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스테일메이트리스 (3)
천성헌이 사실을 인지하고 몇 달 후, 그의 집안이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았다.
익명의 제보를 받은 국회의원이 국정감사 자리에서 국세청장에게 천성헌의 조부가 총수로 있는 기업의 세무조사를 요구한 것을 시작으로 붕괴가 시작되었다.
서울지방국세청 조사1국 소속의 네 팀이 투입된 세무조사 결과, 추징 세액이 수천억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날벼락을 맞은 건 기업만이 아니었다.
수사기관이 천성헌의 집안사람들에게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을 통보했다.
―변호인단은 준비해 뒀다. 시간 맞춰 잘 가고, 네가 뒤에서 휠체어 밀면 그림이 나올 게다.
―지금 저보고 기자들 앞에 서라는 거예요?
―그럼 네 아들을 혼자 보낼 생각이냐?
―……아, 아니, 아버님, 몸도 안 좋은 제 아들을 어디에 보내라는 거예요!
―어느 안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게야! 애초에 네가 아들 단속을 잘했으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겠느냐!
핵심 계열사의 부사장 자리에 있던 천성헌의 이복형을 시작으로 천성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소환장을 받았다.
결국 천성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불구속 기소당했다.
조세 포탈, 시세조종, 뇌물 공여, 영업 비밀 침해, 자본시장법상 부정 거래 행위, 업무상 배임 등 주요 혐의 외에도 세부 혐의도 적지 않은 데다 수사 결과에 따라 추가 기소 가능성까지 있었다.
증권가에서는 곧 천성헌 집안의 그룹이 망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가운데, 주가가 나날이 떨어졌다.
주주 중에 웃고 있는 사람은 단 하나, 천성헌뿐이었다.
‘순조롭군. 애초에 같은 피가 섞인 나도 적대하는 사람들이니 적이 없을 리가 없었지.’
익명의 제보는 천성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천성헌은 그를 지나치게 견제하는 이복형 때문에 자신의 우수함을 드러내는 것을 꺼렸을 뿐, 그는 경영가로서의 재능을 타고났다.
기업 운영 상태와 자금의 흐름을 읽는 탁월한 안목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내부의 불법 행위를 파악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게 해냈다.
‘누군가는 나를 의심할 줄 알았는데…… 내가 생각보다 이 집안을 과대평가한 것 같네.’
이 상황까지 와도 아무도 천성헌을 의심하지 않았다.
천성헌은 눈앞에서 적의를 드러내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저들은 천성헌이 미래의 재산이 될 기업을 공격하리라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의신이 형이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했지.’
그들이 천성헌과 조의신의 인생을 망친 게 아주 간단한 일이었던 만큼 그들은 지금 천성헌과 조의신이 어떤 심정으로 살고 있는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천성헌의 가족들은 온순해 보이는 천성헌을 의심하지 못했다.
또 그들이 천성헌을 의심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네가 더 잘 알겠지만, 내가 네 입학 과정이나 성적에 손을 쓴 일은 없다. 걱정하지 말고 있거라.
―감사합니다.
―그래, 네가 한 조언이 좀 도움이 됐다. 저번에 네가 제안한 지분율 조정 말인데……,
언론과 검찰의 공격을 받는 대상엔 천성헌도 있었다.
대학교를 아직 졸업하지 않은 천성헌에겐 입학 비리, 성적 관련 부정 청탁 의혹이 걸렸다.
천성헌이야 제 실력으로 한국 최고의 명문대에 입성했으나, 이복형은 그렇지 않았다.
이복형의 부정 입학이 발각되자 천성헌도 자연스럽게 의심받았고 익명의 제보까지 있으니 수사에 이르게 되었다.
천성헌을 직접 가르친 교수들이 무죄를 주장하고 입학처에서 자료를 제공해도 언론은 막무가내였다.
‘다른 건과 달리 내 일은 증거도 없이 의혹만 제시했는데,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어.’
천성헌은 처음 결심한 대로 스스로를 체스 피스로 삼아 움직였다.
그래서 익명으로 제보를 할 때 별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이름도 팔았다.
출생의 비밀을 이용해 ‘천성헌을 서자로 들여 명문대 출신으로 포장해 후계자로 키우려 했다’는 그럴싸한 시나리오를 언론에 찌르니 미끼를 문 언론사에서 천성헌을 공격했다.
