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파티 (3)
붉은 사자 전용기 안.
염방열은 영국까지 동행하지 않는 대신 내부를 안내해 줬다.
염방열이 기장과 부기장, 오토매틱 메이드로 구성된 승무원에게 안내역을 맡기지 않고 직접 안내한 게 인상 깊었다.
은인인 나와 국회의원인 후배가 와서 특별 대우를 해 준 것 같았다.
‘이 정도 수준의 전용기를 염준열 보러 갈 용도로 산 건가?’
널찍하게 거리를 둔 좌석 사이에 슬라이딩 도어가 설치되어 있는 건 물론이고, 침실과 샤워 시설, 회의실, 피트니스 룸, 식당, 미니 바까지 없는 게 없었다.
처음엔 이건 좀 과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곧 염방열의 생각에 동조했다.
“가족이 탈 전용기라 신경 썼다. 우리 준열이의 유학이 일찍 끝나서 사용할 일이 거의 없지만.”
나도 올무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탈 교통수단을 준비할 능력과 재력이 있으면 이 정도 신경 썼을 거다.
전용기에 올무 전용 좌석과 장난감을 배치하는 상상을 하던 중에 문득 지난 방학 때의 비행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황지호가 중국에 대기시킨 건 전용기가 아니라 전세기였지. 갑자기 귀국이 결정되는 바람에 현지에서 조달한 걸까.’
그날 나는 사월세음의 메시지를 받고 바로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황지호는 내 귀국 의사를 듣자 전세기를 준비해 줬다.
‘평소에 거의 사용하지 않던 전용기를 이륙 가능한 상태로 세팅해서 중국으로 가져오는 것보단 빌리는 게 빨랐겠지.’
황지호는 아마 전용기를 계속 방치해 뒀을 거다.
기본적인 정비야 했겠지만, 직접 탈 일은 거의 없었을 테니까.
황지호가 전용기를 쓰지 않는 이유는 뻔했다.
‘한반도 안을 돌아다닐 때라면 모를까, 한반도 밖에서는 황지호의 분신 능력이 제한돼. 태만하게 살던 때에도 해외여행은 삼갔겠지.’
중국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전세기 안, 이능파로 황금의 체스보드와 킹의 체스 피스를 구현한 황지호가 그런 말을 했다.
―한반도 밖에서 분신을 움직이는 건 꽤 까다로워. 비유하자면…… 이능파로 뇌와 손 모양을 구현하여 체스를 두는 감각이야.
―사고 능력도, 스킬의 정밀성도, 집중력도 크게 떨어지지. 그래서 중요한 일은 전부 처리하고 이번 해외여행에 나선 거다.
그 생각을 떠올리니 황지호에게 미리 이야기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황지호가 할 일도 많은 처지에 괜히 따라올 가능성이 있으니까.
또 나는 아직 ‘황지호를 죽이는 방법’에 관해 알아내지 못했다.
‘흑막이 황지호를 무력화시킨 수단을 못 알아냈어. 그러니 황지호의 권능이 약해지는 해외엔 나가지 않는 게 좋겠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 전용기의 주요 시설을 전부 둘러보았다.
안내를 마친 염방열이 전용기 밖으로 나가기 전, 나와 성국언 쪽을 보며 말을 남겼다.
“그럼 잘 다녀오거라. 국언아, 이 아이는 어제 무리했으니 잘 챙겨라.”
염방열과 인사를 마친 성국언과 전무영이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내게 이상이 있나 없나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치료가 전부 끝난 상태라 두 사람은 별문제를 발견하지 못했으나, 성국언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무리라…… 방송국 사건과 관련이 있나. 함근형 선생님 이름이 거기 있었지. 붉은 사자가 수습 과정에 개입한 정황도 있고.”
“이계 공략에 참가한 플레이어 중에 무명의 초신성은 없었습니다만.”
“협회의 기록에 남지 않을 만한 일을 했나 보군.”
어제 방송국에 있던 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플레이리스트의 마지막 촬영과 맞물려 발생한 사건이니, 대중의 이목이 쏠리는 걸 피할 수 없었다.
붉은 사자 측에서 힘을 쓴 건지 카드모스 건은 드러나지 않았다.
또 붉은 사자가 염준열과 연관된 일에 과민 반응하던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기에 그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붉은 사자와 협회가 덮은 일을 구태여 캐진 않으마. 그럴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캐겠지만. 하하핫!”
성국언이 호쾌하게 웃었다.
별다른 정보 수집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염방열의 한마디에서 순식간에 묻힌 사건의 존재와 사건을 묻은 주체를 파악하는 솜씨가 대단했다.
