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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48화 (347/925)

56. 오류 (5)

황명호 대저택의 별채.

황지호는 미로 정원 안의 본채 대신 별채 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다양한 양식의 별채 중, 황지호가 택한 건 최신 설비를 갖춘 현대식 구조의 건물이었다.

왜 본채가 아니라 별채에 왔는지는 짐작이 갔다.

‘외부인인 천동하가 있는 탓도 있겠지만, 가장 큰 건 은호의 후예들과 마주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겠지.’

은호와 은호의 후예들은 조손 관계다.

그렇다고 하나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지 않았으니, 지금 당장 만나는 건 별로 좋지 않아 보이긴 했다.

‘후예들과는 바로 대면시키진 않을 건가 보네. 은호나 후예들은 아직 모르고 있을 테니까…… 조금 시간을 두는 게 좋을 거야.’

첫째인 은서호가 열여섯이니 오랜 기간 잠들어 있던 은호가 그들의 존재를 알 리가 만무했다.

천성헌으로서 플마고를 플레이했다고 하지만, 그 망겜에서는 은호의 후예들에 관해선 언급되지 않는다.

지금 그들이 만나면 회포고 뭐고 혼란만 가중될 거다.

조손 양쪽 다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시간을 두고 지켜보다 운을 떼는 게 양쪽을 위한 일일 거다.

“편하게 앉도록.”

황지호의 말에 방금까지 곧은 자세로 걷던 은호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언뜻 보기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은빛의 이능파가 어른거리다 사라지는 게 보였다.

‘이능파로 보조를 받아 걸었구나.’

은호는 이동하는 내내 다른 호족들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그래도 신체 기능은 아직 온전치 않은 걸까.

오랜 기간 잠들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을 거다.

‘호랑이들보다 천동하가 더 은호를 걱정하는 것 같은데.’

호족들은 은호가 제 발로 걸으려는 걸 아는지 그를 내버려 뒀는데, 천동하만 안절부절못했다.

이동을 마치고 자리를 잡고 앉은 후에야 안심하는 것 같았다.

“익숙해 보이는군.”

황지호가 백목단(白牡丹)을 은으로 세공된 찻잔에 담아 내밀며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황지호가 한옥이 아니라 왜 현대식 건물에 은호를 데려왔는지 짐작이 갔다.

“에어 셔틀에 탑승할 때 당황하지 않았고, 소파에 앉은 후에 등받이 각도를 능숙하게 조절하더군. 단순히 지식으로만 현대 문물을 접한 것 같지 않아.”

내가 있던 세계는 이 세계만큼 기술 수준이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은호는 천성헌으로서 현대 문물을 접했다.

황지호가 말한 것 정도는 내가 있던 세계의 현대인이라면 어렵지 않게 적응하고 해낼 거다.

“네, 직접 경험한 덕에 몸에 익었어요.”

은호의 대답에 호랑이들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아는 은호는 신화시대 이후 내내 잠들어 있었으니 당연한 태도일 거다.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다오.”

은호는 고상하게 손을 놀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제가 잠든 후, 제 혼은 긴 시간 환생을 반복했어요. 바로 직전의 생만큼 또렷하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렴풋하게는 인지하고 있습니다.”

은호는 잠든 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은호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전생들에 관해 아주 짧게 요약해 언급했는데, 무엇 하나 가벼운 게 없었다.

무표정인 백호군의 얼굴이 어두워질 만큼 무거운 것들이었다.

“……대죄를 범한 저는 환생한 후에도 그리 길게 살지 못했어요. 혼도 이 세계가 아닌 먼 곳을 떠돌았기에 천신께서 자비를 베풀려 해도 닿질 않았죠.”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라…….”

이 말을 하며 황지호가 내 쪽을 봤다.

의미심장한 눈을 하고 있어서 상당히 꺼림칙했다.

무시하고 있으니 황지호의 시선이 다시 은호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천신께서 너를 도우려 했나?”

“네. 꿈을 통해 천신께서 다른 세계에 있는 제게 오셨어요. 모든 세계에는 경계선이 존재하지만, 꿈은 이어져 있으니까요.”

은호는 이 말을 하며 나를 바라봤다.

“의신이 형, 기억하고 계세요? 제가 늘 같은 꿈만 꿨다고 했잖아요. 그 꿈에 나오는 게 천신이셨어요.”

천성헌이 그런 말을 했었다.

천성헌은 꿈을 거의 꾸지 않으나 항상 같은 꿈만 꾼다고.

