광고의 학생들과 사관학교 생도들이 활약했다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지금 계신 분들이 그때 계셨던 분들입니까?”
목우람의 질문에 도시후가 답했다.
“오늘은 원우 형이랑 수혁이도 없어. 둘은 아마 오늘 못 올 거야.”
그렇게 말하는 도시후의 얼굴이 어딘가 씁쓸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못 오는 원인이 있나?
‘도원우와 주수혁의 공통점은 수석인 점, 재벌가의 자제인 점…….’
두 번째 공통점을 떠올리자 오늘 바빠서 여기에 못 온다는 노친네 하나가 떠올랐다.
그 노친네, 황지호는 수석인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과 달리 비록 전 과목이 40점에 불과했으나 일단은 재벌가 자제라는 설정이었다.
‘설마 셋이 지금 같은 자리에 있는 것 아닌가?’
근거는 딱히 없으나 그럴싸하면서도 불길한 예상이 들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