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40화 (339/925)

55. 스테일메이트리스 (10)

신화와 신비가 인간의 문명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던 시대.

인간의 탄생 이후 신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계에 개입했는데, 그 영향인지 인간계에는 신도 인간도 짐승도 아닌 존재들이 탄생했다.

한반도의 경우, 천신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호랑이와 곰, 인간을 닮은 호족과 웅족이 있었다.

이들은 처음 저 자신과 서로의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천신은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개입하였는데, 이들을 모을 구실로 ‘대련’을 들었다.

그 결과 천신의 목소리에 따라 호족은 호족끼리, 웅족은 웅족끼리 모여 대련을 하고 서로를 온전히 인식하게 되었다.

“적호, 너도 천신의 목소리를 들었나? 날이 열 번 바뀐 후에 우리와 같은 존재를 모아 대련을 한다더군. 대련을 하지 않더라도 참관할 것을 권했다.”

“들었는데 뭐 어쩌라고.”

“하하하!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너도 천신께서 주선하는 대련에 나갈 생각인가 보군.”

황호의 경우, 호족 중에서 적호를 가장 먼저 만나 친하게 되었다.

황호가 귀찮게 말을 걸고 적호가 험한 말로 대충 응수하는 게 그들의 교류의 형태라 딱히 겉보기엔 친해 보이지 않긴 했다.

그래도 적호는 황호가 찾아오는 수련 장소를 굳이 바꾸지 않았고, 꼬박꼬박 답변도 해 줬다.

“이번 대련은 호족끼리 모여서 한다는데, 아쉽게 됐어. 소문에 따르면 웅족에도 제법 해볼 만한 놈들이 많을 텐데.”

“웅족 따윈 관심 없다.”

“하하하! 그럼 호족 쪽은 어떻지? 호족 제일의 무재는 서산(西山)의 백호라고 하는데.”

호족 제일의 무재 백호에 관한 소문은 아직 무리 짓지 않은 호족 사이에서도 널리 돌았다.

산천에 넘쳐 나는 산령, 천령(川靈)은 수다 떨기를 좋아하고 개구져 신기한 것을 발견하면 한달음에 지축을 달려 널리 소문을 알리곤 했다.

호족들을 관찰한 산령과 천령들은 호족 중 최고의 무재를 백호로 꼽아 이를 떠벌리고 다녔다.

황호와 적호는 이 소문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의 무위가 백호에게 밀린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적호는 아주 격렬히 반응했다.

“꼬우니까 싸울 거다.”

“하하하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적호의 호전적인 말에 황호가 처웃었다.

적호는 남의 일처럼 말하는 황호도 곱게 보이지 않아 시비조로 말했다.

“너도 아니꼽게 여기지 않았나?”

“물론이지. 마음에 들지 않아. 이 몸은 몸을 쓰는 게 특기는 아니지만, 결코 약하지 않은데.”

황호는 구름 너머 서산이 있는 위치를 가만히 노려보며 말했다.

황호는 타고나길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체내와 자연의 기(氣)를 다루는 것에 능숙했다.

그러나 이번에 천신이 주관하는 대련에서 기를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천신께서는 이 땅의 기운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에 체술로만 싸우라고 하셨지.”

“안 될 것 같으면 싸우지 말고 꺼져.”

적호의 험한 말에서 희미하게 황호를 염려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황호는 그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 몸은 몸 쓰는 건 특기가 아니지만, 저들 정도는 제압할 수 있다.”

황호는 적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결승에서 만나자, 적호.”

“……그러든지.”

물론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백호와 은호는 황호와 적호로부터 완승했고, 그들이 결승까지 올라간 일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들은 백호와 은호를 만날 때까지 자신들이 호족 중에서 가장 강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많이도 왔네.”

“산령과 천령이 한반도 밖까지 소문을 낸 것 같더군. 처음 보는 존재들이 많아. 아, 저건 누군지 안다. 웅족에서도 꽤 몰려왔군.”

열흘 뒤,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

천신이 호족들을 모으기 위해 대련을 주관했다는 소식에 이 땅에 강림해 있는 신부터 이 땅의 기운을 받아 탄생한 산령과 천령, 또 후일 진족이라 칭해질 존재들까지 몰려왔다.