‘누가 성헌이를 내려보고 있는 꿈이라고 했었지. 그게 천신이었나……!’

이 세계에 온 직후, 나는 이곳을 게임 속의 세계라고 여기지 않았다.

―나는 게임 속으로 들어온 게 아니야.

―한정된 간섭밖에 하지 못하는 너는 나를 다른 차원에서 부른 거야. 이 세계에서 ‘조연’의 자리를 하나 비워 두고. 정보 개변으로 나에 맞춰 과거를 짜 맞추고, 게임 같은 힘을 주고 미래를 바꾸라고.

이 두 가지 발언에 초상우주는 긍정을 표했다.

그 시점에 이미 플마고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는 걸 파악했다.

그래도 이전 세계에서 플마고와 상관없이 교류하고 있던 후배와 나눴던 잡담이, 사실 이 세계와 이어진 단서라는 게 놀라웠다.

‘잠깐, 그러고 보니 그때…….’

초상우주와의 첫 교신의 내용을 다시 떠올리고 있자니 뭔가 마음에 걸렸다.

―그 망겜은 여기에 데려올 사람을 뽑는 선정 과정이었지?

초상우주는 그때 아무 답변도 하지 않았다.

내가 게임 속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는 내용의 추측, 초상우주가 나를 이 세계로 부른 이유에 관한 추리는 모두 긍정의 의미로 머릿속을 파랗게 물들였는데.

“……의신이 형?”

은호의 목소리에 사고가 중단되었다.

호랑이들과 천동하가 나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어. 내가 꿈을 안 꾼다고 하니까 네가 그런 말을 했잖아.”

“네……! 기억하고 계셨군요!”

은호가 기뻐하는 얼굴을 했는데, 표정이나 말투가 천성헌과 똑같았다.

은호는 그 이후로도 자신의 상황에 관해 간결히 설명했다.

자신이 은호이자 천성헌이며 천은하라는 게 그 주 내용이었다.

은호가 하나하나 설명하는 모습이 대학에 다닐 때 천성헌이 발표 수업 에서 조모임 대표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모습과 겹쳤다.

표정도 비슷한 게 저 은발만 아니면 그냥 천성헌으로 보였을 것 같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성헌이가 말하는 것 같네. 정말 같은 존재구나.’

자신의 상황에 관해 설명을 마친 은호가 그의 육체를 지금까지 지킨 호족에게, 후배와 동생으로서 자신을 잘 대해 준 나와 천동하에게 각각 감사 인사를 했다.

은호의 설명은 끝났지만 아직 의문이 많았다.

그가 잠들어 있던 시간을 고려하면 고작 이 정도 시간의 설명을 가지고 모든 걸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긴 했다.

가장 먼저 질문한 건 천동하였다.

“하나 질문해도 될까?”

“동하 형, 말씀하세요.”

천동하는 나와 은호를 번갈아 보다 물었다.

“너와 의신이 사이에 교류가 있던 것 같은데. 혹시 감금 증후군에 걸리기 전에 ‘성헌’이라는 이름으로 의신이와 만난 적이 있던 거야?”

천동하 입장에서는 신화시대의 이야기보다는 아는 후배와 동생의 관계성이 더 신경 쓰인 듯했다.

천동하는 복잡한 얼굴로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

“감금 증후군에 걸리기 전의 은하에 관해 조사를 한 적이 있어. 그 기록은 어딘가 딱딱한 게 가공된 듯한 느낌이 들었지. 그래서 어딘가 완전하지 않거나 조작되었다고 생각했어.”

천동하는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가정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천동하가 내린 결론은 묘하게 실제 벌어진 일 중 중요한 건 모두 빠진 내용이었으나, 앞뒤는 맞았다.

‘오히려 이 정도만 설명하는 게 낫지 않을까. 천동하가 더 위험하고 복잡한 일에 발을 들이게 하고 싶지 않아.’

은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사실이 몇 가지 빠져 있는 진실만을 입에 담았다.

“천은하의 뒷조사를 해도 천성헌으로서 의신이 형과 만난 기록은 나오지 않을 거예요.”

“네가 의신이를 데려오지 말라고 부탁한 것도 면식이 있던 의신이가 너를 걱정할까 봐 그랬던 거야?”

“네,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아니야, 그땐 말하기도 어려웠겠지. 그랬구나…….”

천동하는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은하는 재벌가의 숨겨진 사생아였으니 이름을 숨기고 사람과 교류를 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여긴 듯했다.

