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정체 (9)
소리의 근원지에 시선을 돌리니 박살 난 사기그릇의 조각 사이로 부러진 젓가락이 흩어진 게 보였다.
젓가락에 지나치게 힘을 준 상태로 사기그릇을 찍는 바람에 그릇과 젓가락이 동시에 부수어진 것 같았다.
김신록은 일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식기의 잔해를 보고 황망한 얼굴을 했다.
인간 사이에 섞여 교사를 하며 표정을 감추는 게 익숙해진 건지 금방 표정을 감추었지만, 이미 나나 용제건은 김신록의 동요를 눈치챈 상태였다.
‘5천 년을 넘게 산 후예가 이제 와서 힘 조절 하는 법을 잊었을 리가 없는데.’
김신록은 용제건이 한 말에 동요한 게 분명했다.
‘성국언과 김신록 사이에 뭔가 있었나? 아니, 어쩌면 용제건과 성국언 사이에도 무슨 일이 있던 걸지도 몰라.’
머릿속에서 플마고 스토리를 다시 떠올리며 세 명의 접점을 찾아보려 했지만, 프롤로그에서 이름도 없이 죽는 김신록의 비화가 나올 리가 없었다.
결국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셋의 성정이나 배경 등을 고려해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알기 쉬운 건 성국언 쪽이었다.
‘성국언은 진족과 후예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 또 성국언은 눈에 깃든 이능을 발동한 상태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상대의 정체를 꿰뚫어 볼 수도 있어.’
성국언은 이전에 내가 인간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이능을 발동한 상태로 나와 대화를 나눴다.
내가 인간이라고 확신한 후에야 성국언이 이능을 풀었다.
‘용제건은 진족, 김신록은 후예고 용제건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지 않아.’
용제건이나 김신록이 성국언과 접점을 가지려 해도 성국언 쪽이 거부했을 거다.
하지만 셋의 접점이 하나 존재하긴 했다.
‘은광고에서 만났나? 스승과 제자로.’
김신록은 함근형 선생님과 비슷한 연배라는 설정이지만, 학생부장 함근형 선생님보다는 연차가 부족한 상태라고 알고 있다.
함근형 선생님은 처음 부임했을 때 고3이던 성국언을 만났다.
그렇다면 함근형 선생님보다 늦게 부임한 김신록은 성국언과 접점이 없을 거다.
김신록이 부임한 시점에 성국언은 이미 졸업한 이후일 테니까.
‘황지호가 여러 이름과 나이대로 신분을 갖고 있듯, 김신록도 그렇겠지. 성국언과는 김신록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전에 만난 게 아닐까? 그때 김신록과 성국언은 스승과 제자로서 만난 걸지도 몰라.’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지만, 이 추측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점점 그럴싸한 가설에 다다랐다.
나는 계속 생각을 이어 갔다.
‘예전 신분이 인간의 평균 수명을 넘었거나, 정체가 들통나 쓸모가 다했다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사망 혹은 실종으로 처리해 신분을 지우지 않았을까.’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성국언은 어린 나이에 스승을 잃었던 게 된다.
성국언은 학교의 체제를 한 번 뒤엎으며 질풍노도의 고교 시절을 보낸 인물이다.
그런 10대 시절에 정을 붙인 교사가 사망했거나 실종되었다면 정 많은 성국언이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짐작도 안 간다.
성국언의 그런 모습을 봤다면 김신록이 저렇게 동요하는 게 이해가 간다.
‘……아니, 내 추측이 전부 틀렸을 수도 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기엔 정보와 단서가 부족해.’
그 정보와 단서는 어쩐지 용제건이 줄 것 같았다.
저렇게 실실거리며 나와 김신록 앞에서 성국언의 이름을 꺼냈으니 그 이유도 들려 줄 것 같았다.
“……아.”
잠시 멍하니 있던 김신록이 황망한 얼굴로 그릇 조각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김신록보다 빠르게 움직인 존재가 있었다.
딱! 파아앗!
손가락을 튀기는 소리와 함께 김신록 주변이 크고 작은 옥색의 공간으로 뒤덮였다.
용제건이 소환한 크고 작은 공간이 식기의 잔해를 감싸고 있었다.
사기그릇의 조각이 아주 잘게 흩어져 있었음에도 용제건은 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공간술로 묶어 버렸는데, 과연 용족의 총아답게 정교하게 힘을 다루어 냈다.