거기에 적절히 선을 그어 어느 쪽과도 척을 지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까지 마치다니.
겉보기엔 그저 호탕한 선배님 같았으나 재선 국회의원의 감은 남달랐다.
성국언은 언제 방송국 사건 이야기를 했냐는 듯 말을 바꾸었다.
“의신아, 짐이 없구나.”
“필요한 건 그때그때 살 예정이에요.”
기숙사에 들러 짐을 챙길 시간이 없어 나는 빈손이나 다름없었다.
예기치 못한 사태를 대비해 아이템창에 생필품을 갖춰 두고 있어 사지 못하더라도 괜찮지만, 보는 눈이 있으니 쇼핑을 할 예정이다.
“그래, 필요한 건 무영이한테 말해.”
성국언은 그 말을 끝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성국언 본인도 남다른 스케일로 사고를 치는 타입이라 그런지 보통 배포가 아니다.
갑작스럽게 붉은 사자의 전용기로 이동하자는 제안을 바로 받아들인 것도 그랬다.
이륙 후, 안전벨트를 풀어도 좋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우리 셋은 회의실로 이동했다.
성국언이 권하는 대로 그의 맞은편에 앉자 전무영이 인쇄된 자료를 건넸다.
“이 자료는 열람 후 파기해 주십시오.”
전무영이 넘겨준 자료에는 가칭 ‘고성의 핼러윈 파티’에 관한 세부 사항이 정연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자료에 나온 내용은 척 봐도 일반적인 루트로 입수한 정보가 아닌 것 같았다.
‘진족이 개최한다는 핼러윈 파티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정도로 조사하다니. 전무영은 역시 유능하구나.’
장소와 시각, 역대 핼러윈 시기에 벌어진 괴현상 등을 암기하고 있을 때, 성국언이 물었다.
“의신아, 아까 너를 배웅하러 온 선생님 말이다.”
나를 배웅 나온 선생님은 둘이었다.
성국언은 용제건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대신 대놓고 그냥 ‘용족’이라고 칭했으니, 그 선생님이란 김신록을 가리키는 말일 거다.
“왜 여기까지 너를 배웅하러 온 거지?”
뜬금없긴 했지만, 지당한 의문이었다.
김신록은 1학년 0반의 담임이나 부담임도 아니니, 이상하게 여길 만했다.
‘그렇다고 해서 김신록의 정체나 호족과의 관계성을 밝힐 수는 없지.’
나는 김신록이 용족의 본거지에 왔을 때 했던 변명을 그대로 이용하기로 했다.
“김신록 선생님은 기숙사생인 저를 걱정해서 오셨어요.”
기숙사생이 몇백 명인데 학생 하나가 외국에 간다고 배웅을 온다는 건 좀 어색하긴 했다.
그러나 전무영이 몇 마디 거들어 준 덕에 내 말은 설득력을 얻었다.
“김신록 선생님은 표현은 잘 못 하셔도 예전부터 정이 많았죠. 제때는 부임한 직후라 그런지, 학생들을 어색해하고 거리를 두려 하셨습니다. 그래도 늘 배려 넘치는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그런 교사였군.”
“분명 방송국 사건에 연루된 학생이 다음 날 출국한다는 게 마음이 걸려 여기까지 온 거겠죠.”
늘 그림자처럼 서 있던 전무영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처음 봤다.
성국언은 전무영의 김신록 칭찬, 자랑을 들으며 무성의하게 맞장구쳤다.
성국언은 김신록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했지만, 그걸 입으로 표현하진 않았다.
“그 교사는 용족과도 가까워 보이던데.”
“김신록 선생님은 부임 후 계속 은광고에서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근속 연수가 기니 용제건 선생님과도 면식이 있겠죠.”
전무영은 김신록에 대한 신뢰를 숨기지 않았다.
성국언이 말하는 것마다 실드를 쳐 추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딱히 내가 입을 열지 않아도 이 주제는 잘 무마될 것 같았지만, 나도 한마디 보태기로 했다.
“죄송해요.”
타이밍을 노려 사과부터 했다.
성국언은 느닷없는 말에 당황하는 대신 부드러운 얼굴로 왜 사과하는지 물어봤다.
“성국언 선배님이 진족과 후예를 경계하는 걸 아는데도 사전에 상의 없이 움직인 점이요.”
붉은 사자의 팀 마스터가 용족의 후예와 혼인하여 인척 관계에 놓인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성국언은 한반도를 노리는 진족이 있다며 협력을 요청했는데, 정작 나는 진족과 가까운 이의 힘을 빌렸으니 사과할 만한 사항이었다.
