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정체 (8)
은광구 황명호 대저택의 별채.
늦은 시각이지만 어린 모습을 한 황호와 은호는 잠들 생각이 없는지 찻잔을 계속 기울였다.
어린 모습을 한 황호의 분신은 입맛이 다르기에 차보다는 아이스크림을 선호했으나 은호의 심기가 평안해 보이지 않아 얌전히 차를 마시기로 했다.
방송국과 협회 측에 파견된 호족과 용족 쪽으로 보낸 김신록에게 디바이스로 보고를 받던 황호가 딱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의신이 다쳤다고?”
“적호 님의 아드님께서 보고하신 내용인가요? 신록 님이 뭐라고 하셨죠?”
“설명하지.”
김신록이 보낸 디바이스 메시지에 조의신이 부상당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현재 눈에 띄는 상처도 보이지 않고 이능파도 안정되어 있으나 용제건이 조의신이 다쳤다고 발언했다는 게 김신록의 설명이었다.
황호의 말을 듣던 은호가 물었다.
“그 외에 평소와 다른 점은 없나요? 옷에 피가 묻어 있다거나, 피 냄새가 남아 있다거나.”
“교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다고 하는군.”
찻잔을 쥐고 있는 은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교복을 입고 있던 조의신이 용족의 본거지에서 평상복을 입을 만한 이유는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옷이 상할 만한 일이 있었나 보군요.”
은호의 말에 황호도 동의했다.
황호는 자신의 추측을 덧붙였다.
“그렇겠지.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 보인다는 건 치료를 받았나 보군. 이능파를 안정화시킬 만한 치료 능력이라면, 용왕신의 무녀가 나선 건가.”
“용왕신의 무녀가 치료했다면 의신이 형이 용들이 감사를 표할 만한 일을 했다는 뜻이겠군요.”
두 호족은 차분하고 평온하게 말을 나눴으나 점점 그들 주변의 이능파가 무겁게 바뀌었다.
호족의 은인이 얼마나 무모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신이 형은 오고 계신 건가요?”
“……김신록의 메시지가 끊겼다. 확신할 수 없군.”
“…….”
“나도 메시지를 한 번 더 보내마.”
황호는 한 번 더 조의신에게 디바이스 메시지를 보낸 후, 주제를 바꿀 겸 신경 쓰였던 것을 묻기로 했다.
“방금은 상황이 급박하여 묻지 못했지. 네가 함근형을 거기로 보내도록 지시한 이유를 말해 다오.”
“방송국에 비치된 인원과 발생한 해프닝을 고려해 봤을 때, 그곳은 특정 존재들의 살해와 무력화에 최적화된 무대라고 생각했어요.”
은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을 계속했다.
“용족의 총아, 용제건. 용족과 유력 프로 플레이어 팀, 대중의 총애를 받는 후예 염준열. 그리고 언령을 사용하는 제갈재걸. 이들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기회였죠.”
“적으로 돌리면 곤란한 존재들이나 그만큼 처리하기 쉽지 않은 이들인데.”
“네, 그래서 플레이어의 무기 아이템 카드를 봉인하고, 방송국을 봉쇄하고, 지력을 끌어다가 강력한 에너미를 부르는 강수를 둔 거겠죠.”
“내 존재는 적이 인식하지 못했더라도, 용족의 행보는 밝혀진 상태였다. 그것만으로는 용들을 막을 수 없을 텐데, 무슨 수로 암살하려 한 거지?”
은호는 ‘천성헌’으로서 플마고를 플레이했을 때 본 스토리를 떠올리며 답했다.
“용이 된 용살자, 카드모스를 불렀을 거예요.”
“……후예까지 처리하기에 가장 적절한 패로군.”
“네. 그리고 광림과 가호를 고려해 봤을 때 그 천적이 함근형 씨고요.”
“광림으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명궁의 힘을 빌리곤 했지. 적절한 대처였다.”
플마고 스토리에 등장하는 용살자의 존재에 관한 설명을 마친 후, 다시 대화의 주제가 돌아왔다.
은호는 다시 아직도 제대로 된 소식을 알 수 없는 조의신에 관해 물었다.
“지금은 의신이 형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요. 직접 뵙고 확인하고 묻는 게 빠를 것 같은데요. 의신이 형과 연락은 아직 안 되나요?”
“……내 메시지는 확인을 하지 않는군. 예전에 네 선배였던 조의신도 이랬나?”
