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정체 (5)
정식 플레이어들을 대상으로 한 오디션 프로젝트, 플레이리스트.
자정을 기점으로 생방송과 동시에 진행된 시청자 투표가 마무리되었다.
이제 플레이리스트 최종 우승자가 결정될 시간이었다.
남은 후보는 셋.
이 중 3위를 가장 먼저 발표했는데, 모두의 예상대로 3위는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부진한 무대를 보인 회사원 후보였다.
회사원 후보도 자신의 패배를 예상했는지 담담하게 소감과 팬들을 향한 감사 인사를 남기고 두 사람에게 응원하는 말을 남겼다.
“플레이리스트 마지막 재생, 이제 무대의 위에 남은 건 단 두 명의 플레이어뿐입니다!”
회사원 후보가 무대 뒤로 물러나자 이제 남은 사람은 독고미로와 여래훈 두 사람이었다.
시간을 끌라는 PD의 지시가 온 건지, 결과 발표는 바로 나오지 않았다.
스포트라이트는 심사위원 쪽으로 돌아갔다.
심사위원들은 올 게 왔다는 듯 긴장한 기색이었다.
“처음부터 두 플레이어를 지켜본 심사위원 분들에게 질문드리겠습니다. 최종 우승자는 두 사람 중 누가 될 거라고 예측하십니까?”
최지나의 질문에 심사위원들이 다들 난색을 표했다.
심사위원들은 서로 먼저 말하라며 마이크를 양보하면서 어색하게 웃고, 방청객석에서는 독고미로와 여래훈의 이름이 산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결국 심사위원 중 가장 연배가 있는 작곡가 겸 연예 기획사 사장이 마이크를 먼저 잡았다.
막상 마이크를 잡으니, 기획사 사장은 물 흐르듯이 자신의 의견을 늘어놨다.
“아…… 먼저 이번 생방 무대에 걱정이 많았다는 걸 밝힐게요. 사전 녹화 방송을 저도 같이 봤는데, 미로랑 래훈이가 너무 잘한 거야. 그래서 생방송 때 저만큼 할 수 있을까 하고 좀 걱정했죠. 생방송 보고 쓸데없는 걱정 했다 싶었지만.”
‘맞아, 맞아.’ 하고 다른 심사위원들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기획사 사장은 조금 뜸을 들이며 독고미로와 여래훈을 보다 다음 말을 이었다.
“두 사람 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최고의 무대를 보여 줬어요. 누가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하지만…….”
기획사 사장이 ‘하지만’이라고 운을 떼자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스튜디오에 있는 이들 모두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무대의 위에서 보여 주는 퍼포먼스만으로 평가받지 못해요. 무대의 아래에서 있었던 일로 소위 ‘떡상’, ‘떡락’ 하는 사람이 생기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저는 오늘 있었던 해프닝의 영향력이 클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내장산의 성자’가 우승할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렇게 말하자 여래훈의 이름을 외치는 환호성이 크게 터졌다.
기획사 사장은 여래훈을 향해 한 번 손을 흔들어 보이곤 옆 사람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다음으로 마이크를 받은 건 국내 음원 관련 신기록을 몇 개 보유 중인 싱어송라이터였다.
“방금 사장님이 하신 말씀에 전부 동의합니다. 대중과 카메라 앞에 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의견일 거예요. 그래도…… 큰 사건이 터져도 거기에 묻히지 않고 살아남는 스타도 있잖아요.”
그 말에 심사위원 중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가 몇 있었다.
큰 사고를 치고, 악재에 시달려도 살아남는 스타는 늘 존재했다.
“오늘 독고미로 씨는 이계가 발생한 이후에 사전 녹화를 해야 했고, 여래훈 씨가 압도적인 표 차로 앞서가는 상황에서 생방송 무대에 올라가야 했어요. 거기에 독고미로 씨 무대 직전에 좀 트러블이 있었죠?”
직설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싱어송라이터가 날카로운 눈으로 스태프 쪽을 봤다.
독고미로가 무대에 오르기 직전, 보도국에서 독점 취재를 하겠다며 스튜디오로 난입하는 트러블이 있었다.
