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39화 (338/925)

55. 스테일메이트리스 (9)

천동하의 동생, 천은하.

천성헌의 이 세계에서의 이름 석 자 중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은’이라는 글자였다.

‘은’의 의미는 여러 개지만 황지호가 설명한 유래에 의하면 천은하의 이름에 쓰인 글자의 뜻은 ‘은 은(銀)’일 것이다.

초상우주가 힌트로 가리킨 은휘관과 엮어 생각하니 더 신경 쓰였다.

그 이름 자체도 그렇고 유래를 생각하면 또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천동하는 저렇게 우수한데도 손이 귀한 집안에서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동(銅) 취급을 받는 건가.’

잠시 뜸을 들이던 황지호의 말이 계속되었다.

“천동하가 천은하의 존재를 인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황명 연구소로 찾아왔다. 황명 연구소를 택한 이유는 두 가지겠지. 천은하가 보이는 증상이 황명 연구소에서 연구하는 주제와 관련이 있었고 또 천씨 집안과 황명 그룹은 연이 있으니까.”

황명 그룹과 연이 있는 천씨 집안이라는 말에 예전에 황지호가 한 말이 떠올랐다.

―T와 C의 이혼 사건에서 C 쪽에 힘을 실어 줬지.

―천씨 파벌이 이혼 사건 때 우리 쪽에 신세를 많이 졌지. ……우리의 힘과 천씨의 힘을 모두 이용할 수 있으니 TC 내부 정보를 얻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도천 그룹의 창립자 부부, T와 C의 이혼 사건은 단순한 재벌가의 이혼 소송에 그치지 않아 연일 화제를 모았다.

한때 손을 잡았던 두 재벌 가문의 대결이라는 점에선 이 이혼 사건이 ‘주오의 난’과 유사하긴 했으나 명백한 차이점이 존재했다.

주오의 난은 주오의 주도권을 누가 잡을 것이냐가 문제였고, T와 C의 이혼 사건은 어떤 식으로 기업과 자산이 쪼개질 것인가가 주요 안건이었다.

즉, 주오의 난이 끝나도 주오의 주가가 바닥을 치든 주주의 멘탈이 박살 나든 말든 그룹 자체가 분리될 일은 없던 것과 달리 T와 C의 이혼 소송은 그룹이 갈라질 것을 전제로 시작된 싸움이었다.

주오의 난보다 더 과격한 양상으로 이 사건은 당대 최고의 재벌 가문인 도씨와 천씨의 정면 대결로 번지는 바람에 파생 사건이 우수수 쏟아져 기삿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혼 소송이 끝난 후, TC 그룹의 총수는 도씨가 됐으나 압도적으로 불리한 입장이던 천씨가 서울 주요 도심부에 있는 부동산을 비롯한 재산의 상당량과 핵심 계열사 몇 개를 가져오는 데에 성공했다.

‘아마 천씨의 패배 쪽으로 기울어졌을 때 황지호가 개입한 걸 거야.’

황지호 입장에서 생각하면 ‘도천’이라는 이름을 기껍게 여기지 못했을 테다.

그러니 두 집안이 서로에게 칼을 휘두르는 걸 지켜보다 패색이 짙은 쪽에 손을 내밀어 원하는 바를 이뤘을 것이다.

그게 천씨였고, 천동하네 집안인 것 같다.

‘희귀 성씨라서 설마 했는데, 이 시점에 이 사건을 언급한다는 건 그 천씨가 천동하의 집안이기 때문이겠지.

내 예상이 맞는지 황지호가 한마디 덧붙였다.

“TC 그룹의 T와 C의 이혼 사건에 내가 개입했다고 네게 말했지.”

“기억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황지호가 마치 내게 확신을 주려는 것처럼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즉, 천은하는 내 승인을 받아 황명 연구소의 비호 아래에 있는 셈이다. 그러니 편히 말해도 된다.”

황지호가 천동하의 비설을 줄줄 읊은 이유는 그것 때문인 모양이다.

이 눈치 빠른 노친네는 내가 천성헌을 걱정하고 있다는 점과 저번에 말한 ‘성헌’이 천은하와 동일 인물이라는 점을 짐작했을 거다.

‘눈앞에서 성헌이의 이름을 몇 번 말했으니 어쩔 수 없지.’

