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파티 (2)
공항 게이트에서 붉은 사자 전용기로 이어지는 긴 보딩 브리지 위.
전면 유리로 된 전용 터미널의 탑승교는 현재 붉은 사자의 팀 마크 홀로그램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게이트를 통과하기 전, 염방열은 붉은색으로 커스터마이징된 VIP 멤버십 카드를 패널에 찍은 후 생긴 변화였다.
‘세계 10대 플레이어 팀을 예우하는 걸까. 아니면 원래 VIP를 상대로는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염방열의 입지가 굉장하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팔불출 아저씨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 사람은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플레이어 중 하나다.
명성과 부, 이능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염방열이 이런 예우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저게 붉은 사자의 전용기구나. 몸체에 그려져 있는 건 초대 팀 마스터의 광림을 형상화한 건가?’
새하얀 비행기 몸체 위에서 붉은 사자가 포효하고 있었다.
다소 단순한 형태의 팀 마크를 붓으로 거칠고 거대하게 그린 듯한 붉은 사자였다.
붉은 사자의 팀 마크는 붉은 사자의 초대 팀 마스터의 광림을 쓰는 모습으로부터 따 왔다고 하는데, 이렇게 보니 말로만 듣던 그 광림의 위용이 짐작이 갔다.
“국언이는 와 있다고 하는군.”
앞서 걷던 염방열이 그렇게 말하자 김신록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용제건은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보딩 브리지는 항공기로 바로 이어지는 거 아니야? 그럼 미리 탑승한 거야?”
“국언이는 다른 통로로 왔습니다. 보딩 브리지 입구 쪽에 추가 출입구와 간이 계단이 마련되어 있으니, 국언이는 그쪽으로 탑승할 예정입니다.”
그 이후로 김신록의 말수가 극단적으로 줄었다.
김신록은 이동 중에 계속 ‘영국은 다음에 가는 게 어떻습니까?’, ‘적어도 하루는 더 쉬고 가는 게…….’라고 말하며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성국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말을 멈추었고, 공항에 가까워질수록 결국 입을 다물었다.
용제건이 김신록의 말문을 다시 열었다.
“신록아, 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갈래?”
“……내가 어떻게 가. 진족이나 후예가 해외에 다녀오면 사후 보고 절차가 복잡하잖아. 자칫하다간 호족 측에 누를 끼칠 수 있어.”
“응, 잘됐다. 신록이는 노려지는 입장이니까 쉬는 게 좋지.”
“그렇게 말할 거면 대체 왜 같이 갈 거냐고 물어본 거야?”
“그냥.”
김신록은 당장이라도 용제건을 압핀꽂이로 만들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염방열과 나를 배려해 화를 억눌렀다.
아니면 탑승교 너머에 있는 옛 제자가 나쁜 걸 보고 배울까 봐 그냥 참은 건지도 모르겠다.
“……조의신 군, 여행 준비는 언제 마친 겁니까? 비자는 괜찮습니까?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거죠?”
성국언이 잡은 정보를 듣고 미리 준비한 건 맞지만, 크게 준비한 건 없었다.
플레이어등록증은 여권 역할도 하므로 사전에 여권을 받을 필요는 없다.
또 해외여행에 관해선 여름 방학에 해결해 둔 상태였다.
“여름 방학 때 신문부에서 해외 취재 여행을 갔다 왔어요. 그때 자잘한 절차는 처리해 뒀어요.”
“……아, 그랬었죠.”
여름 방학 취재 여행지 중엔 영국도 포함되어 있어 비자가 필요했다.
영국의 경우 일반 방문자로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지만, 18세 미만 미성년자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나는 미성년자인데다 보호자가 부재한 플레이어라서 사전에 비자를 발급받기가 까다로웠다.
제갈재걸과 함근형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준비해 주시지 않았다면 출국하기 어려웠을 거다.
“국언이가 보이는군. 옆에 있는 건 무영이었나? 둘 다 오랜만이군.”
붉게 물든 홀로그램과 유리창 너머로 성국언과 전무영이 보였다.