보도국의 카메라에 전원이 켜지고 스튜디오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무대에 오른 독고미로가 보도국의 카메라를 향해 조금 굳은 시선을 보냈을 뿐.
독고미로는 예상외의 상황 앞에서도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무대에 서면서 트러블이 없던 건 아닌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생방송 중에 스튜디오 안이 시장통이 되는 경우가 어딨죠? 카메라 팀하고 독고미로 씨가 흔들리지 않아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대형 사고가 났을 거예요.”
보도국에선 플레이리스트 측과 관계자에게 취재 허락을 받았다며 배짱을 부렸지만, 아무도 허락을 하지 않은 게 밝혀졌다.
그들이 제시한 ‘취재 허락 증거’에는 싸우지 않는 플레이어에게 불만을 표하는 스태프들의 욕설과 빨리 와서 취재나 좀 해 달라는 불평이 적혀 있었다.
독고미로는 무대를 전하기 위한 카메라가 아닌, 그녀를 기삿거리로 만들기 위한 카메라 앞에도 세워졌다.
그럼에도 독고미로는 최고의 무대를 선보였다.
그 무대 덕에 크게 벌어졌던 표 차는 점점 좁혀졌다.
투표 마감 30분 전에 실시간 득표수가 블라인드 처리되었는데, 그 시점엔 누가 우승자가 될지 장담을 하기 어려울 만큼 득표수에 큰 차이가 없었다.
“그 상황에서 독고미로 씨는 이 정도의 무대를 선보이고, 표차를 크게 줄여 갔잖아요. 독고미로 씨는 무대만으로 그런 결과를 만든 거예요. ”
그 말을 마치자 독고미로를 응원하러 온 은광고 방청석 쪽에서 ‘맞아! 독고미로 우승해!’, ‘독고미로 데뷔해!’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독고미로의 선배라고 밝힌 은광고 학생들이 내지르는 사자후였다.
“저는 독고미로 씨의 무대가 인상 깊었어요. 전 독고미로 씨에게 한 표 던집니다.”
그 말에 독고미로가 밝게 웃으면서 꾸벅 인사했다.
긴장한 탓에 손끝이 떨리긴 했지만, 응원해 주는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감사의 미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다섯 명의 심사위원이 총평을 마친 결과, 3 대 2로 여래훈의 우승을 예상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두 명의 심사위원이 한 발언에 여래훈의 우승을 점친 이들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독고미로가 우승할 가능성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지금 이 태블릿 디바이스에 쓰인 이름은 하나뿐입니다.”
심사위원의 총평이 끝나고 우승자 발표 시간이 도래했다.
늘 그랬듯이 최지나와 염준열이 PPL로 지원받은 태블릿 타입 디바이스를 손에 들고 사회석에서 카메라를 응시했다.
“플레이리스트 마지막 무대를 장식할 최종 우승자를 지금 공개합니다!”
팟!
염준열의 말에 두 후보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를 제외하고 무대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
독고미로와 여래훈은 카메라를 마주 보고 서서 서로 손을 잡고 있었는데, 카메라가 이어진 손을 클로즈업해 화면에 비추었다.
“플레이리스트, 최후의 플레이어는……!”
드럼롤 소리가 정점에 다다른 순간.
최지나가 마침내 입을 열어 우승자의 이름을 발표했다.
“……여래훈! 축하드립니다!”
펑! 퍼펑!
여래훈의 이름 발표와 동시에 무대 곳곳에서 알록달록한 꽃가루가 터져 나오고 조명이 여래훈을 비추었다.
여래훈이 생방송에서 불렀던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여래훈이 이능을 각성하여 래퍼의 꿈이 좌절되고 다시 플레이리스트에 서게 된 순간까지를 가사로 담아낸 자전적인 곡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과 아주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래훈이 오빠, 축하해요!”
여래훈은 우승한 이후에도 실감이 나지 않는 듯 멍하니 있다가 독고미로의 축하 인사에 정신이 든 듯 그제야 표정을 무너뜨렸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던 여래훈이 독고미로를 향해 웃었다.
“고마워.”
