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75화 (374/925)

59. 정체 (10)

아침 이른 시각, 은광고 거주 구역의 1학년 건물.

손목에 착용한 밴드 타입의 디바이스에 진동이 울리기 전, 한이가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손목에 진동이 느껴져 한이는 자신이 제시간에 일어났음을 인지했다.

막 잠이 깬 바람에 몽롱한 정신으로 한이는 지난 밤 꾼 꿈을 떠올렸다.

‘……오늘도 똑같은 꿈을 꿨어.’

한이는 입학한 후부터 자주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눈을 가린 누군가가 한이를 내려다 보는 꿈.

그 형체는 점점 또렷해지고 있다고 하나 여전히 입술을 읽기 어려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뭐라고 했더라. 이번엔 알아 볼 수 있던 단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

한이는 흐릿해져 가는 기억을 더듬어 그 눈을 가린 누군가의 입술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보통 사람이 한이가 본 것을 봤다면 그저 얼굴과 입술로 추정되는 그림자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한이의 입술의 움직임을 읽는 것에 익숙했고, 그녀의 관찰력과 기억력은 플레이어 중에서도 우수한 축에 속했다.

‘같은 단어를 여러 번 반복했어. 내가 그 단어를 알아들을 때까지 계속 말하는 것 같았어…….’

한이는 태호권 훈련 중에도 그 ‘누군가’에 관해 생각했다.

입술의 움직임을 떠올리고, 흐릿한 형체가 흔들린 정도에 따라 어떻게 움직였을지 추측했다.

머릿속에서 수십 차례 보정 작업을 거쳤을 때, 한이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어떤 단어가 떠오르자, 한이는 자신도 모르게 태호권 기본자세인 ‘호랑이 발걸음’을 하다 멈춰섰다.

‘맞아. ‘정체’라는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한 것 같아. 내가 ‘정체’에 관해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게 분명해. 눈을 가린 누군가의 정체라면 딱히 말하지 않아도 신경 쓰고 있는데, 왜 굳이 그런 얘기를 하는 거지…….’

단어를 하나 밝혀내자 한이의 생각은 점점 길어졌다.

한이는 생각하는 동안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그사이 태호권 소모임의 고문인 공청훤이 한이의 앞에 섰는데, 기척에 민감한 한이가 그의 접근을 깨닫지 못하고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1분 넘게 한이의 앞에서 기다리던 공청훤이 이능파를 뿜었다.

파아앗!

강렬한 이능파가 가까이에서 감지되자 한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번쩍이다 사라진 이능파 불꽃 너머로 공청훤의 얼굴이 보였다.

“다행이네요, 아무리 집중력이 흐트러졌다고 해도 이능파를 감지하지 못하면 추가 지도를 하려 했거든요.”

이계와 에너미의 위협에 맞서는 플레이어로서 어떤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이능파의 감지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한이는 제 감각이 무뎌지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하면서도, 공청훤의 접근을 인지하지 못했던 걸 자책했다.

태호권 소모임 활동에 집중하지 못한 것도.

“연습에 집중하지 못 하고 딴생각했어요. 죄송해요…….”

한이가 곧바로 사과하자 공청훤은 질책하지 않았다.

그 대신 엉성해진 한이의 기본자세를 고쳐주며 말을 걸었다.

“어제 미로가 출연한 플레이리스트 방송을 봤어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들었죠.”

독고미로와 연이 있는 공청훤이라면 반드시 봐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방송을 시청하고 방송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들었나 보다.

공청훤은 다정하게 한이의 노고를 치하했다.

“한이는 보호대 없이 싸우는 데에 익숙하지 않을 텐데, 미로와 방송국에 있는 분들을 위해 싸웠죠? 고생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그 음성이 얼마나 따뜻하게 들릴지 알 것 같았다.

한이도 부드럽게 마주 웃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몇 없는 태호권 소모임 소속 학생들이 방송국에서 벌어진 이계 공략에 관해 이야기하고, 한이에게 이것저것 묻거나 그녀를 칭찬하였다.

