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오류 (4)
‘형’을 부른 은호가 몸을 일으키자 긴 머리카락이 은빛의 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흔들렸다.
교신이 끝난 직후라 그런지 시야가 흐릿했는데, 은호가 움직이는 건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보였다.
“…….”
은호가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나를 본 건지, 나를 지지하는 중인 백호군을 본 건지 알 수 없었다.
은호는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이며 수은 같은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러자 호족들이 눈을 크게 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
은호의 작은 고갯짓과 눈짓이 호족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로 보였다.
호족들에게 신호를 보낸 직후, 은호가 천동하를 불렀다.
은호가 천동하를 형이라고 불렀다.
“동하 형.”
“……은하? 은하야? 괜찮아?”
천동하는 현재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동생이 납치되었는데, 납치된 장소가 학교 본관이고 그곳에 진족과 후예가 득실거린다면 누구라도 당황스러울 게 뻔했다.
그래도 천동하는 무너지지 않고 버텼다.
오히려 천은하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걱정했다.
천동하가 평정심을 유지했던 건 평소 침착한 성격 덕도 있겠지만, 이복동생을 위해 억지로 버티고 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강력한 이능파에 동생과 잠든 진족이 휩쓸리고, 눈을 뜬 진족이 제 이름을 부르면…….’
천동하의 성정을 고려해 그의 입장과 처지를 판단하고, 그에 따른 변명이나 대책을 세우려고 했는데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사고가 이어지지 않았다.
집중하려 했는데 교신의 여파가 남았는지 머리가 조금 멍했다.
숨을 고르며 은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은호는 온화한 목소리로 계속 천동하에게 말을 걸었다.
“감사드려요. 동하 형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거예요.”
“어떻게, 그러니까, 넌…… 호족이야……?”
“네. 저는 깊은 잠에 빠졌던 호족이에요. 저는 자신을 망각한 채로 인간으로 태어났고, 당신의 동생이 되었습니다.”
은호는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천동하의 동생 천은하가 아닌, 플마고라는 게임이 있는 다른 세계에 존재했던 천성헌으로서의 삶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었다.
내 추리와 현재까지 상황을 종합해 보면, 은호는 이런 과정을 거쳤다.
은호는 깊은 잠에 빠졌다.
은호는 내가 있던 세계에서 천성헌으로 태어났다.
천성헌은 초상우주를 통해 다시 이 세계로 건너왔다.
초상우주는 이 세계에 새로운 신분, 육체인 ‘천은하’를 준비했으나 이 세계에는 아직 은호의 육체가 존재했다.
‘여기에서 그 ‘정보 충돌로 인해 발생한 오류’가 생겼겠지.’
그리고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인 나를 통해 초상우주에 접속한 결과, 그 오류가 수정되었다.
‘시스템 메시지에서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후보의 의사를 확인한다고 했는데, 이게 성헌이가 선택한 결과일까.’
천성헌, 아니, 천은하의 육신을 바라봤다.
천은하는 여전히 붉은 안개에 감싸인 채로 있었는데, 방금 전과 달리 눈을 감고 있었다.
감금 증후군에 걸린 상태였으니,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묘하게 생기가 없었다.
그 안에 담겨 있던 혼이 은호의 육신을 선택해 빠져나간 탓인 듯했다.
천동하는 붉은 안개 너머와 눈앞의 은발의 청년을 번갈아 보다가 황망한 얼굴을 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당신의 이복동생으로 신세를 졌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은호는 손을 모아 천동하에게 정중히 공수 인사를 했다.
막 깨어나 기운이 모두 돌아온 건 아닌지, 은호의 손이 조금 떨렸다.
인사를 받고도 천동하는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
천동하의 두뇌라면 저 짧은 설명으로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다르기에 천동하는 입을 오랫동안 열지 못했다.
은호를 비롯한 모든 호족들은 천동하의 반응을 재촉하지 않고 그저 기다렸다.
“그럼, 지금의 너는 누구야? 내 동생이야? 아니면, 여기에 잠들어 있던 호족이야?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마침내 천동하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 말에는 복잡한 심경이 묻어났다.
은호는 천동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은호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는 감사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함께 담겨 있었다.
“저는 이 자리에 있는 친우들과 함께 신화시대를 보낸 호족인 은호이기도 하고, 동하 형이 약 1년간 보살펴 준 동생인 은하이기도 해요. 그리고…….”
계속 천동하를 응시하던 은호가 나를 바라봤다.
외모는 전혀 다른데, 어쩐지 내가 알고 지내던 천성헌을 생각하게 하는 표정이었다.
“의신이 형의 후배인 천성헌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일시적으로 육신과 기억이 단절되었다고 해서 인격이 분리되는 건 아니니까요.”
은호가 자신을 천성헌이라 인정했다.
천성헌의 선배로서 기쁘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도 부정적인 마음은 모두 덮어 두기로 했다.
천성헌은 나를 걱정해 큰 리스크를 지고 제 의지로 이 세계에 온 것일 텐데, 그의 진정한 정체를 가지고 흠을 잡기는 싫었다.
‘성헌이가 이 세계에 왔고, 무사히 은호로서 움직이게 됐으면 기뻐해야지.’
눈앞에 있는 존재는 이제 천성헌이라기보다는 은호라고 부르는 게 좋겠지만, 그래도 기쁨이 더 컸다.
‘이제 초상우주에게 저 세계에 있는 성헌이 안부를 묻지 않아도 되고, 감금 증후군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마음 졸이지 않아도 돼.’
