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파티 (8)
까마귀 마왕의 대리인, MITRON의 파티시에와 디바이스 코드를 교환하고 헤어진 후.
호텔 주변을 둘러보고 일용품 쇼핑을 마치니 전무영으로부터 늦을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두 사람이 돌아오기 전까지 쉴까.’
괴도 네온의 예고장으로 변수가 많이 생겼다.
정보가 없어 계획을 짜기 어려운 지금 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한국과 영국의 시차는 9시간.
시차도 큰 편이고 오랜만에 해외에 나왔으니 시차 적응에 고생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어렸을 때는 체스 대회를 앞둬서 그런지, 타지에 나와서 그런 건지 신경이 예민해져 잠도 못 자고 시차에 익숙해지는 데도 며칠이 걸렸었다.
단순히 이번 주 수면 시간이 길었던 덕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꿈 없이 푹 자고 일어난 지금과 달리 그때는 고생했다.
‘플레이어라 체력이 좋아져서 그런가?’
일어난 후에도 성국언과 전무영, 두 사람은 부재중이었다.
디바이스를 켜 시간을 확인해 보니 푹 잔 것에 비해 생각보다 흐르지 않았는데, 그에 비해 메시지는 잔뜩 도착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내 제자가 보낸 메시지였다.
[염준열] 스승님, 안녕하세요.
[염준열] 기숙사로 돌아가신 건가요? 귀가했는데 스승님이 안 계셔서 놀랐어요.
[염준열] (스탬프)
염준열은 어딘가 의기소침해 보이는 얼굴로 하늘을 보는 홍룡 스탬프를 보냈다.
학생회장 일과 플레이리스트 사건 관련으로 바쁜 염준열이 걱정할까 봐 뒷일은 용제건에게 맡기고 말하지 않았는데!
다행히 용제건이 말을 전해 줬는지,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메시지가 더 도착해 있었다.
[염준열] 제건이 형이 스승님께서 영국으로 출국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스승님의 행방에 관해 말하는 내내 제건이 형의 기분이 지나치게 좋아 보여서 스승님이 걱정돼요.
순간, 용제건의 기분이 좋아 보여서 내가 걱정된다니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 용제건이 누군가에 관해 얘기하는 내내 기분이 좋아 보이면 좀 걱정되긴 할 것 같았다.
그 인물은 용제건이 좋아할 만한 일에 엮여 있다는 뜻이니까.
[염준열] 제건이 형은 그저 친구분이랑 말다툼해서 기분이 좋은 걸지도 모르겠지만요.
저게 무슨 소리지?
덧붙인 말도 언뜻 봤을 땐 무슨 소리인지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아 내가 메시지를 잘못 읽었나 싶어서 두 번 정도 다시 읽었다.
용제건이 기분이 좋아진 이유가 친구와의 말다툼이라는 게 어딘가 이상한데, 유희용이 친구를 어떻게 놀려 먹는지 고려해 보니 납득이 갔다.
용제건의 친구는 김신록 하나다.
용제건은 우리가 출국한 후 이번 건을 두고 김신록과 다퉜나 보다.
‘성국언 이야기를 두고 대놓고 긁고 부추기고 옆에서 보고 즐겼으니 김신록에게 한 소리 들을 만하지.’
크게 봤을 땐, 용제건이 자신의 친구를 위해서 행동한 것 같긴 했다.
그러나 김신록 입장에서 봤을 땐 겨우 묻고 지내던 과거 일로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김신록도 성국언이 스승의 죽음을 추모하는 걸 두고 미안해하던 것 같은데…….’
성국언은 스승의 날과 김신록의 가짜 기일에 시간을 내 추모하는 모양이었다.
올해 스승의 날, 성국언과 성시완이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국언이 형! 담임 쌤이셨다는 분은 만나고 왔어요? 또 다치신 거예요? 회복 아이템 카드는 안 써요?
―오랜만이다, 시완아. 어제 이계 공략하다 팔에 금 가서 깁스했는데, 선생님이 이거 봐 봤자 걱정밖에 더하시겠어.
김신록은 3년 내내 0반 소속이었던 성국언의 담임이었다.
그러니 성국언이 지칭한 ‘선생님’은 김신록일 가능성이 컸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의 담임일 가능성도 있지만, 어쩐지 김신록일 것 같아.’
성국언의 성격상 고인이 된 지 10년이 넘게 흘렀다고 한들 은사에게 다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그만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의리와 정이 깊었다.
‘그래도 내가 둘 사이에 개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김신록은 저번에 내 제안을 받아들일지, 받아들이지 않을지 확실히 답하진 않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김신록의 답변을 기다리는 것 정도였다.