그러다 보니 태호권 아침 훈련이 다소 느슨해지긴 했지만, 공청훤이 이를 눈감아 줬기에 잔소리를 듣는 일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럼 수업 시간에 만나요.”

“네……!”

공청훤과 이야기를 나누고 칭찬을 들은 덕에 한이는 다소 나아진 기분으로 학교로 향했다.

‘아직 머리가 복잡하지만, 괜찮을 거야.’

꿈속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누군가와 어느 단어.

플레이리스트 최종 경연에서 패배한 독고미로.

어딘가 마음에 걸리는 과거 독고미로의 행보.

그것에 관해 뭔가 짐작하고 있는 듯한 정해온.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으나 이중 몇 가지는 오늘 해결될 것 같았다.

‘오늘 방과 후에 정해온 선배와 이야기하고 나면 뭔가 알 수 있겠지…….’

한이는 정해온과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과 장소를 다시 되새기며 1학년 0반 교실로 향했다.

한이도 다소 이르게 등교한 편이었는데, 그녀보다 일찍 온 반 아이들이 많았다.

반 아이들은 한이가 교실에 온 걸 보자 반갑게 맞이한 후,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워줬다.

대화의 주제는 현재 등교하지 않은 아이에 관해서였다.

“그럼 대석이는 오늘 학교 안 온대?”

“응. 협회 연구소 일로 바쁜가 봐.”

“오후 늦게 불러내더니 진짜 일이 많은가 보다.”

김유리는 조금 쓸쓸해 하는 민그린을 달래줬다.

민그린은 송대석처럼 대놓고 티 내지는 않고 있지만, 그와 보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게 서운한 듯했다.

목우람은 두 사람이 연인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의문을 표현하려 하다가 맹효돈에 의해 빠르게 제지당했다.

반 아이들은 두 사람이 사귀도록 밀어주는 건 자제하고, 당분간은 지켜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레나? 디바이스가 고장 났습니까? 아까부터 아무 것도 없는 홀로그램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목우람의 말을 들은 권레나가 디바이스 홀로그램에서 눈을 돌리며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응? 아, 언니랑 연락이 계속 안 돼서…… 어제 일도 있어서 바빠서 그런가 봐.”

“그때 협회 분들이 방송국에 있던 남궁물산 직원분들 데려가셨죠. 아직 조사가 안 끝났나 봅니다.”

“원래 이런 조사는 쓸데없이 오래 걸리잖아. 신경 쓰지 마.”

권레나가 반 아이들의 위로에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그램을 껐다.

그때, 문이 열리고 사월세음이 밝게 인사했다.

“다들 안녕하세요! 저 방금 등굣길에 염준열 선배님과 만났어요!”

사월세음이 등교하며 화제가 자연스럽게 전환되었다.

사월세음이 ‘염준열 선배님’을 언급하자 교실 한구석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호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 옆에 조의신은 없었나?”

“네? 의신이는 없었어요.”

“……부담임이나 1학년 1반 담임은?”

“용제건 선생님이랑 김신록 선생님이요? 아뇨.”

그 대답을 듣자 황호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대신 염준열과 같은 학생회 소속이라 그에 관해 잘 아는 김유리가 되물었다.

“용제건 선생님도 안 계셨어? 거의 매일 같이 염준열 선배님이랑 등교하셨는데.”

“오늘은 안 계셨어요. 아, 비행 중에 교문 앞에서 붉은 사자의 팀 로고가 박힌 에어 셔틀을 봤는데, 그 안에 팀 마스터 ‘홍염의 제왕’님이 타고 있는 것 같았어요!”

“홍염의 제왕이면…… 염준열 선배님의 아버지셨지?”

“네! 그분은 교문 안까지 따라오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지만, 염준열 선배님이 말리니까 그냥 교문 앞에서 기다리시더라고요.”

그 말에 다들 안 봐도 그 장면이 상상이 간다는 얼굴을 했다.

아들 바보 염방열이 염준열을 얼마나 아끼고 자랑스러워 하는지는 전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아니, 붉은 사자가 세계 10대 프로 플레이어 팀이라는 걸 고려하면 세계급으로 알려진 사실이라 봐도 될 것이다.

