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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65화 (364/925)

58. 천적 (7)

배신자가 섞여 있는 용왕신의 무녀들 사이에서 운명력이 발동되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광림과 ‘무명의 운명’ 카드의 제한 시간은 모두 소모했고, 광림 초기화 시간인 그리니치 표준시 GMT +09:00 기준으로 0시까지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쓸 수 있는 건 내 능력뿐이다.

‘그렇다면 만물 사용으로 대처해야 하나? 하지만…….’

‘만물 사용’은 강력한 수지만, 지금 상황에선 만물 사용에도 제한이 걸린 상태였다.

‘아이템 카드의 대부분을 황지호에게 맡겨서 쓸 수 있는 무기가 별로 없어!’

여차하면 이 앞에서 상보심금파를 꺼내야 할지도 모른다.

머릿속으로 상보심금파의 존재가 발각되면 어떻게 대응할지 수를 정리하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파아아아……!

시스템 메시지가 사라지자마자 무녀들의 노랫소리에 섞인 이능파의 입자가 일제히 빛을 뿜었다.

몸으로 흘러드는 이능파의 총량도 그만큼 늘어나 눈이 번쩍 떠질 만큼 몸에 활기가 흘렀다.

“의신아!”

이상을 감지한 건지 나를 부르는 용제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듯했으나 마법진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는지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괜찮으니까 오지 말라고 외치려고 할 때.

시야가 급변했다.

암전.

눈을 감은 것처럼 주변이 어두웠다.

‘여긴…….’

바람 소리만 희미하게 들리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이 공간에 있으니 기시감을 느꼈다.

‘저번에 유상희의 광림을 통해 아케와 만날 때와 비슷한데…….’

상황은 유사했다.

아케아의 사제인 유상희.

용왕신의 무녀인 오색의 무녀들.

나를 치료하던 과정에서 발동된 운명력.

그리고 전개된 어두운 공간.

두 사례를 비교하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자명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건……!’

그때 마침 내 위로부터 오색 찬란한 빛이 내려왔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그 빛의 근원 쪽으로 돌렸다.

보지 않아도 그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용이다!’

시선 저편, 눈을 가린 거대한 용이 오색 채운을 몸에 두르고 부유하고 있었다.

오색 채운 사이로 용왕신의 비늘이 보였는데, 구름의 색만큼이나 오묘한 빛이었다.

처음 보는 존재였고 상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상황이나 용의 형태를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용왕신이 분명해! 플마고 속에선 실루엣만 나왔는데.’

용왕신은 하늘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용왕신이 바닥에 착지하긴 했으나 몸체가 지나치게 큰 탓에 한참 위를 올려다봐야 했다.

곧 용왕신이 입을 열었다.

[안녕.]

짧은 인사였지만 용왕신이 입을 열자 강렬한 이능압이 느껴졌다.

아케아 때보다 더 강렬한 힘이었다.

‘여기가 용족의 영역이고 용왕신의 무녀가 다섯이나 있어서 그런가?’

한반도에 있는 용족의 영역에서 이 정도의 힘을 보이는데, 용궁에 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용왕신의 힘에 경의를 표할 겸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자 내 주변을 누르던 이능압이 사라졌다.

가벼워진 공기 속에서 어쩐지 웃음기 섞인 듯한 용왕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듣던 대로 예의가 바른 아이구나.]

듣던 대로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용왕신은 누구에게 내 얘기를 들었던 걸까.

용왕신이 나를 관찰하듯 뿔이 달린 머리를 내 쪽으로 가까이 가져왔다.

그래 봤자 눈을 가려서 앞이 보이지 않을 텐데, 가까이 오는 의미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너에 관해서는 얘기가 돌고 있다. 너는 이 땅에서 신의 힘을 쓰며, 신들이 축복한 이들이 너와 교류하지 않느냐. 그러니 모를 턱이 없지.]

상위 존재 사이에서 내 말이 도는 건가!

하긴, ‘플레이어의 궤적’으로 사용하는 캐릭터 중에는 상위 존재의 가호를 받은 이들이 많았고, 또 함근형의 광림처럼 신의 힘을 빌리는 능력도 있었다.

‘그러면 이 세계의 상위 존재는 나에 관해 알고 있는 거구나……!’

