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정체 (3)
플레이리스트는 생방송으로 진행되긴 했으나, 송출되는 영상이 전부 실시간으로 찍힌 건 아니었다.
스테이지를 정리하고 출연자들이 의상을 갈아입는 사이 사전에 녹화한 인터뷰 영상과 무대 영상이 교차되어 흘렀다.
“저분은 많이 긴장하셨나 봐요……. 아까 저희보고 도망치라고 하신 이후로 계속 상태가 안 좋아 보여요.”
“저 사람 응원하러 온 집단을 협회가 감시하고 있잖아. 그것과 관련 있는 거 아냐?”
회사원의 후보의 영상과 무대에는 아쉽다는 평가가 많았다.
첫 오프닝 때 단체 공연도, 사전 녹화 영상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래도 다른 출연자들과 MC의 활약으로 플레이리스트 막방다운 방송이 이어졌다.
현장감을 주기 위해 MC인 최지나와 염준열이 실시간으로 영상 앞뒤로 코멘트를 넣었는데, 타이밍이나 가끔 섞이는 애드립이 전부 절묘해 방청객들이 크게 감탄했다.
이계와 에너미의 위협으로 취소될 뻔한 방송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주목받은 건 출연자나 MC의 진행뿐만이 아니었다.
“와…… 화면으로 보니까 유리가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느껴져.”
“작가님보다 유리 발음이 더 똑똑히 들리는 것 같아.”
“하하하, 고마워. 인터뷰는 거의 선배가 하셔서 내 분량은 별로 없었지만…….”
김유리가 쑥스러워하며 말을 돌렸다.
사전에 찍은 인터뷰 영상 속에는 김유리에 앞서서 금찬솔과 왕찬솔이 등장했다.
작가는 금찬솔과 왕찬솔이 콤비인 걸 알아본 건지 둘을 동시에 인터뷰했는데, 두 사람 합이 척척 맞고 동시에 똑같은 답변을 하기도 해 큰 웃음을 불렀다.
“이제 미로 영상이 나오네요! 직접 봤을 땐 어땠어요?”
“맞아, 녹화하는 장면을 못 봐서 아쉬웠어.”
그 말을 들은 대기조, 김유리, 권레나, 목우람이 서로의 눈치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독고미로의 무대를 본 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인 듯했다.
“우리가 말하는 거보다는 실제로 보는 게 좋을 거야!”
“응, 스포일러는 삼갈게.”
“맞습니다. 근사한 무대는 직접 봐야 그 참된 본질을 이해할 수 있죠.”
1학년 0반 아이들은 독고미로가 어떤 무대를 했을지 궁금했지만, 그 말을 듣고 참기로 했다.
최대한 무대의 스포일러를 피하며 대화를 하고 있으니 스태프와 대화를 마친 함근형이 방청석으로 돌아왔다.
“이제 독고미로의 영상이 나올 차례 같구나. 그만 잡담은 삼가도록.”
“네!”
곧 스크린에 독고미로를 소개하는 자막과 함께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는 독고미로의 얼굴이 크게 비추어졌다.
예전에 어둠 속에서 똑바로 카메라를 보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번 무대의 독고미로는 강렬한 조명과 플래시 속에서 카메라만을 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빛 사이에서 시선을 보내는 독고미로의 박력에 분주히 움직이던 스태프들도 잠시 멈춰서 대형 스크린 속의 그녀를 바라볼 정도였다.
독고미로가 춤을 추며 노래를 시작한 순간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이거, 립싱크 아니지? AR도 안 튼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움직이면서 노래를 하는 거지!”
도입부부터 고음으로 시작하는 보컬.
일반인은 몇 소절만 따라 춰도 녹초가 될 것 같은 격렬한 퍼포먼스.
독고미로는 그 두 가지를 웃는 얼굴로 완벽히 소화해 냈다.
독고미로의 영상은 약 3분 25초에 불과했다.
짧은 시간이라고 하나 불특정 다수의 시선을 1분 이상 붙잡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독고미로는 마치 스튜디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간을 정지시킨 것처럼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녹화 당시에 라이브로 그 무대를 본 사람들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화면 너머의 독고미로가 무대를 마치고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관객석에 앉아 있던 관중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성으로 보답했다.
와아아아……!