“나 때문에 깬 거잖아. 내가 처리할게.”
“내가 깬 건데.”
“그래. 내가 한 말 때문에 네가 깬 거지.”
용제건은 김신록을 실컷 동요시킨 주제에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김신록이 뭐라 하긴 했지만 용제건은 실실 웃으면서 모든 말을 무시하고 새 식기와 음식을 주문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게 참 유희용다웠다.
김신록이 다시 식기를 들고 식사를 하려 했을 때, 용제건이 다시 폭탄을 던졌다.
“의신이는 이미 국언이랑 신록이가 무슨 사이였는지 눈치챈 것 같은데.”
딱! 카앙!
김신록이 용제건을 향해 날린 압정과 공간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김신록의 공격을 예상한 듯 용제건은 보란 듯이 공간술을 전개해 압정을 막아 냈다.
“의신이는 네 정체를 알고 있고, 국언이와도 교류가 있어. 그리고 나는 국언이와 만날 생각이고. 이런 상황이니 의신이라면 늦든 빠르든 알아냈을걸? 그냥 네 입으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숨길 일도 아니잖아.”
용제건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내 추측은 거의 맞는 것 같았다.
김신록은 몇 차례 용제건에게 압정을 던졌으나 용제건은 아무렇지 않게 전부 공간술로 막아 버렸다.
김신록은 공격을 날릴 때마다 웃음이 짙어지는 용제건이 꼴 보기 싫은 건지 공격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봤다.
“조의신 군은 어떤 추측을 하고 있습니까?”
이 이야기는 김신록의 개인사와 크게 연관이 있지만, 이미 짐작한 걸 모르는 척해 봤자 김신록이 기뻐할 것 같지 않았다.
‘모르는 척해 봤자 용제건이 속을 다 꿰뚫고 그 특유의 화법으로 원하는 답을 유도하겠지.’
용제건이 지금 몹시 고양되어 있는 걸 보니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용제건의 저 얼굴을 보니 내가 말을 돌려 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김신록에게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긴 했으나 나는 솔직하게 내가 생각한 바를 정리해 말했다.
“김신록 선생님이 지금 이름을 쓰기 전에도 다른 이름으로 은광고에 재직하셨다면, 성국언 선배님과 접점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용제건 선생님도 은광고에서 성국언 선배님을 만났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내가 말을 마치자 용제건과 김신록의 희비가 극명히 갈렸다.
용제건이 좋아 죽는 얼굴을 하는 걸 보면 내 추측이 다 맞은 것 같았다.
용제건은 김신록에게 그 표정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있긴 했지만, 아마 김신록도 지금 용제건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을 듯했다.
김신록은 용제건을 제재하는 걸 포기한 건지 한숨을 한 번 짧게 쉰 후 말했다.
“……네. 성국언 학생은 제 제자였습니다. 이름은 다르나 이전 신분도 교사였는데, 그때 아직 고등학생이던 성국언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김신록은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 얼굴엔 희미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김신록도 성국언을 아꼈던 게 분명했다.
그 얼굴을 보니 추측이 하나 더 떠올랐다.
‘김신록과 성국언은 혹시 담임과 학생으로서 만난 게 아닐까?’
성국언은 3년 내내 0반 소속이었다고 했다.
보통 담임 교사는 매년 교체되지만, 문제아와 괴짜가 모인 0반의 담임은 3년 내내 계속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임연화가 담임을 하고 있는 3학년 0반도 작년에도 그녀가 담임을 했었다.
또, 제갈재걸이 맡은 2학년 0반의 경우 이미 영구 담임이 예정되어 있지 않은가.
‘3년 내내 담임과 학생으로 만났다면 정이 쌓일 만하지.’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물었다.
“혹시 0반 담임이셨어요?”
“……네. 3년 내내 성국언 학생의 담임이었습니다. 0반 담임은 피하려고 했는데, 저 말고는 성국언 학생을 말릴 만한 교사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성국언은 1학년 때부터 은광고에서 전설 취급을 받은 듯했다.
비교하긴 어렵지만 성국언은 금찬솔과 왕찬솔 같은 똘기를 가지고, 도원우기환 급으로 우수한 성적을 가진 셈이니까.
