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69화 (368/925)

59. 정체 (4)

진족과 후예.

둘은 공통점이 많고 함께 생활하는 경향이 있지만, 엄연히 다른 존재다.

그러나 용제건은 김신록을 당연하게 호족이라고 칭했다.

‘용제건은 아까 그 호족은 나한테 맡기라고 했지. 그래서 당연히 호족 중 누군가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김신록이 올 줄은 몰랐는데.’

용족들은 후예인 염준열을 자연스럽게 용이라고 부르고 용족의 일원으로 대한다.

그래서 호족의 후예인 김신록도 자연스럽게 호족으로 묶어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청룡을 비롯한 용들이 김신록에게 인사를 건네는 걸 보니 완전히 용제건의 호랑이 친구 취급이었다.

나와 용제건은 용족과 대화하는 김신록을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지켜봤다.

“김신록 선생님과 용족들은 예전부터 교류가 있었군요.”

“응, 나랑 신록이가 알고 지낸 지 좀 오래됐거든. 나와 친하게 지내니까 자연스럽게 다른 용들과도 안면을 텄지.”

용제건이 말하는 그 ‘좀 오래’가 몇천 년 단위인 건 안 물어봐도 뻔한 이야기일 것 같았다.

용제건의 말에 의하면, 둘이 알고 지내게 된 시점에서 김신록은 ‘어리고 천방지축’이었다고 하니까.

‘저번에 용제건과 김신록이 알게 된 계기가 된 사건에 대해 들었지.’

주오 아일랜드에서 기숙사로 돌아온 직후, 비탄의 웅녀와 만났다는 용제건이 그 비화에 관해 언급했다.

―어리고 천방지축이던 신록이를 꾀어낸 진족이 하나 있었어.

―그 진족은 시간을 오래 들여 신록이의 신뢰를 얻어 호족의 신역 밖으로 신록이를 빼냈지. 비탄의 웅녀 씨를 만나게 해 준다면서.

―그때 신록이가 웅족에게 붙잡혀서 험한 짓을 당할 뻔한 걸 내가 구했지.

용제건과 김신록의 교류가 오래되었다는 건 나도 안다.

그래도 강력한 힘을 가진 다른 진족의 후예가 본거지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건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내 의문을 읽은 건지 용제건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쪽을 봤다.

용제건은 친구가 자기 집에 오랜만에 놀러 와서 기분이 좋은지 흔쾌히 답했다.

“호랑이들이 괴롭히면 우리 집으로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했거든. 청룡에게 그 점을 강조해 출입 허가를 내려 달라고 부탁했더니 들어줬어.”

호랑이들이 김신록을 괴롭히는 상황은 쉽게 연상되지 않았다.

김신록이 비탄의 웅녀의 아들인 이상 미묘한 감정을 품는 호족이 있긴 할 거다.

그래도 뒤에 수장인 황지호가 버티고 있고, 스승인 백호군이 있는데 누가 괴롭히겠는가?

적호는 대놓고 티는 못 냈어도 아들을 심하게 아끼는데.

‘그 덕에 최근 김신록과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지.’

리플레이를 사용한 이후, 김신록과는 늘 호랑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만났다.

그 덕에 리플레이에 관해 이야기하기는커녕 제대로 인사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뭐, 여기에서도 이야기하기 힘들겠지만.’

일단 나부터 배신자가 있는 집단에서 리플레이에 관해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또 김신록은 신중한 인물이니 호족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그 능력에 관해 언급하진 않을 거다.

“자네가 올 줄 알았으면 곶감을 준비할 걸 그랬군.”

“지금이라도 준비하겠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청룡은 김신록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곶감을 내왔다.

김신록은 주저하다가 청룡 근처에 앉아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은 각 잡힌 자세로 곶감을 먹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나도 그 근처에서 곶감을 대접받게 되었다.

‘내 몫의 곶감은 필요 없는데.’

손님인 나와 김신록은 이곳의 가장 높은 분인 청룡과 염방열 주변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손님을 데려온 용제건 역시 이쪽 원탁에 앉았다.

플레이리스트의 중간 광고가 길어지다 보니 잡담도 길어졌다.

“용제건은 단 걸 싫어하지 않나. 그래도 신록이가 오면 억지로 참고 앉아서 먹는데, 그 얼굴이 아주 볼만하지.”