관객들의 함성 속에서 독고미로의 홈마 정해온은 카메라를 붙잡고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정해온이 눈물을 참는 중이란 걸 눈치챈 금찬솔이 어깨를 두드리자 그녀는 모르는 척 카메라를 들여다봤지만, 카메라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야, 결과 발표도 안 났는데 벌써 울면 어떡함!”
“울면 시야가 막히잖아. 우리가 어떻게 여길 온 건데 다 보고 가야지!”
“해온아, 아직 생방송 무대도 있어.”
2학년 0반 학생들의 놀리는 건지 달래는 건지 모를 말에 정해온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아, 나 안 운다고!”
“눈물이나 닦고 말하셈.”
훈훈한 광경을 뒤로하고 방송은 계속 진행되었다.
회사원 후보를 응원하러 온 동료 직원의 어색한 인터뷰와 실수가 많았던 무대 영상이 끝난 후.
드디어 플레이리스트 우승자를 가릴 시청자 투표가 시작되었다.
“여러분들의 플레이리스트, 당신의 플레이어를 선택할 마지막 기회!”
“지금부터 시청자 투표를 시작합니다!”
스크린에 코드가 하나 떠올랐다.
각자 응원하러 온 후보에게 투표하기 위해 방청석에서도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광고 측 방청석도 마찬가지였다.
“어…… 이렇게 하는 거 맞냐?”
“맞아! 하하하, 여러 번 안 눌러도 돼. 어차피 집계는 한 번 되니까.”
“함근형 선생님! 선생님도 투표하셨어요? 미로 찍어 주실 거죠?”
“그래, 했다.”
1학년 0반 소속 아이들은 훈훈하게 독고미로에게 한 표를 행사했다.
2학년 0반도 독고미로를 위해 움직였다.
미리 이 상황을 대비한 듯, 독고미로의 이름이 크게 박힌 형광 플래카드를 꺼내 든 2학년 0반 학생들이 주변을 둘러봤다.
방청객이 디바이스를 통해 투표하는 장면을 찍으려는 카메라를 바로 찾아낸 금찬솔과 왕찬솔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렌즈 앞에서 적극적으로 독고미로를 홍보했다.
“2학년 0반 애들아, 보고 있냐? 투표 안 한 거 아니지?”
“시청자님들아, 미로에게 힘을 모아 줘!”
카메라에 들이대는 고등학생의 발랄한 모습이 스태프의 마음에 든 건지 그 장면은 전국으로 송출되었다.
시청자 투표 폼이 열리자, 투표 현황은 일정 시간을 두고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었다.
선두로 치고 나간 건 압도적인 무대를 선보인 여래훈과 독고미로였다.
“투표수를 보니까, 아직 평소 나오는 숫자에 다 못 미쳐. 투표를 안 한 사람이 많은 것 같아.”
“다들 생방송 무대를 보고 정할 생각인가 봐요.”
“그럼 이제 다음 무대에 달려 있구나!”
“순서가 공개됐습니다. 회사원 후보 다음에 여래훈 씨, 그다음이 독고미로입니다.”
사회석에 선 염준열이 생방송 경연 순서를 공개했다.
우승자는 독고미로의 무대가 끝나야 결정된 것이라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어? 갑자기 숫자가 이상해졌어요.”
“뭐야, 누가 조작한 거야?”
“뭐지…….”
갑자기 여래훈 쪽의 포인트가 급증했다.
방금까지 투표 포인트가 완만하게 증가하며 엎치락뒤치락하던 것을 고려하면 이상한 수치였다.
그 현상의 원인을 가장 먼저 파악한 건 정해온이었다.
“뉴스 때문이야!”
“뉴스……?”
한편, 스태프 측에서도 이 이상 현상에 관해 파악하고 있었다.
투표 집계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여러 차례 확인을 했지만,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상해. 오프닝 무대와 사전 녹화분이 끝난 이후, 표는 거의 미로와 래훈이가 양분해서 가져갔어. 그런데 갑자기 래훈이가…….”
“이러다가 조작 소리 듣는 거 아니야?”
“래훈이 생방 무대는 아직인데, 왜 갑자기 이렇게 오른 거지?”
잠시 광고로 시간을 끌 것을 지시한 후, 작가들과 PD를 비롯한 주요 스태프가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원인은 곧 밝혀졌다.