이 중에서도 무리 지어 온 존재들이 눈에 띄었는데, 이들은 웅족이었다.

호족보다 앞서 대련을 치른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가까워진 상태였다.

“웅족? 저들은 따로 대련한다 하지 않았나? 왜 여기에 온 거지?”

적호는 웅족이 있는 쪽을 쳐다도 보지 않으며 건성으로 답했다.

“적호, 넌 정말 관심이 없는 일에 기억력과 머리를 낭비하지 않는군. 웅족들은 어제 대련을 끝냈다.”

“내가 알 바 아니다.”

적호는 웅족을 무시하고 호족 최고의 무재라는 백호의 존재를 찾았으나, 대련이 시작될 때까지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백발에 장신이라 했으니 눈에 안 띌 리가 없는데 찾기 힘들군.”

“바닥이 드러날까 봐 꽁무니를 뺀 건지도 모른다.”

“하하하하! 그러면 실망인데.”

그들이 백호를 만난 건 대련이 시작된 직후였다.

대련 순서와 상대는 무작위로 정해졌는데, 첫 대련은 적호와 백호가 하게 되었다.

백호와 적호가 호명되자 장내가 들끓었다.

최고의 무재는 백호라 알려져 있었으나 적호 역시 그럭저럭 입소문을 탄 상태라 관중들의 기대가 컸다.

사실 험한 말버릇과 성격이 소문의 주 내용이긴 했으나 어쨌든 그도 강자로 꼽히긴 했다.

황호는 적호가 신이 나서 뛰쳐나가는 걸 보고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백호와 싸워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군.’

곧 서늘한 산 공기 사이로 백발의 청년이 등장했다.

싸늘한 시선을 정면으로 보니 공기가 더 차가워진 것 같았다.

백호는 정교하게 깎은 나무 검을 들고 있었는데, 난각(卵殼) 기법을 사용해 색을 입히고 마감한 것인지 표면이 새하얬다.

하얀 범이 순백의 목도를 들고 서 있는 장면은 그림이 되었다.

‘저게 백호로군. 손에 들고 있는 건 목검인가? 대련용으로 준비했나 보군. 그 동생이 만들어 준 건가?’

백호는 탄생한 순간부터 저와 비슷한 색의 머리를 한 이와 함께 있었는데, 서로 호형호제하여 형제처럼 지낸다고 들었다.

아마 저 순백의 목도는 손재주가 좋다고 이름난 동생이 만들어 줬다는 게 분명했다.

모두가 백호와 적호를 보며 웅성일 때, 하늘에서 빛이 내려왔다.

천신이 대지에 내린 대련 신호였는데, 이를 보고 백호가 목검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올렸다.

파앗!

빛의 구체가 백호를 향해 깜빡였다.

백호의 발언을 허락하는 신호 같았다.

곧 백호가 온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동생은 무익한 싸움을 원치 않는다. 이 자리를 파하는 것을 제안한다.”

백호의 발언에 야유가 쏟아졌다.

호족들의 대결을 기대하고 온 호사가들이 산발적으로 기를 뿜어 대고 무기를 드는 등 흥분한 태도를 보였다.

백호는 장내의 분위기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지 제 할 말을 했다.

“천신께서는 호족을 한 자리에 모으기 위해 이런 제안을 하셨다. 그 목표는 이미 달성되지 않았는가.”

빛의 구체가 적호를 향했다.

적호의 의사를 묻는 듯했다.

적호는 빛의 구체를 쳐다도 보지 않고 백호를 향해 외쳤다.

“쫄리면 그냥 졌다, 나는 패배자다라고 외치고 꺼져.”

와아아아!

적호의 도발에 흥분한 관중들이 박수를 보냈다.

내심 적호도 꼬리를 내리고 물러나지 않을까 걱정했던 이들이 신나서 적호의 이름을 연호했다.

백호는 관객석 저편을 바라보았다.

시선 끝 관객석에는 청발의 여성과 은발의 남성이 있었다.

그쪽에서 어떤 신호를 보낸 것 같았으나 백호는 완강히 고개를 한 번 저으며 말했다.

“제안을 철회한다. 전력을 다해 싸우지.”