“염준열 선배님이 저희가 한 이계 공략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셔서, 저도 궁금한 걸 물어봤어요.”

사월세음이 염준열에게 물어봤다는 궁금한 것에 관해선 몇몇 눈치 없는 반 아이를 제외하고 모두가 짐작했다.

염준열과 합류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용제건과 사라진 조의신의 행방.

사월세음은 청소년 수련회를 기점으로 조의신을 매우 잘 따르고 있었고, 염준열은 조의신의 행방을 알고 있을 법했다.

“의신이한테 무슨 일 있었대?”

김유리가 정확히 핵심을 집어 묻자 사월세음이 열심히 답했다.

“자세한 건 설명해주시지 않으셨는데요, 염준열 선배님 쪽에도 교전이 있었나 봐요. 의신이는 교전 후에 치료할 겸, 쉴 겸 용족의 거처로 데려갔대요. 오늘은 등교하지 않을 것 같대요.”

“그럼 오늘은 의신이랑 대석이는 결석이야? 함근형 선생님이 섭섭해 하시겠다.”

김유리는 함근형을 언급하긴 했으나 김유리 본인도 그 말을 하는 동안 섭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유리는 아쉬워하다가 다시 말을 돌렸다.

“아, 맞다. 마침 의신이 없으니까 그 얘기 할까. 얘들아, 주말에 바빠?”

“딱히 별일 없는데. 이번 주말에 뭐 있냐?”

“토요일은 10월 31일 핼러윈이에요. 혹시 반 아이들끼리 모여서 파티할래요? 만약 파티하게 되면 미로도 왔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핼러윈이랑 의신이가 없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어?”

“하하하, 핼러윈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야.”

김유리가 혹시 조의신이 갑자기 등장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 문 쪽을 보며 경계하다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황호는 김유리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한 듯했으나. 다른 아이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있잖아, 이번 주 일요일은 의신이 생일이야!”

*    *    *

내 제안을 들은 김신록은 처음에는 당황한 얼굴을 하다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 곤혹스러운 얼굴엔 뿌리 깊은 자기 비하적인 태도가 묻어났다.

“조의신 군의 의도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성국언 학생은 국민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국회의원 아닙니까? 그런 인물이 진족과 후예의 존재를 멀리하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죠. 언젠가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하지만…….”

김신록은 나를 보는 대신 옥색의 공간으로 덮인 사기그릇의 조각을 내려다봤다.

“그 계기가 제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김신록은 딱 잘라 내 제안을 거절했다.

김신록이 거절할 가능성도 예상하긴 했는데, 생각보다 태도가 단호해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내 질문에 김신록이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는 나쁜 말로는 고집이 셌고, 좋은 말로는 자기 주관이 뚜렷했죠.”

김신록은 성국언을 ‘그 아이’로 칭했다.

내 입장에서 봤을 때 성국언은 나보다 한참 선배에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한 어른이지만, 김신록은 은연중에 성국언을 ‘아이’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제가 무슨 말을 한들, 그 아이는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공연히 제 정체를 알아챌 가능성이 있죠. 그랬다간 진족과 후예에 관한 경계심이 더 커질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김신록은 할 말이 더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용제건은 내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겠다는 듯, 한 손으로 웃는 입을 가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김신록은 고3이던 성국언만을 알고 있으니까,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할지 몰라.’

김신록은 은연중에 성국언의 최근 근황에 관해 아는 것을 피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우선 김신록이 성국언의 현재 모습에 관해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함근형 선생님과 성국언 선배님 사이가 어땠는지 기억하고 계시나요?”

“……아주 좋지 않았죠. 원칙주의자셨던 함근형 선생님과 다소 개구지던 성국언 학생은 물과 기름 같았습니다.”

김신록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성국언이 한 일을 그냥 ‘다소 개구지던’이란 말로 정의할 수 있나?

어쨌든 나는 내가 목격한 두 사람의 모습에 관해 말하기로 했다.

“두 분이 얼마 전에 홍천에서 만난 적이 있었어요.”

나는 성국언과 함근형 선생님이 마주쳤던 일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내 말이 이어질수록 김신록의 표정이 점점 변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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