“큰일 났어요! 방금 기사가 나고, 타 방송국에서 뉴스 특보로 이번 사건을 보도했어요!”
“어차피 알려질 일이었잖아. 왜 그렇게 소란이야.”
“그것도 그런데…… 그게…….”
홀로그램 화면을 여러 개 전개해 모든 보도 내용을 확인한 최지나가 결론을 내렸다.
“타 방송국에서 방금 있었던 이계 공략에 관해 보도했어요. 여기 있던 관계자가 흘린 건지 상당히 상세한 내용이 공개됐네요. 그 특보가 지금 플레이리스트의 투표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게 확실합니다.”
“……설마 그 특보에 여래훈 씨의 이야기가 나온 거야?”
최지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래훈 씨가 결계를 쳤고, 일반인 피해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건이 중점적으로 보도됐어요. 지금 플레이리스트가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요.”
그 말 뒤로 모두 입을 다물었다.
여래훈은 ‘내장산의 성자’로 이름을 날린 유명한 플레이어다.
에너미를 쓰러뜨린 적도, 이계를 공략한 적도 없는 여래훈은 이명을 받을 정도로 많은 인명을 구했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호감을 가진 대중은 한둘이 아니다.
여래훈의 최근 소식 하나만으로 무대와 관계없이 한 표를 행사할 사람들이 많았다.
“……여래훈 씨의 미담을 보고 투표한 겁니다. 방송이 아니라요.”
최지나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플레이리스트’를 시청하지 않았고, 시청할 예정이 없는 이들도 여래훈에게 한 표를 던지고 있는 듯했다.
SNS상에서도 여래훈의 내장산의 성자로서의 활약과 이번에 있던 사건, 플레이리스트 이야기가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경연 외적인 사실이 경연을 흔들고 있었다.
“현재 투표 현황은 어떻죠?”
“여태까지는 여래훈, 독고미로가 1, 2위를 다투고 있었는데…… 이제 여래훈이 압도적으로 치고 나가고 있습니다.”
“여래훈 씨의 생방 공연은 아직이잖아요! 무대를 보지도 않고 투표를 한다고요?”
“이래선 우리 프로가, 미로가……!”
“차라리 지금이라도 중단하는 게 낫지 않아?”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당사자가 등장했다.
“저는 괜찮아요.”
독고미로였다.
옆에는 어두운 얼굴의 여래훈도 서 있었는데, 지금 스태프들의 대화 내용을 전부 들은 듯했다.
독고미로는 자신이 얼마나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독고미로는 단호한 목소리로 스태프에게 부탁했다.
“이대로 방송을 계속해 주세요.”
* * *
청룡과 염방열과 이야기를 마친 후.
나는 용족과 붉은 사자 멤버 사이에 섞여 플레이리스트를 관람했다.
염준열이 출연하는 방송을 감상하기 위해 들여놨다는 초고화질, 초대형 스크린과 영화관보다 더 뛰어난 음향 설비를 통해 보는 플레이리스트는 특별했다.
‘실제로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여래훈과 염준열, 인터뷰로 등장한 김유리.
우리 반 아이인 독고미로.
이들의 활약을 고급 시설에서 지켜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시청자 투표 집계 현황이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급변한 투표 그래프를 보고 그 원인에 대해 추측해 보려 할 때.
용제건이 말을 걸었다.
“의신아, 손님이 하나 더 온 것 같은데. 너 찾으러 온 것 같아.”
“네? 지금요?”
대체 누구길래 벌써 왔단 말인가.
용제건은 어느새 황홀해하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응, 입구에 와 있네. 마침 지금 광고가 나오니까 데리러 갈게.”
용족의 영역에 출입 가능한 그 호족은 용제건과 매우 가까운 모양이었다.
용제건이 저런 얼굴을 하는 걸 보니 그 호족의 정체가 누군지 짐작이 갔다.
“용제건의 유일한 친구가 왔군.”
“오랜만이야. 지금은 무슨 이름을 쓰고 있지?”
그리고 광고가 끝나기 전, 그 호족의 손님이 도착했다.
용족과도 교류가 있었던 건지 여기저기에서 그 손님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지금은 김신록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손님의 정체는 호족의 후예, 김신록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