“취향에 안 맞을 뿐이지, 싫어하는 건 아닌데.”

김신록이 곶감을 두 개 먹는 동안 겨우 한 입 먹은 용제건이 태연하게 말했다.

‘취향에 안 맞는 거나, 싫어하는 거나 그게 그 말 아닌가?’

저번에 김신록이 ‘제 술친구는 단맛을 싫어해서요.’라고 한 걸 생각하면 그냥 싫은 게 맞는 듯하다.

용제건은 자신의 불호 식품이 드러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신록이가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건 오랜만이네. 준열이가 태어난 이후론 한 번도 안 왔었지. 청룡도 네가 오는 거면 언제든지 괜찮다고 했는데.”

“올 필요가 없는데 내가 왜 와.”

“그럼 지금은 올 필요가 있다는 거네.”

“…….”

속을 읽는 듯한 용제건의 말투에 김신록이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용제건은 김신록이 방문한 원인을 짐작하고도 저런 소릴 하고 있었고, 김신록도 그걸 알고 있어서 더 언짢은 것 같았다.

“오랜만에 제건이 얼굴도 보고, 우리에게 인사하러 온 게 아니었나?”

청룡의 질문에 김신록이 용제건에게 보여 준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고 예의 바르고 의뭉스러운 얼굴의 김신록으로 돌아왔다.

그 표정의 변화를 빠짐없이 지켜보던 용제건이 아주 좋아라 했다.

김신록은 용제건을 무시하며 미리 준비한 듯한 변명 거리를 늘어놓았다.

“늦은 시간이고 하니, 제가 담당하는 기숙사 소속 학생인 조의신 학생을 마중 나왔습니다.”

“늦었으면 자고 가면 되겠군. 요새 바람이 찬데 너나 네 제자가 밤바람 맞으면서 돌아다녀 봐야 좋을 일이 없지 않겠느냐.”

“그래, 가뜩이나 의신이는 다쳤기도 했고. 쉬고 가.”

“……조의신 학생이 다쳤습니까?”

갑자기 화살이 내 쪽으로 날아왔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용제건이 부담임의 면모를 보여 내 걱정을 해 준 건 기쁜 일이지만, 왜 이 타이밍에 김신록에게 저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김신록이 나에게 뭐라고 하기 전에 청룡이 철벽을 쳤다.

“그런 것도 있으니 기다리다가 준열이와도 인사하고 가라. 후예들끼리 통하는 이야기가 있지 않겠느냐. 하물며 지금 신록이는 우리 준열이가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저는…….”

“네가 묵고 가던 침소는 그대로다. 걱정 말거라.”

김신록이 뭐라고 말하기 전, 광고가 흐르던 스크린이 잠잠해졌다.

다시 플레이리스트 방송이 재개되려는 듯했다.

“아, 드디어 광고가 끝났다. 신록아, 보고 갈 거지? 우리 다 준열이 방송 보려고 기다리는 중이었거든.”

김신록도 여기에 앉아서 방송도 보고, 자고 가야 하는 분위기였다.

김신록 입장에선 구하러 왔다가 잡힌 상황이 되었다.

*    *    *

이대로 플레이리스트의 투표가 진행되면 압도적인 표 차로 여래훈이 우승할 것이다.

만약 그런 결말이 닥치면 가장 큰 피해자는 2위가 될 독고미로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독고미로는 방송과 투표를 계속할 것을 요청했다.

“경연 외적인 문제가 경연에 영향을 주는 건 당연해요. 저도 데스매치와 그 이전의 방송 회차에서 그랬잖아요. 제가 현역 은광고 학생이라는 경연 외적인 요소가 없었다면 본선에 오지 못하고 탈락했을 거예요.”

그 말에 예선에서도 심사위원을 맡았던 인물들이 입을 다물었다.

플레이리스트 예선 당시, 독고미로의 합격을 두고 심사위원 사이에서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수많은 카메라를 앞에 둔 독고미로의 노래는 형편없었기에 탈락시켜야 한다는 게 합격 반대파의 의견이었다.