“성국언 학생은 인상 깊은 학생이었습니다. 위인전에 나오는 유년 시절을 현실에 구현한 듯한 삶을 살고 있었죠.”
한 번 입을 연 김신록은 옛 제자 성국언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름 거리를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이 두터운 성국언 학생은 저를 많이 따랐습니다. 성국언 학생은 진족과 후예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그는 그 능력으로 제 정체를 확인해 보지도 않을 정도로 저를 신뢰했죠.”
인간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있으나 김신록의 정체는 호족과 웅족의 후예.
즉, 성국언이 꺼리는 존재다.
거기에 김신록이 지금 하는 말로 보았을 때 성국언이 진족과 후예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잘 아는 것 같다.
“신분을 위장하며 지내는 만큼 학생이나 교사, 어느 쪽과도 가깝게 지내려 하지 않았는데…… 3학년이 되었을 때, 성국언 학생이 저를 믿고 지익회 창립 건에 관해 상담하는 걸 보고 제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성국언이 학생회장이 된 후의 은광고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교내 분위기는 악화일로를 걷고, 교사들끼리도 의견이 갈리고 이사진의 농간에 의해 학생, 교사들의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 속.
성국언은 담임인 김신록을 믿고 따랐다고 한다.
김신록은 일부러 출장을 자주 가서 자리를 비우고 학급 관리를 부담임이던 함근형에게 떠넘기는 등 거리를 두려 노력했으나 소용 없었던 듯했다.
“성국언 학생은 졸업식 때에도 직접 저를 찾아와 자주 찾아뵙겠다며 인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이르지만 예전 신분을 빨리 처분하기로 했습니다.”
“……처분이요?”
“졸업식이 끝난 후, 예전 신분은 조용히 병사한 것으로 처리해 뒀습니다.”
그건 성국언을 칼로 찌른 거나 다름없는 행동 같은데.
말 그대로 성국언이 믿고 따르던 은사를 졸업과 동시에 죽인 셈이 아닌가.
김신록은 성국언과 지나치게 가까워진 걸 ‘실수’라고 표현했긴 했지만, 내 눈에는 저쪽이 실수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성국언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의 말이었다.
내가 김신록의 입장이었다면 비슷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옛 신분을 사장했다는 말을 끝으로 김신록이 조용해졌다.
김신록이 말을 마치자 기다린 듯 용제건이 말했다.
“그 신분을 사장할 때, 장례식장의 상주는 나였어. 적호 씨를 비롯한 호족이 나서긴 좀 그렇잖아? 직장 동료이자 신록이 친구로서 내가 상주를 맡았지.”
용제건이 상주를 맡았다고!
상상도 안 가는 말이었지만, 김신록이 아무 반박도 안 하는 걸 보니 진짜인 것 같았다.
“조용히 신분을 사장하기 위해 은광고 쪽에도 장례에 관해 알리지 않았어. 고인의 유지라고 하면 보통 존중해 주니까 별문제 없었지. 그런데 국언이가 어떻게 알고 애들을 모아서 조문하러 왔더라고.”
용제건의 말에 김신록이 눈을 질끈 감았다.
김신록도 성국언이 가짜 장례식에 조문 온 걸 아는 듯했다.
“신록이의 죽음을 방관했다면서 국언이가 나를 원망하더라. 국언이가 그렇게 평정심을 잃고 소리를 지르는 건 처음 봤어.”
성국언이 화통한 면은 있어도 싸움에서 평정심을 잃는 타입은 아니다.
국회에서 어떤 개싸움이 벌어지더라도 여유 있는 얼굴로 웃으며 대처하는데, 장례식 날에 상주에게 소리를 질렀다고?
성국언이 김신록을 얼마나 잘 따랐는지,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김신록이 보이는 반응을 봤을 때, 김신록 역시 성국언에게 죄책감을 갖고 그리워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김신록의 성격상 나설 리가 없지. 아버지와도 5천 년을 저리 지냈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꺼낸 용제건 쪽을 봤다.
용제건은 기대 어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나? 아니, 내가 여기에 끼어도 될 일인가?’
결국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현 상황에 관해 생각했다.
성국언의 가치관.
김신록의 가짜 신분과 선택.
용제건의 반응.
염방열에게 한 부탁.
모든 요소를 종합하고 생각한 후, 나는 입을 열었다.
“김신록 선생님,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