백호는 겉보기와 달리 그리 냉정한 성정은 아니었는지, 타오르는 것 같은 눈으로 적호를 노려봤다.

백호가 하얀 목검을 적호를 향해 겨누자, 적호는 기다렸다는 듯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곧 천신이 내린 빛의 구체도 두 호랑이의 의견을 받아들여 대련 시작을 선언했다.

파아아아……!

빛이 크게 점멸해 장내를 한 번 뒤덮었다.

휙!

동시에 백호의 신영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오로지 발심으로 도약했는데, 도약과 동시에 흙먼지 구름이 일만큼 강력하게 땅을 찼다.

황호를 비롯한 관객들이 백호의 모습을 쫓기 위해선 목이 꺾일 만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해야 했다.

놀라운 신위에 모두 찬사를 보냈으나 황호는 내심 회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약력은 나쁘지 않은데, 무슨 생각이지? 허공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할 테니 불리할 것 같군.’

적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코웃음을 치는 게 보였다.

적호는 느긋하게 상대의 움직임을 피하고 어떻게 반격할지 수를 짜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문제없이 적호와 결승에서 만나겠군. 그건 그것대로 재밌겠지만 뭔가 시시한데…….’

그렇게 생각했을 때, 백호가 높게 검을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바람에 걷어 올라간 백호의 손에 힘줄이 솟는 걸 보고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범상치 않은 검의 움직임을 본 황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적호, 피해라!”

관중의 환성 속에서 적호가 황호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적호도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간다고 느꼈는지 반사적으로 백호의 착지 지점에서 최대한 멀리 몸을 날렸다.

황호의 경고가 끝난 것과 거의 동시에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백호가 날린 검압과 지면이 맞닿아 폭음을 토해 냈다.

콰콰콰콰!

땅이 갈라지고 터지는 소리가 대련장을 뒤덮었다.

허공에서 땅을 향해 백호가 날린 일격의 여파가 대련장을 파괴한 것이다.

‘저 멀리서, 기(氣)를 날린 것도 아닌데 어떻게 목검으로 저런 위력이 나오는 거지……!’

모두가 경악하고 있던 사이, 백호가 지면에 착지했다.

그리 높이 도약한 게 거짓말인 것처럼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발을 디딜 곳은 폭파하지 않았는지 그가 서 있는 자리는 검격에 닿지 않은 온전한 모습이었다.

이를 본 황호는 그의 노림수를 알아챘다.

‘허공으로 무방비하게 저를 드러내 방심하게 한 건 함정이었군……!’

일견 무식한 광역기로 보였던 그 검격은 적호를 미리 정해 둔 지점으로 몰기 위한 수였다.

황호의 예상대로 과연 백호는 적호가 도망친 위치를 눈으로 좇기 전에 손부터 움직였다.

보통 상대를 일격에 쓰러뜨릴 법한 큰 기술에는 준비 시간이 필요한 법.

백호는 상대의 위치를 몰아가는 것으로 그 시간을 단축시켰다.

큰 기술을 쓰기 위해 자세를 가다듬은 백호가 다시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쐐애애액!

백호의 하얀 검이 공기를 찢고 적호를 향해 몰아쳤다.

엉망이 된 대련장 바닥에서 적호가 어디로 움직일지 정확히 예측한 백호는 한 치 어긋남 없이 검을 휘둘렀다.

적호는 그에 반해 몸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로 발을 들어 간신히 목검의 궤도를 바꾸고, 몸을 틀어 피했으나 자세가 엉성해 점점 무너져 내렸다.

이미 적호의 패색은 완연했으나 그럼에도 버티는 건 적호가 그만큼 튼튼하고 무에 나름의 소양이 있던 덕이었다.

그러나 결국 무너진 바닥에 발을 잘못 디뎌 땅 위로 고꾸라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순백의 목검이 적호의 목을 꿰뚫을 기세로 찔러졌을 때였다.

파아아!

천신이 내린 빛이 백호에게 쏟아졌다.

백호는 천신이 제지할 것을 알았는지 입꼬리를 조금 올리곤 손을 멈췄다.

파아아아……!

곧 흰 나무 검을 든 백발의 청년의 머리 위로 빛이 쏟아졌다.

천신이 백호의 승리를 선언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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