환몽 경매 당시, 나는 염준열의 힘을 사용했다.

염준열에게는 용왕신의 가호, ‘나의 불이 너를 태우는 일은 없으리라’가 걸려 있으니 그때부터 용왕신이 나를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얼굴을 흐렸다.

‘……가호를 내린 적도 없는 존재가 그 힘을 사용하는 걸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까?’

상위 존재의 분노를 사는 건 악수 중의 악수다.

왜 그 점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힘을 빌린다는 생각에서 사고가 중단되었나 보다.

[네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네?”

나를 관찰하던 용왕신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쓰는 힘은 신의 힘이되, 우리의 힘은 아니란다. 그러니 우리가 개입할 수 없다.]

용왕신의 말에 의문이 깊어졌다.

그렇다면 내가 쓰는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어쩐지 이 질문의 답은 용왕신도 모를 것 같았다.

만약 답을 안다면 나를 이 세계로 데려온 초상우주가 알고 있을 거다.

용왕신은 자애로운 목소리로 계속 나를 다독였다.

[설령 내 힘을 허락 없이 썼다 한들, 나는 내 아이들을 구하고 도운 아이를 벌할 생각이 없다. 인간의 작은 실수에 화를 내는 신들이 있다고 하나 나는 그들과 다르다.]

용왕신이 언급한 ‘내 아이들’은 용제건과 염준열을 말하는 것 같았다.

용왕신의 말에는 용들을 아끼는 마음이 묻어났다.

그 말에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왜…….’

용왕신은 왜 염준열의 복수를 그런 무자비한 방식으로 저지한 것인가.

플마고 속 용왕신은 가호를 거두면 염방열이 타 죽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를 행했다.

염방열은 자신의 홍염에 온몸이 타오르면서도 가호가 사라진 걸 믿지 못했다.

‘……무녀를 아끼는 마음이 더 컸던 걸까?’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들이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을 사랑하는 방식은 종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사랑하던 존재라도 작은 흠을 잡아 벼락을 뿌리고, 가혹한 형벌을 내린 존재라도 자비를 베풀어 용서하고 제 자식의 신랑감으로 삼는 등 신들의 변덕은 인간의 기준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직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하는 건 관찰이다.

용왕신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진 않을 테니, 용왕신의 행보를 예측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단서를 얻어 둬야 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용제건 선생님과 염준열 선배님을 구한 건 함근형 선생님이에요.”

[그래, 그 명궁도 내 아이들을 구하는 데에 일조했지. 그렇다고 해서 네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 몸을 던진 게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

“…….”

[용제건 앞에선 괜찮지만 준열이 앞에선 그렇게 말하는 걸 삼가거라. 그렇게 속상해하는 건 오랜만에 봤단다.]

내가 염준열을 울린 걸 이 용왕신도 아나 보다.

용왕신의 마지막 말은 어쩐지 날카롭게 들렸다.

그래도 그만큼 용왕신이 염준열을 아낀다는 게 느껴져 오히려 안심했다.

내 태도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용왕신은 만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용제건이 말한 대로 담력도 있어 보이고 괜찮네. 좋아.]

“용제건 선생님이 제 이야기를 했나요?”

[응, 저번에 용제건에게 계시를 내릴 때 네 얘기를 하더구나. 용궁으로 초대하고 싶은 인간이 있다고 했지.]

주오 아일랜드를 다녀온 직후, 예전에 용제건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다음에 용왕신님이 계시를 내릴 때 네 얘기를 꺼낼 거야.

―초대하고 싶은 인간이 하나 있으니까 데려가고 싶다고.

용제건이 잊지 않고 용왕신에게 용궁 출입 건에 관한 부탁을 했나 보다.

내 얘기를 용왕신에게 어떻게 얼마만큼 한 건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신의 힘을 쓰는 아이를 용궁에 데려오는 건 조금 마음에 걸렸지. 그래서 생각해 본다고 했는데…… 괜찮을 것 같구나.]

다행히 나는 용왕신의 면접을 통과했나 보다.

용왕신은 그렇게 말한 후 이능파를 허공에 쏘아 올렸다.

파아앗!