“아뇨, 의신이 형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메시지에 성실하게 답해 주셨어요. 광고나 스팸, 보이스 피싱 메시지는 상대하지 않고 무시했지만요.”
“하하하하! 내 메시지가 광고, 스팸, 보이스 피싱 메시지 수준으로 취급받는 중인가.”
황호는 처웃으며 자신의 행적을 되돌아봤다.
필요한 메시지가 대부분이었지만 불필요한 메시지를 몇 번 보내 조의신을 귀찮게 만들긴 했다.
그래도 황호는 앞으로도 조의신에게 귀찮게 굴 생각이었다.
은호는 황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는지 쓴웃음을 짓고 찻잔을 내려 뒀다.
“……의신이 형이 그 몸을 하고 용족의 소굴로 가다니.”
“조의신은 용족 중에 문제가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만. 그 얼굴을 보니 아닌 것 같군.”
“청룡을 비롯한 용들은 괜찮아요. 하지만 ‘용왕신의 무녀’ 쪽에는 문제가 있어요.”
“용왕신의 무녀?”
“용왕신의 무녀들 중, 은광고를 노리는 무리와 손을 잡은 이가 있습니다.”
은호는 간략히 용왕신의 무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염준열이 사망한 직후 봉기한 용족과 붉은 사자들.
협력을 약속했으나 뒤에서 용왕신을 설득해 가호를 거두도록 유도한 용왕신의 무녀.
그리고 가호를 잃은 염방열과 용족의 패배.
설명을 들은 황호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이 본 미래에선 그런 일이 일어나는군.”
“네, 용족과 붉은 사자가 무너지는 건 막겠지만, 배신할 무녀를 어떻게 이용할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은호는 단순히 용왕신의 무녀를 처리하는 게 아니라 이용할 생각까지 하는 듯했다.
황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자신이 은호의 뜻에 따를 생각임을 시사했다.
“생각이 정리되면 말하도록. 그 건은 청룡과도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아직 청룡은 호족보다는 용왕신의 무녀들을 믿겠죠. 계기가 필요해요. 아마 의신이 형도 그걸 고려해서 움직이고 있겠죠.”
그때, 디바이스가 메시지 도착을 알렸다.
혹시 조의신이 답변한 건가 하여 황호가 바로 메시지를 확인했으나, 발신자는 협회 측에 파견한 호족이었다.
황호는 다소 실망한 기색으로 호족이 올린 보고를 읽었다.
“협회에서도 보고가 들어왔다. 붙잡아 간 그 PD가 생각보다 입이 가벼운 듯하다.”
“그자는 허술해도 그자에게 구형 이계 시뮬레이터를 건넨 자는 만만치 않을 테니, 꼬리를 잡는 건 시간이 걸리겠죠.”
“그래. 하지만 플레이리스트 출연자 중 남궁물산 소속 직원이 뭔가 알고 있는 듯하다. 방송이 끝나는 대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군.”
옛 수장과 현 수장의 대화가 길어지는 사이, 플레이리스트 마지막 방영이 끝났다.
방청을 간 은광고 학생들도 모두 귀가를 마쳤을 때, 은호가 제안했다.
“늦은 시각이지만, 함근형 씨에게 지시를 내렸던 이사장이라면 간단한 사후 보고 정도는 요구할 수 있겠죠. 함근형 씨에게서 보고는 받았나요?”
“마침 학생들의 인솔이 끝났다. 함근형에게 보고를 요청하지.”
함근형의 보고를 기다리는 사이, 어린 모습을 한 황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답하군. 김신록은 용제건의 방해를 받고 있는 듯하다. 이제 방송도 끝났으니 청룡에게도 물어보겠다.”
“청룡 님의 연락처는 알고 계신가요?”
“12지 동맹의 마법진을 통해 물을 생각이다.”
“청룡 님이 디바이스가 없는 건 아닐 텐데요.”
“…….”
황호는 입을 다물었다.
태만하게 굴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12지 동맹과도 소원해졌기에 당연히 연락처도 없었다.
귀찮게 구는 옥토연의 디바이스 코드는 알고 있었지만.
황호의 반응을 보고 은호가 그의 행적을 꿰뚫어 봤다.
“호족이 오랜 시간 다른 진족과 교류를 하지 않았나 보군요.”
황호는 은호의 말에 도망치듯 서둘러 본채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은호도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걸어 나왔다.
황호는 현관 쪽으로 걷는 동안 동맹 간 관계 유지의 중요성에 관한 일장연설을 들어야 했다.