성국언의 체격이 워낙 좋은 탓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국언이라고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염방열이 국언이, 무영이라고 하는데, 아는 사이였나?’
나와 같은 의문을 느낀 용제건이 질문했다.
“염방열, 두 사람이랑 아는 사이였어?”
“네, 국언이는 제가 졸업하고 입학했으니 학창 생활을 함께 보낸 적이 없지만요. 동창회에서 몇 번 얼굴을 봤습니다.”
은광고 동창회관에서는 매년 동창회를 연다.
졸업생 중에는 전사하거나 현역으로 전선에 서는 이들이 많아 전원이 모이는 일은 없지만, 매년 걸출한 플레이어를 수백 명 배출하다 보니 그 규모가 거대하고 참여객의 수준이 상당하다.
한국 플레이어계 최대 규모의 사교 모임이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곳에서 한국 최초 플레이어 출신 국회의원 성국언과 세계급 이계 공략 팀 마스터 염방열이 교류를 가져도 이상하지는 않지만, 문제는 성국언 쪽에 있었다.
‘졸업한 이후면 염방열은 용족의 후예와 결혼한 시점일 텐데. 그래도 성국언이 접촉한 건가?’
진족과 후예를 경계하는 성국언이 염방열과 말을 트다니 의외였다.
염방열과 용제건의 대화가 이어졌다.
“용제건 님은 국언이랑 무영이를 가르친 적이 있겠군요.”
“응, 있어. 신록이도 마찬가지일걸?”
짓궂은 말에 김신록이 멈춰 섰다.
김신록은 용제건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다가 입을 열었다.
김신록은 현재의 신분 기준으로 말했다.
“저는 성국언 학생이 졸업한 후에 부임했습니다. 제가 가르친 건 전무영 학생뿐입니다.”
그러면 김신록의 이전 신분으로 성국언을 가르치고, 김신록의 모습으로는 전무영을 가르친 건가.
김신록이 옛 신분과 현재 신분을 구분하여 말하긴 했으나, 그가 저 두 사람의 은사인 건 변함이 없었다.
염방열은 김신록이 용제건의 친구인 후예라는 건 알아도 옛 신분과 성국언에 얽힌 비화는 모르는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신록의 시선이 창 너머를 향했다.
시선 끝에 이쪽에 등을 돌리고 전무영과 대화 중인 성국언이 보였다.
“……그때도 키가 컸는데, 못 본 사이에 더 컸네.”
김신록이 작게 중얼거리는 말이 들렸다.
그 혼잣말을 들은 염방열이 지금까지 김신록이 한 말과 지금의 상황을 종합해 결론을 내렸다.
“무영이는 고2 때부터 키가 안 컸다고 하는데요. 무영이가 막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 가르치셨나 봅니다.”
“하하하, 염방열은 인간치곤 강한데 눈치가 없어. 그래서 우리의 금지옥엽 후예와 연애할 때 그 고생을 했지.”
그 뒤로는 용제건만 즐거워하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염방열의 부끄러운 과거를 듣다 보니 통로 끝에 도달했다.
보딩 브리지의 끝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전용기 안으로, 다른 하나는 밖으로 이어지는 간이 계단이었다.
우리가 목적지에 온 걸 알았는지 계단을 타고 성국언과 전무영이 올라왔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김신록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김신록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인 직후, 성국언이 등장했다.
체격이 좋은 염방열과 성국언이 마주 서 있으니 통로가 좁아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염방열 선배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그간 잘 지냈나?”
“하하하! 저야 늘 똑같죠.”
둘은 의례적인 대화를 나누고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용제건을 인식한 건지 성국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성국언은 정말 최소한의 예의만을 갖춰 말했다.
“용족이 동행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나는 그냥 마중 나온 거야. 우리 반 애와 한동안 얼굴을 못 본 제자가 출국하는 자리잖아.”
용제건은 성국언의 경계 어린 말에 조금도 데미지를 입지 않은 듯 오히려 기분 좋게 웃었다.
용제건은 그렇게 말하며 휙 몸을 틀었는데, 그 탓에 염방열과 용제건의 등 뒤에 가려져 있던 김신록이 드러났다.
