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스테일메이트리스 (11)
천신의 승리 선언에 장내가 들끓었다.
와아아아!
산이 갈라질 기세로 함성 소리가 울렸다.
목도 하나로 선보인 압도적인 백호의 무위를 두고 관중들의 찬사가 끊이질 않았다.
“저게 그 명성이 자자한 서산의 백호인가……!”
“목검이 거의 보이지도 않았어!”
“적호도 실력이 만만치 않다고 들었는데, 아쉽게 되었군.”
“입이 험한 값을 한다는 게 어떤 건지 보고 싶었는데.”
“그래도 제법 오래 버티지 않았나?”
“잠깐, 지금 저기에 있는 건…….”
백호와 적호의 대련을 두고 이야기꽃을 피우던 몇몇 관객들의 시선이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밤처럼 어둡고 긴 머리카락의 남성과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한 머리카락과 눈을 한 여성이 있었다.
이들은 후일 백호와 함께 사수(四獸)로 추앙받는 현무와 주작이었다.
이 시기에 현무와 주작은 이미 대륙에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백호에게 관심을 표하자 모두 놀라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무는 긴 소매를 펄럭이며 백호의 검술을 따라하다 들뜬 목소리로 주작에게 말을 걸었다.
“저 힘은 흥미롭네. 친하게 지내고 싶어.”
“나쁘지 않군. 아니, 꽤 괜찮군. 말을 걸러 갈까?”
“음…… 지금 말 거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닐 것 같아.”
현무가 온화한 시선으로 백호를 바라봤다.
시선 너머의 백호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은발, 청발의 범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가만히 백호를 응시하는 현무의 눈에서 정순한 기가 맴돌았는데, 주작은 지금 현무가 미래를 예지하는 눈을 통해 백호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현무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그의 눈에서 예지의 기가 사라진 후였다.
“다음에 기회가 있을 테니, 지금은 호족과 시간을 보내게 하자.”
“그게 네 예지인가?”
“비슷해.”
“……알았어.”
현무의 말에 주작이 아쉬워하면서도 지혜와 예지의 현무를 믿고 얌전히 물러나기로 했다.
한편, 마침 근처에 있던 황호가 현무의 예지를 듣긴 했으나 그들처럼 물러서지는 않았다.
‘이 몸은 저들과 달리 호족이니 지금 말을 거는 게 그리 좋지 않은 선택이라는 예지와는 상관이 없겠지. 적호에게 가는 대신 백호를 따라가 볼까.’
막 패배한 적호를 달래 준답시고 말을 걸어 봤자 적호의 속만 뒤집힐 게 뻔했다.
차라리 백호와 말을 나눠 그의 성정을 파악해 승률을 올리는 게 오히려 적호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사실 적호를 위하고 말고를 떠나 백호에게 흥미가 생겨 관찰해 보고 싶었기에 백호를 쫓기로 했다.
‘적호, 내가 너 대신 결승에 올라 백호를 상대하마. 그러니 패배의 고통은 우선 혼자 견뎌다오.’
대진표를 고려해 보면 백호를 만나는 건 결승이 되어야 했으나, 황호의 머릿속에선 자신이 결승에 올라간다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황호가 거나하게 김칫국을 들이켜며 기척을 죽여 한참 백호를 따라갔을 때였다.
점점 백호의 얼굴이 어딘가 이상해졌다.
‘계속 짓던 무표정이라고 하기엔 뭔가 다른데. 좀 기운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군.’
백호가 뒤에서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으리라 생각진 않았지만 기가 죽은 듯한 얼굴을 하리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굳이 그 표정을 읽어 본다면 속은 후련하지만 조금은 후회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동생이 싸움을 원치 않는다고 했지. 저게 그 동생인가?’
황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백호의 앞에서 걷는 은발의 청년을 지켜봤다.
훤칠한 은발의 청년은 온화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황호의 느낌상 그 옆에 있는 청발의 여성이나 백호에 비하면 다소 유약해 보였다.