황지호가 천성헌과 천은하의 관계성을 알아챘다는 신호를 대놓고 보내도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황지호를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다.

천성헌이나 내 정체는 이 세계에선 아주 이질적인 것이다.

이 큰 비밀을 천성헌의 동의 없이, 그것도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밝혀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그러나 생각을 거듭할수록 ‘말해야 한다’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천성헌이 이 위험한 세계에 무방비한 상태로 떨어졌는데, 그가 의지할 곳은 플마고 시나리오상 내년에 죽을 위기에 처하는 이복형 천동하 하나뿐이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수를 둬도 매번 부상자가 나왔는데, 내가 더 큰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호족과 성헌이 사이에 연을 대 놓고 싶어. 나나 천동하한테 무슨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거기까지 생각하니 망설임이 사라졌다.

“맞아.”

그 뒤로는 한참 말이 없었다.

적호와 김신록은 무슨 일인지 캐묻는 대신 나와 황지호를 번갈아 보며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하려 애쓰는 것 같았고, 백호군은 평소처럼 침묵했다.

황지호는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

더 질문을 할 줄 알았는데 황지호는 천성헌에 관해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에 속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은호의 이야기를 해 볼까. 마침 은호의 후예들이 조리를 마친 것 같으니, 산령이 시식한 후에 이야기를 하면 될 것 같군.”

그 말에 산령이 기겁을 하며 도망치려 했으나 백호군의 손에 붙잡혔다.

“죄송해요! 만들고 보니 1인분밖에 안 남았어요.”

“의신이 오빠 온다고 해서 열심히 했는데…….”

“재료는 넉넉히 준비했는데 자꾸 실패해서…… 먹을 만한 건 1인분이에요.”

때마침 은호의 후예들이 풀 죽은 얼굴로 거실에 등장했다.

은호의 후예들이 만든 건 김치볶음밥이었는데, 쌀밥을 썼는데도 마치 흑미밥으로 조리한 듯한 비주얼이었다.

그릇에 담긴 물질을 보니 먹을 만하지도 않은 실패작은 과연 어떻길래 저런 말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황지호는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으며 은호의 후예들을 달래고 산령에게 모든 걸 떠넘겼다.

“괘념치 말거라. 우리를 위해 준비해 준 것만으로도 기쁘다. 오늘은 너희들이 제안한 대로 산령에게 시식을 시키는 게 어떻겠느냐. 우리는 다음 기회에 먹으마.”

“네! 산령아, 이리 와!”

“네에! 빨리 은호 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산령이 내 쪽을 보며 손바닥을 비비는 시늉을 했다.

도움을 청하는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백호군이 산령을 차갑게 보는 걸 보니 그사이에 사고를 쳐서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곤란하게 만든 듯했기 때문이다.

“그럼 이야기에 어울리는 차를 새로 달이마.”

그렇게 말하며 황지호가 내민 차는 백차 중에서 제일로 치는 백호은침(白毫銀針), ‘Silver Needle Tea’라고도 불리며 표면에 은빛의 광택을 띠는 차였다.

“우리 중에 은호를 가장 잘 아는 건 백호일 거다. 형제지간이니 둘 사이에 묻어 둔 이야기도 많겠지. 하지만 너희도 알다시피 백호는 좋은 화자가 아니다. 그러니 내가 말하는 게 나을 거다.”

은호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좋은데 왜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까는 거지?

불만스럽긴 했으나 내가 뭐라 하기 전에 올무가 대신 온몸의 털과 꼬리를 세워 불만을 표해 줬다.

“하하하! 봐라, 이렇게 도발해도 백호는 입을 안 열지 않느냐. 진명을 잃기 전에는 그래도 걸린 시비는 받아치는 녀석이었는데, 재미가 없어졌어.”

황지호가 신나게 처웃었지만, 백호군은 황지호를 무시하며 백호은침을 한 모금 마셨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대련장이었다.”

“……그때 일은 저도 기억납니다. 저도 황호와 함께 있었죠.”

“그땐 너도 이렇게 정중한 말투를 쓰는 놈이 아니었지.”

황지호가 그리운 눈을 하면서도 처웃는 신기를 선보였다.

적호는 겸연쩍어하는 얼굴을 하며 김신록을 곁눈질로 봤다.