그 결과, 천성헌의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사라졌다.
아직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천성헌을 부정 입학자 취급하는 사람들이 넘쳐 났다.
‘이번 일로 사람을 거를 수 있으니 잘됐지. 조용하니까 좋아.’
그 와중에도 조의신은 변함없었다.
뉴스를 못 봤을 리가 없는데도 여전히 천성헌을 친한 후배로 대했다.
그럴수록 천성헌은 더 마음을 굳게 다졌다.
‘의신이 형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해내야 해.’
천성헌은 제 복수를 이복형 선에서 그칠 생각이 없었다.
이복형을 매장한다고 해도 그 이복형과 피가 이어진 가족들에게 힘이 남아 있는 한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천성헌은 그들이 누군가의 인생을 쥐락펴락할 힘을 갖길 원치 않았다.
―변호인단이 사임 의사를 밝혔다는 게 뭔 소리예요! 설마 국선 쓰라는 소린 아니죠?
―대체 뒤에서 누가 움직이는 거야!
―최 사장 그 새끼가 얼마 전에 속을 긁고 갔는데, 뒤 좀 캐 봐. 그놈이 손을 썼을지도 몰라.
―예전에 경영 승계권 두고 크게 다툰 당신 사촌 말인데요, 혹시…….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면 어두운 귀신이 생긴다는 의심암귀(疑心暗鬼) 말 그대로, 집안은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혼란하게 변했다.
천성헌은 파국으로 치닫는 집안을 보고도 별 감흥 없이 대했다.
‘어설프게 자비를 베풀면 안 돼. 언젠가 그 자비가 내 목을 칠 거다.’
천성헌은 강박에 가깝게 되뇌며 철저히 제 집안을 망가뜨렸다.
부잣집은 망해도 3년은 간다는데, 천성헌은 이 집안을 3년 이상 가게 할 마음이 없었다.
변호인단이 줄줄이 사임 의사를 밝힐 정도로 법적 공방에서 패색이 짙어졌을 때, 천성헌의 새어머니는 최악의 수를 뒀다.
―‘호텔’이라고 불리는 병원이 있어요. 아버님, 우리 애를 거기에 넣을 생각이에요.
―끝까지 법정에서 싸우겠다고 했는데…….
―그러다가 선고를 받고 바로 법정 구속이 되면 못 빼내요! 일단 ‘호텔’로 보내서 머리를 식히게 할 생각이에요.
천성헌의 새어머니는 하반신이 마비된 아들을 옥살이시키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 장애인 수감자를 위한 장애인 전담 교도소가 존재하고, 재벌가의 아들이라면 다른 수감자에 비해 크게 편의를 봐줄 게 뻔했으나 어머니의 입장에선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법 집행의 허점을 노려 아들을 빼낼 계획을 짰다.
―입원 중에는 형 집행을 미룰 수 있어요. 애 몸 상태도 있으니 일단 입원을 시키면 일이 수월해질 거예요.
―군 면제 건으로 의료 기록을 다 제출한 상태라 입원시키기 까다로울 텐데.
―신경정신과 쪽에 진단서 잘 끊어 주는 곳이 있어서 부탁해 보려고요.
천성헌은 이번 복수를 시행한 계기가 된 인물이 호의호식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천성헌은 새어머니의 계획을 알자마자 기민하게 움직였다.
천성헌은 제 이복형을 ‘호텔’이 아니라 다른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사회에 나오면 곤란한 사람들을 돈을 받고 수용하는 곳으로.
중간에 병원명이 바뀐 걸 모르는 채로 새어머니는 돈을 주고 제 아들을 지옥에 처박았다.
이복형은 통신 기기를 모두 빼앗긴 채 구속복 차림으로 정신 병동에 처박혔는데, 새어머니는 그것도 모르고 아들을 지켰다며 뿌듯해했다.
―그 아이는 잘 들어갔소?
―네, 거기가 기자들이나 경찰들도 가기 좀 어려운 곳에 있더라고요. 당분간 연락은 어렵다네요.
아마 연락이 가능할 때쯤엔 이 집이 완전히 망해서 아들을 빼낼 여력이 없을 텐데.
아니, 그들은 구치소나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테니 집안의 여력과는 상관없나?
그리고 천성헌이 복수를 다짐한 지 1년 후.