“……일단 오늘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치지. 다들 피로해 보이는군.”

“네, 아까 황호 님이 의신이 형을 진찰하셨을 때 큰 문제가 없다고 하셨지만, 좀 쉬셔야 할 것 같아요.”

아까 멍하니 있어서 대답을 늦게 한 게 화근에 된 걸까.

황지호에 이어 은호가 그렇게 말하니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은호, 우선은 이 건물을 임시로 네 거처로 쓰도록.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라.”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제 거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지? 이곳에 머물지 않겠다는 말 같군.”

“동하 형이 허락해 주시면 저는 ‘천은하’라는 신분을 쓸 생각이에요.”

예상치 못한 은호의 말에 은호를 제외한 전원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는 천은하로서 내년에 은광고에 입학해서 기숙사생이 되고 싶어요.”

“은광고에 입학하고 싶나? 신분이라면 호족 쪽에서 바로 만들어 줄 수 있다.”

황지호는 은호가 천은하로 지낸다는 말이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를 호족으로서 인지하겠다는 말에 은호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제가 잠든 상태라고 알려지는 게 안전할 거예요. 천씨 가문의 사생아가 은호라고 의심하는 존재는 적겠죠. 그리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제가 천은하로 지내는 게 좋을 거예요.”

그 말에 반응이 갈렸다.

천동하는 은근히 환영하는 눈치였고, 호족들은 대놓고 실망한 태도를 보였다.

“천기라도 읽었느냐? 신화의 시대는 지금과 달라서 변수가 많았을 텐데…….”

“저에게 더 이상 천기를 읽는 능력은 없어요. 천기를 거스르는 대죄를 범해서요.”

은호는 딱 잘라 말하고 내 쪽을 봤다.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은 알고 있어요. 의신이 형만큼은 아니지만요.”

*    *    *

“의신이 형은요?”

“백호가 감시하기로 했다. 괜찮을 거다.”

“백호 형님이 지켜보신다면 안심이네요.”

약 1시간 전, 천동하와 적호는 은호가 ‘천은하’의 신분을 쓸 수 있도록 주변 정리를 하기 위해 저택을 떠났다.

조의신은 그 몸을 하고 기숙사를 가겠다고 했는데, 은호가 조근조근 말을 하니 바로 꼬리를 내리고 저택에서 묵기로 했다.

황호는 조의신을 저택에 붙잡아 두는 수단이 하나 더 늘었다는 사실에 기뻐했으나 그게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조금 미묘했다.

“황호 님, 제가 잠든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죠?”

“다 알고 있는 게 아니었나?”

“제가 알고 있는 건 한정적이에요.”

그 은호가 알고 있다는 한정적인 이야기가 신경 쓰였으나, 황호는 자신이 먼저 답하기로 했다.

황호는 은호가 잠든 순간 이후의 이야기를 했다.

점차 신의 목소리가 멀어지던 시절의 이야기는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청호와 신인에 관한 이야기를 마쳤을 때였다.

달그락.

“……청호 님이 ‘한이’, 신인 님이 ‘공청훤’이 되었다고 하셨나요?”

다례(茶禮)에 정통한 은호가 다기를 부딪치는 소리를 낼 만큼 동요한 게 느껴졌다.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지만, 마치 한이와 공청훤이 누군지 아는 듯한 태도였다.

“중요한 이야기는 대충 마무리되었으니 나도 질문하지.”

“제가 지은 죄에 관한 것이라면, 다른 호족들도 있는 자리에서 고하고 싶어요.”

“내가 물을 건 다른 거다. 네가 ‘성헌’이었을 때에 관해서 묻고 싶다.”

황호의 말에 은호가 찻잔을 내려 두며 답했다.

이번엔 다기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황호 님께서는 의신이 형의 정체가 궁금해서 지금 하고 계신 고등학생의 모습으로 접근하셨겠지요? 어디까지 추측했는지 듣고 싶어요.”

“처음엔 그가 미래에서 온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지.”

“어째서죠? 의신이 형은 마치 미래를 아는 것처럼 행동했을 텐데요.”

“그래. 그러나 그가 미래에서 온 존재일 리가 없다. 조의신이 알고 있는 미래, 그가 보여 주는 미래에는 조의신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황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조의신은 다른 세계에서 존재했고, 그 세계에서 너를 만난 거겠지. 그곳에서 이 세계의 미래를 관찰했던 게 아닌가.”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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