옛날에 험한 말을 쓰던 게 딱히 창피하지는 않아도 아들 앞에서 흑역사가 언급되는 건 좀 그런 모양이다.

“나는 그 시대 최고의 무재라는 백호와의 대련을 앞두고 상당히 들떠 있었지.”

“네, 예나 지금이나 황호는 흥미로운 일에 사족을 못 썼죠.”

황지호는 옛날에도 그 성격 그대로였는지 적호가 한마디 덧붙였다.

황지호는 반박하는 대신 한 번 씨익 웃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 백호와 싸우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황호 님이 그냥 넘어가시다니!”

“둘 중 누가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떨어진 건가요?”

산령에게 시식을 하게 하고 소감을 듣고 온 은호의 후예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황지호는 약간 미묘한 얼굴을 했다.

처웃는 걸 중단한 게 황지호에게 있어 좋은 일이 일어난 건 아니었나 보다.

“그때 우승한 건 백호였다. 적호는 백호와 싸웠지만 나는 백호와 싸우지 못했어.”

황지호가 모호한 말로 돌려 말하긴 했지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황지호는 백호와 싸우기 전에 누군가에게 진 것이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 황지호를 이기며 등장할 만한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설마, 너를 이긴 건…….”

내가 말을 다 하기 전에 황지호가 자진 신고했다.

“그래, 나를 이긴 건 은호였다.”

황지호의 말에 은호의 후예들이 환성을 터뜨렸다.

이 얘기는 은호의 후예들도 처음 듣는 듯했다.

“와! 은호 님이 황호 님을요?”

“잠깐, 우승은 백호 님이 하셨다고 하니까 백호 님은 은호 님을 이긴 거네요?”

“그럼 백호 님, 은호 님, 황호 님 순서로 강한 건가요?”

은호의 후예들이 뼈를 때리는 소리를 했다.

그렇지만 논리적으로 저 순서는 맞아떨어질 것이다.

황지호가 이 말에 변명이나 반박을 하기 전에 백호군과 적호가 한마디씩 거들었다.

“은호는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황호의 성정을 읽고 꾀를 내어 대련에 정해진 규칙대로 승리를 거둔 거지.”

“그때 황호의 표정이나 한 짓은 참 볼만했지요. 은호에게 재대련하자며 끈질기게 청하다가 백호가 나타나니 백호에게 대련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황지호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황지호가 내 디바이스를 추적하고 메시지를 날려 대며 이것저것을 권하는 꼴이 옛 모습이랑 똑같았다.

굳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은 늙어서 그런지 아주 조금 점잖아졌다는 점 정도일 거다.

“그럼 그날 황호 님과 백호 님이 추가로 대련했나요?”

“아뇨, 그 전에 은호를 귀찮게 굴지 말라며 청호가 손을 봐 줬죠. 황호는 그날 청호의 태호권에 또 졌습니다. 아직 그 태호권은 창안한 직후라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말이죠.”

청호는 황지호나 적호를 만나기 전에 이미 백호군과 은호와 아는 사이였나 보다.

‘그럼 청호와 신인은 언제 만난 걸까? 이 시점엔 이미 만난 걸까? 아니면 아직일까?’

궁금했긴 했지만 대화의 흐름상 묻기 어려웠고 노친네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듣다 보면 궁금증이 해결될 것 같으니 입 다물고 듣기로 했다.

무엇보다 적호가 황지호를 팩트로 두들겨 대는 게 속 시원해서 지켜보는 맛이 있었다.

가만히 듣던 황지호가 적호의 말에 반박했다.

“난 물리 공격은 특기가 아니다. 그때에는 규칙상 오로지 체술만 쓸 수 있기에 이 몸이 불리했지.”

“황호는 그걸 알면서도 자신만만하게 나서지 않았습니까? 몸 쓰는 건 특기가 아니지만 저들 정도는 제압할 수 있다고 했지요.”

“…….”

반박은 순식간에 재반박당하며 끝났다.

“……그래, 나는 그날 청호에게 태호권으로 지고, 또 은호에게 완패했다. 은호의 전략은 굉장했지.”

황지호의 얼굴에 분한 마음은 묻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호에게 존경심을 품을 만큼 완벽한 승리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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