유일하게 모든 의혹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천성헌에 관한 관심이 식을 때쯤, 천성헌은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후 집에서 빠져나왔다.
천성헌의 집안사람들은 모두 수감된 상태라 잡을 사람도 없었다.
경영권을 잡게 된 먼 친척은 천성헌이 떠난다니 오히려 기뻐했다.
재벌가 소속이 아니게 된 천성헌이 향한 곳은 어느 고시원이었다.
―……성헌아, 여기에서 뭐 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온 조의신이 고시원 카운터에 앉아 있는 천성헌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성헌은 오랜만에 마음에서 우러난 얼굴로 웃으며 답했다.
―의신이 형, 오늘부터 여기에서 총무로 일하게 됐어요. 잘 부탁드려요.
조의신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천성헌을 여전히 후배로 대해 줬다.
당장이라도 조의신을 고시원 밖으로 데려가고 싶었으나, 그가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는 고시원 총무로서 그를 돌보기로 했다.
‘이제 형도 취직하겠지. 고시원도 나갈 거고…… 그때 나도 그만둬야지.’
이제 조의신의 취직을 방해하는 이들이 없다.
조의신을 내보내라며 집주인을 협박하는 용역 업체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의신은 어느 날부터 방에 틀어박혔다.
‘……무슨 일이 있었나? 의신이 형이 1년 공백기가 있어서 떨어진 건가. 어디 인사팀이길래 의신이 형을 떨어뜨려? 다들 보는 눈이 썩은 게 아닌가?’
천성헌의 걱정과 달리 그의 이복형의 압박이 사라지자 조의신은 무사히 취직에 성공했다.
천성헌은 조의신이 채용 건강 검진 서류를 떼다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간 바쁘고 힘들게 지내셨으니 쉴 때도 있어야지. 휴학 중에도 계속 일하셨다고 하니까, 취직 전에 한 번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천성헌은 조의신이 그저 낙방의 아픔이 컸을 거라고 여기며 간식이나 기침약을 넘기며 그를 간접적으로 위로했다.
그런데도 조의신은 천성헌을 먼저 걱정했다.
―졸업 아직 안 했지. 복학은 언제 할 거야? 교수님이 나한테도 네 안부 묻던데.
천성헌은 마지막 학기에 입학 비리 논란에 휩싸여 휴학하게 되었다.
의혹이 완전히 풀려 그의 지도 교수도 천성헌이 복학할 것을 권하고 있었는데, 조의신도 넌지시 복학을 추천했다.
또 조의신은 고시원 총무가 아닌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했다.
―이거 예전 제자가 과외 자리를 소개해 줬는데, 할래?
―형은 안 하세요?
―……난 취업 준비로 바빠서.
조의신이 소개한 과외 아르바이트에서 받는 금액은 고시원 총무의 월급보다 훨씬 컸다.
조의신은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고시원 총무를 그만두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천성헌은 점점 불안해졌다.
‘……요새 기침이 잦아졌는데 병원에 데려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형이 어딘가 좀 이상한데.’
천성헌은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엔 온갖 가설과 의심이 솟았으나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플마고의 최종장이 업데이트되었다.
‘의신이 형을 방해하면 안 되는데…….’
플마고를 오랜 기간 플레이해 온 광팬 조의신을 방해할 수 없어 말을 걸지 못했는데, 이상하게 계속 마음이 불안했다.
조의신의 방 근처를 몇 번이나 청소하며 맴돌 때였다.
―켁, 웩, 콜록, 켁…….
얇은 문 너머로 조의신이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에는 몇 번 기침을 하다 마는데, 유독 길었다.
천성헌은 고민 끝에 노크했다.
“의신이 형, 저 성헌인데요. 괜찮으세요?”
―큽, 쿨럭, 쿨럭, 웩, 커억!
대답 대신 더 심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천성헌은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형, 문 열어요!”
급하게 따고 들어간 문 안은 빛으로 가득했다.
빛이 잦아든 후, 좁은 방에 스마트폰, 메모가 가득한 파일철이 피투성이가 된 침대 위에 널려 있는 게 보였다.
그러나 조의신의 모습은 없었다.
망연한 얼굴로 방안을 둘러보는 천성헌의 눈에 하얀 봉투가 들어왔다.
‘이건…….’
봉투 위에는 천성헌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 내용물은 유서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