빛을 뿜던 용왕신의 이능파는 구체 형태로 응축되었다.

한 손바닥 위에 올라갈 만한 크기의 작은 구슬 안에는 용의 비늘로 추정되는 조각이 들어가 있었다.

[네게 용궁의 출입을 허가하마.]

용왕신이 만든 구슬이 내 앞에 내려왔다.

두 손으로 구슬을 쥐니 구슬로부터 따뜻한 온기가 흘러나왔다.

‘이게 용궁의 출입 허가증인가? 구슬 자체에도 엄청난 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

용들을 구했다고 하지만 처음 보는 인간에게 쉽게 내줄 만한 물건이 아닌 건 분명했다.

나는 구슬을 받아 들고 용왕신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나중에 용궁에서도 한번 보자꾸나.]

용왕신은 할 말을 마친 듯 존재감을 서서히 지워 갔다.

어두운 공간이 밝아지고, 용왕신의 기척이 거의 사라졌을 때였다.

[이상하군…….]

용왕신이 나를 내려다보며 의심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호흡에 문제가 생기면 용제건이나 나의 무녀에게 말하거라. 용제건에게는 내가 직접 일러 두지.]

문제가 없다면 용제건에게 말할 필요는 없지 않나?

내가 말리기 전에 이미 용왕신이 사라졌다.

밝아지는 시야 속에서 무녀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

오방색의 용 조각이 있는 마법진 위로 돌아왔다고 인식했을 때, 용제건과 눈이 마주쳤다.

무녀들은 눈을 감고 노래를 불러 나를 치료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으나, 용제건은 달랐다.

이 상황을 빠짐없이 관찰한 듯했다.

용제건은 잠시 생각에 잠겨 내 쪽을 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특유의 황홀한 미소를 짓기 직전이었는데, 무녀들이 주변에 있으니 일단은 참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시선은 내 손 쪽을 향하고 있었다.

‘……용왕신이 건네준 구슬을 보고 있어!’

나는 곧바로 아이템창을 소환해 통행증을 그 안에 넣었다.

구슬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용제건의 기분은 더더욱 좋아진 듯했다.

그에 반해 노래가 끝날 때까지 내 기분은 불편했다.

이윽고 용왕신의 무녀들이 노래를 멈추었을 때였다.

“손님의 치료는 끝났나.”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번에 야구장에서 봤을 때와 분위기가 딴판이긴 했지만, 그게 누군지는 쉽게 알아봤다.

푸른 옷을 휘감은 용족의 수장, 청룡이었다.

‘청룡 뒤에 있는 건…… 염방열!’

청룡 뒤에는 홍염의 제왕 염방열이 서 있었다.

용족의 수장과 세계 10대 이계 공략 팀의 팀 마스터가 함께 있으니 위압감이 상당했다.

“청룡 님 오셨습니까. 손님의 치료는 무사히 마쳤답니다.”

“상당히 소모된 듯하나 이능파는 안정되어 보이는군. 수고했다.”

녹(綠)의 무녀가 대표로 인사를 올리자 청룡이 무녀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청룡은 엄숙한 음성으로 정중하게 말했으나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뒤에 서 있는 염방열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용제건처럼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걸까.’

그렇다면 협력을 구하기 쉬워질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 말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자니, 청룡이 손짓했다.

“나눌 말이 많지만, 지금은 중요한 일이 있어서 바로 하긴 어렵군. 일단 따라오도록.”

“그럼 저희는 물러나겠습니다.”

“그래.”

청룡은 무녀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바쁘게 걷기 시작했다.

용제건은 당연한 듯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추측하며 이동을 계속했다.

목적지는 용이 조각된 두터운 철문 앞이었다.

청룡이 손을 올리자 문은 ‘쿠구궁!’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양옆으로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 안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청룡 님, 막 시작했습니다!”

“아직 늦진 않았겠지?”

“네, 이제 오프닝이 나오고 있습니다!

문 안에는 거대한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앞에는 용족들과 붉은 사자 팀원들이 모여 앉아 넋 놓고 스크린 너머를 보고 있었다.

스크린에 흐르는 건…….

‘플레이리스트 오프닝 영상이잖아!’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게 염준열이 나오는 생방송을 시청하는 거였나 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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