김신록과 성국언의 눈이 마주쳤다.
“…….”
“…….”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바람에 그 주변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염방열은 용제건에게 눈치 없다는 말을 들은 걸 신경 썼는지 입을 다물었고, 나도 그냥 눈치껏 조용히 있었다.
“당신은…….”
성국언이 무언가를 물으려다 말꼬리를 흐렸다.
성국언답지 않은 태도였다.
‘설마 알아본 걸까?’
김신록은 청호로부터 배운 역용술을 이용해 얼굴을 자유자재로 바꾼다.
저번 신분 때 어떤 얼굴을 썼는지 몰라 가늠이 안 되지만, 어쩌면 바꾼 얼굴 어딘가에 닮은 점이 남아 있어 성국언이 김신록을 보고 기시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3년이나 담임을 한 선생님이니, 뭔가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김신록 선생님 아니십니까? 저 전무영입니다, 선생님.”
침묵을 깬 건 성국언의 비서, 전무영이었다.
전무영과 김신록은 꽤 가까웠던 건지 얼굴에 반가운 기색을 가득 띠고 있었다.
김신록은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고 웃으며 답했다.
“……네, 맞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선생님, 그렇게 존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졸업했다곤 해도 제가 얼마나 신세를 졌는데…….”
“아는 선생님이야?”
“네, 기억할 수밖에 없죠.”
내가 알고 있는 플레이어블 캐릭터 전무영은 딱딱하고 칼 같은 비서였는데, 지금은 그냥 오랜만에 선생님을 만나 기뻐하는 평범한 학생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무영은 성국언에게 자랑하는 것처럼 김신록을 소개했다.
“의원님, 김신록 선생님은 지익회 고문이셨습니다.”
김신록은 전무영이 은광고에 다닐 시절에도 지익회 고문을 맡았나?
전무영이 고1 때 성국언이 학생회장이 되어 사감 제도를 폐지하고 지익회를 세웠다.
제대로 지익회가 움직이기 시작한 건 성국언이 졸업한 이후다.
그리고 김신록이 새 신분을 사용한 것도 그때부터다.
‘성국언이 졸업하자마자 부임해서 지익회 고문을 맡은 건가.’
내 예상과 거의 비슷한 내용대로 전무영이 설명을 이었다.
“의원님이 졸업한 직후라 그런지 아무도 고문을 맡으려 하지 않았죠. 그때 김신록 선생님이 나서 주셨습니다. 함근형 선생님 쪽에도 얘기가 갔지만, 그때 그분은 다른 건으로 바쁘셔서…….”
“무영아, 지금 하는 말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좋은 선생님이 고문을 맡게 됐다는 말밖에 못 들었어.”
“그야, 졸업한 이후에 마음 쓰실까 봐 다들 쉬쉬한 거죠.”
지금 듣는 이야기는 성국언도 처음 듣는 비화였나 보다.
전무영은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김신록은 곤란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리고 전무영에 말에 이어 용제건이 한마디 거들었다.
“신록이는 지금도 지익회 고문이야.”
“그러셨습니까? 김신록 선생님이 맡아 주신다면 걱정 없겠네요. 학생을 배려해 주시는 좋은 분이시니까요.”
성국언은 그 말을 듣고도 큰 반응이 없었다.
김신록 옆에 있는 용제건을 경계하는 건지, 김신록 본인을 경계하는 건지 모를 태도였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앞으로도 지익회를 잘 부탁드립니다.”
성국언은 상투적인 태도로 인사를 한 후, 김신록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럼 출국 준비를 하죠.”
“그러지, 오래 잡아 둘 순 없으니.”
성국언은 염방열과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김신록은 고개를 조금 숙이는 바람에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문득 어느 사실이 떠올랐다.
‘아, 메시지 보내 놔야겠네.’
그리고 ‘읽지 않음’ 표시가 가득 차 있는 메시지창을 열어 문자를 입력했다.
[나] 영국에 다녀올게.
그 말을 하기 무섭게 전화가 걸려 왔으나 비행기에 올라야 했으므로 받지 않았다.
딱히 받기 싫어서 안 받은 건 아니다, 아마도.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