꽃다발과 상패를 든 사회자가 무대의 위로 올라오는 짧은 시간, 두 사람은 포옹을 마치고 인사를 나눴다.
독고미로는 여래훈을 생각해 애써 눈물을 참고 무대의 아래에서 자신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있는 은광고 방청객 쪽을 봤다.
그녀의 시선이 한이 앞에 잠시 멈췄다가 이내 다른 곳을 향했다.
* * *
플레이리스트 마지막 방송이 끝났다.
최종 우승자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여래훈으로 결정되었다.
‘경연 외적인 요소가 컸던 게 아쉽지만, 두 사람 다 멋진 무대였어.’
오로지 염준열을 보기 위해 플레이리스트를 시청하던 용족과 붉은 사자 팀원들도 두 사람의 무대를 인상 깊게 본 듯했다.
“내장산의 성자라고 했나. 나쁘지 않군.”
“저 아이는 준열이 후배라고 했지. 과연 준열이 후배다운 실력이다.”
심지어 김신록도 곶감을 먹는 걸 멈추고 무대를 멍하니 보기도 했다.
용제건이 그 광경을 보면서 히죽거렸는데, 김신록이 뒤늦게 그걸 알아채고 정색하기도 했다.
“은광고 학생이 무대의 위에 섰으니까 집중해서 보는 건 당연하잖아. 민망해 하지 마.”
“누가 언제 뭘 민망해했는데.”
“신록이가 플레이리스트 방영 중에 넋 놓고 TV 시청한 걸 민망해했어.”
“안 그랬다고!”
용제건은 김신록을 놀려 먹는 게 인생의 낙인 듯하다.
나이가 천 단위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유치한 말싸움을 하는 용과 호랑이를 두고 청룡이 흐뭇한 얼굴을 했다.
“여전히 둘은 사이가 좋군.”
사이가 좋은 건가?
하긴 용제건이 저렇게 대놓고 놀리고, 그걸 다 상대하면서 받아 주는 김신록을 보니 많이 친한 것 같긴 하다.
어쨌든, 둘의 유치한 말싸움에 이득을 본 건 나였다.
‘덕분에 김신록에게서 불필요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서 좋네. 은광고 쪽으로 돌아가자는 말도 안 나오고.’
용제건이 호족의 손님이 오면 맡기라고 하더니 진짜 잘 맡아 줬다.
김신록은 용제건의 페이스에 휘말려 내가 청룡과 함께 자리를 뜨는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염방열은 방송국 쪽에 파견된 붉은 사자 팀원들에게 보고를 받으러 자리를 비웠으나, 청룡은 나를 처소로 안내해 주겠다며 앞장섰다.
‘용족의 수장이 고등학생을 직접 안내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 생각은 기우로 끝났다.
청룡이 염준열의 학교생활에 관해 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른 용족들도 염준열이 학교에선 어떻게 행동하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뭘 하며 놀고 누구와 어울리는지 등등을 듣고 싶어 했으나 청룡이 권력으로 그 이야기를 독점하는 꼴이 됐다.
의심을 한 톨도 받지 않은 상태로 무사히 처소까지 도착했다.
“오늘은 이만 쉬거라. 자세한 건 내일 이야기하지.”
청룡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준비된 방에 앉으니 갑작스럽게 피로가 밀려왔다.
곽경구의 광림을 써서 몸을 치료하고, 용왕신의 무녀들의 힘을 빌려 이능파를 정돈했다고 하나 정신적인 피로는 그대로인 것 같았다.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을 때는 사고가 매우 느려져 있었다.
느려진 사고로 나는 부반장으로서 플레이리스트 출연자, 독고미로에 관해 떠올렸다.
‘독고미로가 무대의 위에 설 기회가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중간에 무대를 보지 못하고 뜬 것도 있고,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돕는 게 좋지 않을까.
독고미로가 다시 무대의 위에 선다면 어떤 방식이 좋을지, 내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청룡이 다시 온 건가? 아니면 용제건이 왔나?’
후보를 몇 명 생각하며 노크 소리에 응하려 할 때, 밖으로부터 미성이 들렸다.
“의신아, 일어나 있어?”
밖에 서 있는 건 내 제자, 염준열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