합격 찬성파들은 독고미로의 나쁘지 않은 춤 그리고 어린 나이와 학벌을 들어 스타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독고미로도 자신이 경연 외적인 요소의 덕을 봤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래훈이 오빠는 경연에서 유리한 입지를 다지려고 내장산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오늘 결계를 친 게 아니잖아요. 오로지 선의로 행동한 결과니까 방송을 중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미로의 말이 맞긴 하지만, 지금 타이밍이 너무 안 좋은데…….”

스태프 중 하나가 독고미로를 염려해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독고미로는 제 뜻을 꺾지 않았다.

“제 친구들이 오늘 저를 무대의 위에 세우려고 싸우고 왔는데, 제가 그냥 무대의 아래로 내려갈 수는 없어요.”

가장 큰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독고미로의 의지가 확고하니, 스태프들이 더 반대 의견을 내지 못했다.

길어지는 광고 탓에 항의 댓글이 쏟아지고 있어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타 방송국의 뉴스에서 플레이리스트 사건을 보도하는 바람에 시청자가 크게 늘어 항의 댓글의 양이 평소의 수십 배는 되는 것 같았다.

결국 플레이리스트 제작의 총괄 책임을 지는 총연출가, CP가 결론을 내렸다.

“예정대로 촬영을 진행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무대에 설 여래훈은 메이크업의 수정을 받는 것과 동시에 오디오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며 무대 쪽으로 이동했다.

‘래훈이 오빠한테 미안할 필요 없다고 말해 줬어야 했는데…….’

독고미로가 조금 후회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염준열이었다.

“미로야, 고마워.”

“염준열 선배님……?”

“꼭 이 방송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싶었어. 그래도 미로의 입장을 생각해서 의견을 내지 못했거든.”

그렇게 말하는 염준열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이능파도 평소보다 잘 갈무리된 것 같았고 무엇보다 눈빛이 달랐다.

‘의상이나 화장 탓인가? 아니, 이능파가 평소와 다른데…… 촬영 전에 잠깐 뵈었을 때와 비교하면 뭔가…….’

독고미로는 염준열이 어딘가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그와 말을 주고받을 시간이 없었다.

“응원할게.”

염준열은 진행자가 아니라 학교 선배가 지을 법한 얼굴로 웃고 사회자석으로 향했다.

독고미로는 심호흡을 하고 자신의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걸었다.

방청석을 비추는 스크린에 자신의 반 친구들과 학교 선배들이 잠깐 등장하는 게 보여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    *    *

같은 시각, 심야의 천익산.

호족의 신목(神木) 천단수(天壇樹)의 앞.

제법 실체를 갖춘 천익산의 산령이 천단수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산령은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천단수의 나무 꼭대기 위로 날아올라 어둠 저편을 보거나 기둥뿌리 주변을 면밀히 살피는 게 무언가를 찾는 기색이었다.

한참을 천단수 주변을 왔다 갔다 한 산령은 원하는 걸 발견하지 못했는지 풀썩 나무 주변에 주저앉았다.

“…….”

산령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일어났다.

산령은 ‘그 능력’을 사용하기 전, 주변을 살피는 걸 소홀히 했다가 은광고의 괴짜 집단, 3학년 0반 일당에게 그 장면을 목도 당해 귀찮은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똑똑한 건지 미친 건지 구분이 안 가는 그 집단을 어찌저찌 구슬리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가끔 눈이 벌게져서 자신을 찾는 우기환의 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산령은 인기척이 없다고 확신한 후에야 천단수의 수피 위에 흐릿한 손을 올렸다.

파아아……!

가늘지만 또렷한 색의 빛줄기가 하늘로 뻗어 나갔다.

산령이 가만히 무언가와 교신을 하려 할 때였다.

“그 힘의 정체를 알 것 같군.”

서늘한 목소리에 산령이 화들짝 놀라 이능 사용을 중단했다.

산령은 기겁하여 목소리의 주인공을 올려다봤다.

은호가 일어난 이후, 산령이 죽을 힘을 다해 피해 다니던 백호였다.

호족 최고의 무재는 은신에도 능했는지, 산령의 감각을 감쪽같이 속인 듯했다.

백호는 산령이 쏘아 올린 빛줄기의 흔적과 제가 기억하고 있는 어느 힘의 잔재를 동시에 떠올리며 말했다.

“지금 네놈이 사용한 힘은 조의신도 사용했던 스킬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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