“하하핫! 그렇지. 갑작스럽긴 했다. 그래도 괜찮다. 애초에 내가 염방열 선배님을 믿지 못했다면 이 비행기에 오르지도 않았을 거야.”
사과를 들은 염방열은 괜찮다며 웃었다.
“다른 진족이나 후예는 모르나 염방열 선배님은 믿는다. 용족이 한반도를 노리려 든다면 온 힘을 다해 설득하실 분이야. 난 사람 보는 눈에는 자신이 있다.”
감사한 말이지만, 사람 보는 눈은 몰라도 진족이나 후예를 보는 눈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랬다면 이렇게 대놓고 모든 진족과 후예를 싸잡아 경계하진 않았을 거다.
용제건이야 의뭉스러운 구석이 많은 데다 과거에 쌓인 앙금도 있으니 성국언이 거리를 둬도 이상하지 않긴 했지만.
‘그런 성국언이 김신록은 믿고 따랐어.’
물론, 끝까지 김신록이 인간이라고 믿었기에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이번에 탈환해야 할 물건도 있으니, 일반 항공기로 이동하고 물건을 실으면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 했겠지. 좋은 선택이었다, 후배야.”
그렇게 말하며 성국언이 맞은편에서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말이 두드린 거지 몸이 흔들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다 알고 있겠지만, 이번 원정의 1차 목표는 ‘이무기의 귀천’의 탈환이다.”
성국언은 ‘이무기의 귀천’의 사진을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성국언과 성시완의 할아버지, 오래전 고인이 된 어둠의 시대 때의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장이 남긴 단서였다.
‘홍경복 화백의 그 옛 제자가 민그린의 작품을 해외에 팔아넘기지 않았다면 이런 수고는 없었을 텐데.’
성국언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아, 네게 ‘이무기의 귀천’에 얽힌 사연은 들었지만, 그 이후로 홍경복 화백님께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뒀다.”
성국언은 그림의 행방만 찾은 게 아닌가 보다.
성국언은 자료 마지막 페이지를 홀로그램 위에 띄우며 간략히 설명했다.
“그림을 의뢰한 시기부터 제작까지 걸린 시간, 재료를 조달한 방법 그리고…… 진품의 여부를 가리는 방법까지. 자료 마지막 페이지에 적어 뒀으니 확인해 둬라.”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암기했다.
성국언의 설명과 전무영의 자료 덕에 자잘한 내용도 쉽게 머릿속에 입력됐다.
‘이무기의 귀천’에 관한 브리핑이 끝났을 때, 성국언이 충격적인 말을 했다.
“이번 핼러윈 경매에 올라오는 매물 리스트를 사전에 입수했는데, 탈환은 생각보다 수월할 것 같더군. ‘이무기의 귀천’이 메인이 아니니 말이다.”
아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첫 작품이 경매의 메인이 아니라고!
퀘스트의 난이도가 떨어졌는데도 영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하핫! 의신이 네 기분은 이해한다. 나도 비슷한 심정이다. 파티장은 홈그라운드가 아니지 않나. 페널티가 줄어드는 건 좋게 생각하자고.”
“……네.”
울컥한 마음을 다스리자 성국언이 설명을 계속했다.
“이번 경매에 올라오는 건 투어허 데 다넌(Tuatha dé Danann), 다누 신족의 4대 신보(神寶) 중 하나다. 상위 존재가 신화를 거쳐 현세에 남긴 물건이니, ‘이무기의 귀천’이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지.”
다누 신족의 신보는 총 네 개.
첫째, 왕의 자격을 가진 자가 만지면 소리를 지른다는 대관석, ‘팔의 돌’.
둘째, 그 앞에서는 아무도 도망칠 수 없다는 ‘누아다의 검’.
셋째, 승리를 보장하는 다섯 갈래의 ‘루의 창’.
넷째, 곡식을 무한하게 재생과 풍양을 상징하는 ‘다그다의 가마솥’.
네 개의 신보 중 어느 것이 경매에 오를지는 모르겠지만, 경악이 절로 솟았다.
“……신보가 경매에 나온다고요?”
“그래. 틀림없다.”
예로부터 신보는 신권의 상징, 경외의 대상이다.
상위 존재가 허락한 존재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신보가 어둠의 경매에 서다니.
‘이런 무도한 짓을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아.’
신화 속에서 다누 신족과 동맹 관계에 있었으나, 대립하여 몇 번이나 전쟁을 벌여 처절하게 패배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신화 속에서 잔혹하고 간악한 침략자로 묘사되곤 했다.
“경매의 주체는 포모르 마족(魔族)이군요.”
이번 핼러윈 파티에선 마족(魔族)을 상대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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