강함의 개념은 상대적이기에 두 강자 사이에 은발의 청년이 있으니 약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백호도 그렇지만 저 청발도 만만치 않다. 저 둘 사이에 서 있으니 아주 약해 보이는군. 1 대 1로 마주쳤다면 저렇게까지 약해 보이진 않았을 텐데.’
관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완전히 멀어진 후에야 드디어 은발의 청년이 발걸음을 멈췄다.
은발의 청년이 몸을 돌려 백호에게 말을 걸었는데, 부드러운 어조였으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축하해.”
은발의 청년에 이어 청발의 여성도 축하 인사를 보냈다.
백호는 조금 주저하다 입을 열어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맙다, 은호, 청호.”
고맙다는 말에 청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한숨을 한 번 쉰 청호는 은호를 바라봤다.
청호가 쳐다보자 은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여전히 미소를 띤 채로 부드럽게 물었다.
“이겨서 기쁘신가요?”
“…….”
백호가 눈썹을 조금 내리고 입을 다물었다.
은호는 백호의 대답을 조금 기다리다가 그가 침묵한 것을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방금 형님께서 하신 승리가 달갑지 않아요. 제가 그 목검을 만들어 선물해 드린 이유를 잊으셨습니까?”
백호가 들고 있는 하얀 목검의 흰 칠이 여기저기 벗겨져 있었다.
순백의 목도는 백호의 힘을 견딜 만큼 견고하지 못한 듯했다.
힘 조절을 해 목도가 부러지는 일은 겨우 면했으나, 얇게 입힌 칠은 그렇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검을 휘두르면 흰 칠이 벗겨지는 구조인 듯하군. 일부러 저렇게 만들었나?’
놀라운 무위를 선보인 백호의 손에 들려 있으니 그럴싸해 보이긴 했지만, 목검 자체는 볼썽사납고 초라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백호는 변명조로 입을 열었다.
“건방진 말을 듣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백호의 변명을 듣고도 은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할 말을 했다.
“상대가 황호 님이나 적호 님이면 어떤 식으로든 도발해 올 거라고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어찌하여 동생의 당부를 잊고 그리 행동하신 건가요?”
“…….”
갑자기 제 이름이 나와 황호가 놀랐으나 겉으로 나타내 기척을 드러내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마치 은호는 황호와 적호에 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백호의 상대가 되었다면 나도 어떤 식으로든 도발했겠지. 그런데 한 번도 안 본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아는 거지? 뭐, 입 싼 산령이나 천령이 이 몸에 대해 떠들었을 게 분명하겠지만.’
황호는 자신과 적호의 행동에 대해 예측하고 저 잘난 백호를 통제하는 은호에 대해 흥미를 가졌다.
황호는 눈을 반짝이며 은호를 계속 관찰했다.
“대련을 시작하기 전, 저와 청호 님 쪽을 한 번 보셨죠. 저와 청호 님의 얼굴을 보고도 대련을 하고 싶으셨나요?”
그 말에 백호의 변명이 다시 이어졌다.
“나와 달리 청호는 싸워도 좋다고 했지. 청호도 싸울 예정이니 나도 싸워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청호 님이 고안하신 태호권은 아직 형태가 갖춰지지 않았죠. 그렇기에 다소 외부에 드러난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갓난아이가 발걸음을 떼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해서 그 아이가 장차 활을 쏠지 검을 휘두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은호의 물처럼 흐르는 듯한 말이 백호의 변명을 분쇄했다.
백호는 반박하지 못하고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은호는 말을 몇 마디 덧붙여 제 주장을 더욱 공고히 했다.
“청호 님은 함께 태호권을 발전시킬 동료가 필요해요. 대련을 통해 청호 님의 태호권이 품은 가능성을 보고 함께할 이들이 늘면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니 청호 님과 형님의 입장은 달라요.”
“……미안하다.”
결국 백호가 은호에게 사과하였다.