“……본채에 다녀오마. 12지 동맹과 이어지는 마법진은 본채의 지하에 있다.”
본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은호는 그간 신경 쓰였던 것을 물었다.
“황호 님, 본채는 혼자 쓰시는 건가요?”
본채에는 백호, 적호, 신수 그리고 은호의 후예들이 함께 머물고 있었다.
황호는 본채에도 은호가 머무를 만한 방을 마련해 두었으나 후예를 대면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그를 부르지 못했다.
황호는 잠시 고민했으나 솔직히 고하기로 했다.
“아니다.”
“그럼 제가 별채에 머무르는 이유가 있겠군요.”
“그래.”
은호는 그 이유에 관해 묻지 않았다.
대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은호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청룡 님과 연락하고 오세요.”
은호는 어린 황호가 별채를 나서는 걸 배웅하며 자신의 뜻을 간접적으로 밝혔다.
“황호 님,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예를 만나게 하지 않은 게 배려라니.
어린 모습을 한 황호는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짐작이 가지 않아 몸을 돌려 본채로 서둘렀다.
황명호 대저택 본채 현관.
누군가 접근하는 기척을 감지하고, 은호의 후예들이 호랑이들의 귀가를 반기기 위해 현관 앞에 마중 나왔다.
최근엔 은서호와 은이호가 수험 공부로 바빠서 막내 은재호만 마중 나왔는데, 오늘은 셋이 전부 있었다.
“어린 황호 님, 다녀오셨어요!”
“그래, 다녀왔다. 나와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거늘.”
“아뇨, 저희가 기다리고 싶어서 그런 건데요.”
황호는 해맑게 웃는 후예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감췄다.
은호의 후예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어린 황호를 두고 말을 이었다.
“오늘은 다들 바쁘셔서 심심했어요. 모처럼 공부 일찍 마치고 다 같이 놀려고 했는데.”
“맞아요. 산령이 요새 안 보여서 지금 저희가 홀수잖아요? 게임 하려면 짝수가 좋은데…….”
다들 바쁘다는 말에 황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당연히 백호가 저택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와 적호는 오늘 일이 있었지만 백호도 자리를 비웠다고? 아, 신수와 산책을 간 건가.”
“신수는 계속 저택에 있었는데요?”
은이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신수가 거실 소파 위에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린 모습의 황호를 보고 있었다.
‘백호는 어딜 간 거지? 산령을 잡으러 간 건가.’
황호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청룡과 연락을 하기 위해 지하로 향했다.
* * *
‘다른 사람과 후예, 용을 귀찮게 하는 것 같네. ……답장해도 되나?’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이미 내가 무사히 있다는 건 김신록이 전달했을 텐데.
내가 생각에 잠겨 대답이 조금 늦어지자, 청룡은 나를 배려한 건지 말을 돌렸다.
“용족의 은인이 황호와 인연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식사부터 하는 게 어떤가. 시장하지 않은가?”
과도한 후예 사랑 건을 빼면 청룡은 지극히 정상인 듯하다.
청룡은 염준열과 아침 식사를 마쳤으나 용제건과 김신록은 나를 기다린 건지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신록아, 학교 안 가도 돼? 넌 1학년 1반 담임이잖아.”
“……부담임 선생님께 맡겼어. 위에 연가 쓴다고 보고도 올렸고.”
“함근형 선생님한텐 말했는데, 연가 생각을 못 했어. 나도 그래야겠다.”
“괜히 말했네.”
여전히 틱틱거리는 걸 보니 김신록은 용제건에게 쌓인 게 많은 듯하다.
김신록이 용제건을 무시하기 시작하자 용제건은 내 쪽에 말을 걸었다.
“의신아, 네가 부탁한 것 말인데. 나도 같이 해도 돼?”
“어느 쪽을 말씀하시는 거죠?”
은인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청룡과 염방열에게 한 부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청룡에게, 다른 하나는 염방열에게 한 것이었다.
“염방열에게 한 거. 나도 그 자리에 있어도 돼?”
그건 좀 곤란할 것 같다.
염방열에게 부탁한 건 어느 인물과의 대화인데, 그 인물은 진족을 싫어하니까.
내가 난색을 표하기 전에 용제건이 덧붙였다.
“나도 오랜만에 국언이랑 보고 싶어서.”
쨍그랑!
그 말이 끝나자 식기가 박살 나는 소리가 났다.
김신록 쪽에서 들린 소리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