천성헌으로서 조의신의 후배로 있는 것보다는 은호로서 호족의 비호를 받는 게 좋을 거다.
그에게는 백호군이라는 좋은 형님도 생기게 되었고, 그의 이름인 은(銀)을 건물명에 붙여 줄 만큼 아끼는 친우들이 생겼다.
선배를 잘못 만나 집안사람들과도 틀어져 집을 나와 고생을 하게 된 삶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성헌이한테도 그게 더 좋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납득하고 은호를 봤다.
은호가 말한 직후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적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듯한 소리가 들리긴 했다.
“조의신과 천동하가 형…….”
5천 년을 산 적호의 눈엔 은호가 10대의 모습을 한 나와 천동하를 형이라고 부른 게 이상하게 보였나 보다.
그 말이 끝나기 전에 황금빛 이능파가 움직인 것을 봐선 황지호가 적호의 입을 틀어막은 것 같았다.
“황호 님, 적호 님, 적호 님의 아드님 그리고 백호 형님. 제가 얼마나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고, 저를 기다려 주셨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선 동하 형과 의신이 형을 배려해 주셨으면 해요.”
“……안다, 처음 말할 때 우리에게 ‘기다려라’라는 신호를 보내지 않았느냐.”
처음 한 행동이 정말로 일종의 신호였나 보다.
황지호의 말에 은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호 님, 이곳은 지력이 너무 세서 오래 있으면 인간의 몸에는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자리를 옮기지. 적연도 있지만, 에어셔틀을 대기시켜 두는 게 좋겠군.”
호랑이들은 오랜만에 재회했는데도 은호와 손발이 척척 맞았다.
호족들이 대화하는 사이 조용히 옷 소매로 입가의 피를 훔치고 내 발로 일어서려 했는데, 은호가 번뜩 이쪽을 보며 말했다.
“백호 형님, 의신이 형은 지금 체력과 심력이 상당히 소모된 상태예요. 더 이상 체력과 이능파를 사용하지 않도록 막아 주세요.”
“알았다.”
은호는 천동하와 나를 보며 말했다.
“동하 형, 의신이 형, 두 분이 함께 오셔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셨으면 해요.”
나와 천동하가 동생의 말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동생이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랬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황명호 대저택으로 이동하는 에어셔틀 안.
천동하는 적호에게서 천은하의 육신을 건네받아 이를 살폈다.
그 육신은 살아 있었다.
자가 호흡을 했고, 체온, 맥박, 혈압을 비롯한 활력 징후는 모두 정상 범위에 있었다.
그러나 눈을 뜨지는 않았다.
‘정말로 혼이 빠져나간 것 같아. 저 ‘은호’에게 간 거구나.’
천동하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동생이 기병(奇病)을 떨치고 일어났으면 했다.
한때는 마족의 힘을 빌릴 생각을 할 정도로 간절했다.
천동하가 허튼 생각을 한다는 걸 알아챈 영민한 동생이 눈짓으로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면 그는 잘못된 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한 동생의 정체와 그 배경에 놀란 건 사실이지만, 저 은호라는 진족은 천동하를 형으로 부르는 것을 택했다.
‘내 이복동생으로서 평생 병상에 누워 지내거나 어느 날 갑자기 숨을 거두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천씨 집안은 손이 귀했기에 구시대적 발상을 가진 어른들은 천씨 집안의 대를 잇는 걸 무엇보다 중요시했고, 사생아 한둘쯤은 흠으로 여기지 않았다.
천동하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세상을 뜬 아버지에겐 숨겨 둔 아이가 더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씨 성을 받고, ‘은(銀)’자 이름을 받은 건 천은하 하나뿐이었다.
이름을 받기 전에 일찍 세상을 뜬 탓이었다.
‘다른 동생들은 이미…….’
이복동생 천은하를 찾은 것을 계기로 조사를 한 천동하는 이 동생은 반드시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니 천동하가 생각한 최악의 상황에 비하면 지금은 낫다고 생각했다.
‘은하가 정말 호족이라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을 거야. 또, 내가 더 걱정할 이유가 없어지겠지.’
늘 잠에 들 때면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천동하가 잠든 사이 천은하도 다른 동생들처럼 가 버릴까 봐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광림과 스킬을 동원해 시간이 날 때마다 천은하를 지켜보곤 했다.
1년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사이 천은하가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고 그가 조금씩 마음을 열어 가는 게 기뻤다.
‘나한테 ‘동하 형’이라고 불렀지…….’
은호가 자신을 동하 형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를 온전히 동생이라고 바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제 동생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말을 하고 자신을 형이라고 부른다는 걸 생각하면 기쁜데, 호족의 은호와 제 동생이 같은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해.’
천동하는 고개를 돌려 제 건너편에 백호와 나란히 앉은 조의신을 봤다.
조의신은 피를 토할 정도로 강력한 이능파에 휘말린 이후, 크게 지쳐 보였다.
기절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의신이는 호족이나 후예가 아닌 것 같은데.’
은호는 김신록을 ‘적호 님의 아드님’이라고 칭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은광고 교사 김신록은 호족의 후예임이 분명했다.
그에 반해 호족들이 대화를 하는 것을 들으니 조의신은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인간인 듯했다.
왜 인간인 조의신이 이 자리에서 호족과 어울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중요한 건, 조의신이 천동하와 같은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체스를 두며 친해진 후배가 저와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하니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의신이는 어떻게,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던 걸까?’
천동하는 호기심 반, 걱정 반을 담아 조의신을 바라봤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