은호는 백호의 목소리나 표정에서 반성의 기색이 묻어나는 걸 확인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드러난 것은 어쩔 수 없지요. 오히려 갑자기 발톱을 숨기는 건 어색해 보일 거예요. 다음 경기부터는 싸우시되 적호 님을 상대한 것 이상의 무위를 보여서는 아니 됩니다.”
“알았다.”
“그 목검이 부수어질 만한 힘을 보이시면 즉각 대련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은 지켜 주세요.”
“……알았다.”
목검이 부수어질 정도?
저 하얀 목검은 일정 수준의 힘은 아예 견디지 못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 듯했다.
‘적호를 상대로 힘 조절을 해 이긴 건가?’
대화의 맥락에서 그 사실을 파악한 황호가 경악했다.
황호의 경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형님께 제 말씀을 전하는 건 끝났으니 이제 황호 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저는 일방적으로 말을 하는 것보다는 얼굴을 보고 말을 나누는 걸 좋아해요.”
은호는 황호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황호는 더 몸을 숨길 이유도 없고, 또 직접 저들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에 냉큼 나무에서 뛰어내려 모습을 드러냈다.
휙!
“하하하하! 어떻게 이 몸이 있는 걸 알았지?”
신나게 처웃으며 뻔뻔하게 등장한 황호를 두고 청호가 질린 얼굴을 했다.
눈을 빛내며 묻는 황호를 두고 은호는 정중히 말했다.
“황호 님은 흥미가 있는 존재에는 사족을 못 쓰지 않나요? 그러니 서산에도 형님을 보러 몇 번이나 찾아오셨죠. 적호 님을 꺾은 형님을 관찰하고자 여기에 오시리라 생각했어요.”
“그렇군! 그러면 왜 나를 쫓아내지 않고 내버려 둔 거지? 비밀 얘기를 하는 중 아니었나?”
“황호 님께서는 호족의 일원이시니까요.”
“내가 호족이라는 게 중요한가? 그게 백호가 힘을 아끼는 것과 관계가 있나 보군.”
“네, 그렇습니다.”
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은호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부드러운데도 그 내용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언젠가 호족은 이 땅에서 전쟁을 치르게 될 거예요. 그때를 대비해 전력을 외부에 드러내는 건 삼가고 싶어요.”
호족, 전쟁.
두 단어를 들은 황호는 말문이 턱 막혔다.
천신이 주관한 대련장에서 막 호족들이 만나 무리를 지으려 할 때, 전쟁에 관해 생각하는 이가 있다니.
황호는 저도 모르게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 땅은 윤택하지 못합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척박합니다. 그에 반해 이 땅에서 생명을 얻는 존재는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땅을 지켜보는 신들의 수는 적지 않아. 그들의 은총이 닿아 있는 한, 누구도 굶주릴 일은 없다.”
황호의 말에 은호는 부드럽게 반박했다.
“신들은 변덕스럽습니다. 언젠가 이 땅을 지켜보는 것도 질리겠죠. 기껏해야 우리에게 정을 붙인 천신님 정도만 남을 거예요.”
황호는 그 말을 받아칠 수 없었다.
신을 접해 본 적은 몇 번 없으나 그들이 얼마나 종잡을 수 없는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천신님의 힘만으로는 이 땅의 모두가 부족함 없이 사는 건 불가능하겠죠. 우리는 언젠가 신의 힘 없이 이 땅에서 살아갈 힘을 길러야 해요. 하지만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겠죠.”
은호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초조감이 배어 나왔다.
그러나 은호는 금방 그 감정을 숨기고 황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니 저는 당신을 이길 거예요.”
“……뭐? 지금 그 말에서 결론이 그렇게 나나?”
황호가 어이없다는 듯 목소리를 냈으나 은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은호의 목소리는 언제 초조했냐는 듯 평온하고 잔잔했으나 자신감이 넘쳤다.
“황호 님, 당신은 귀한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언젠가 이 땅과 호족을 짊어질 만한 힘이지요. 그러니 일찌감치 떨어뜨려 그 힘을 숨기게 할 생각이에요.”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