생각을 정리하고 다른 메시지를 확인했는데, 그것도 염준열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염준열] 의신아, 쉬고 있으라고 했는데…….
[염준열] (스탬프)
염준열이 선배로서 보낸 메시지였다.
첨부된 홍룡 스탬프는 같았지만, 말투가 전혀 달랐다.
선배와 제자 노릇을 동시에 다 해내려는 염준열의 노고가 느껴져 뿌듯했다.
“다녀왔다. 늦어서 미안하다.”
디바이스 메시지를 대충 다 훑어봤을 때, 성국언과 전무영이 돌아왔다.
두 사람은 국회의원과 수석 보좌관답게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데에 익숙한 듯, 호텔 밖으로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피로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슈트 재킷만 벗고 곧바로 스위트 룸 회의실로 향했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뉴스를 봤습니까? 괴도 네온이 빅 벤을 원상 복귀시켰습니다.”
전무영은 내가 착석하자 뉴스를 보여 줬다.
홀로그램 속에는 네온사인의 예고장이 사라진 빅 벤이 찍혀 있었다.
괴도 네온의 광림, ‘마술사의 비단 모자’는 이능파 비단 모자 안에 넣은 것을 원하는 장소로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다시 모자 안으로 불러들일 수도 있다.
괴도 네온은 이능파를 회복한 후 ‘마술사의 비단 모자’로 예고장 스킨을 회수한 모양이었다.
예술은 예술 본모습 그대로 남겨야 한다는 그 괴도 철학에 따른 뒷수습일 것 같았다.
그저 증거 인멸을 위해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언론은 졸지에 괴도 네온의 마술 쇼를 생중계한 꼴이 됐지! 관객 중에는 고명한 플레이어들도 많고, 동태를 살피러 온 포모르 마족도 있었을 텐데 그들의 눈을 모두 속였어.”
성국언은 포모르 마족이 한 방 먹은 게 마음에 드는 건지 ‘하하핫!’ 하고 호쾌하게 웃었다.
언론들은 괴도 네온이 선보인 희대의 마술 쇼를 두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난 덕에 슬슬 다른 보도와 화제도 올라오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괴도 네온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럴싸한 분석을 한 플레이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석을 했나 볼까.”
전무영이 뉴스 영상을 하나 재생했다.
영국의 유명 매지션 플레이어가 게스트로 출연한 뉴스 방송이었다.
아이템 카드로 선보이는 마술로 유명한 매지션 플레이어는 자신의 분석을 읊었다.
―제가 주목한 점은 빅 벤에 괴도 네온의 예고장이 등장했을 때 남은 기록입니다.
―빅 벤 주변의 기록 기기들이 찍은 영상 말인가요?
―네, 기록 기기의 비교 영상을 보시죠.
매지션 플레이어는 빅 벤 주변에 남은 수십 개의 기록 기기를 두 가지로 분류했다.
두 그룹은 이능파 감지 기능의 존재 유무에 따라 갈렸다.
매지션 플레이어는 이능파 감지가 가능한 기록 기기의 분석 결과를 표로 정리해 보여 주며 말했다.
―괴도 네온은 사전에 기록 기기에 정교한 조작을 가했습니다.
―조작이요?
―네, 그렇습니다. 예고장이 등장하는 순간, 이능파를 감지하는 기록 기기는 전부 1초 정도 사전에 촬영된 영상을 송출하도록 조작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1초의 순간을 잡기 위해 기록 기기를 수배했습니다.
―협회와 경찰 측에서 인근 지역 주민들의 기록 기기 영상을 입수해 분석을 하는 중인 걸로 압니다만.
―거주민이 소지한 기록 기기에는 괴도 네온이 사전 작업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매지션 플레이어는 고개를 젓고 추가로 홀로그램을 하나 더 띄웠다.
―예정에 없던 관광을 하던 포토그래퍼 플레이어가 우연히 전문 기기로 주변을 촬영하고 있었죠. 그 플레이어가 찍은 영상을 입수했습니다. 여기에 괴도 네온이 사용한 트릭의 정체가 등장합니다.
매지션 플레이어는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끊은 여러 장의 화면을 보여 줬다.
빅 벤이 멀리서 찍혀 있었는데, 빅 벤 위에 흐릿한 무언가가 찍힌 화면이 있었다.
최대로 확대하니 그 무언가의 형체가 그럭저럭 보였다.
거대한 비단 모자.
괴도 네온이 쓰는 광림의 이능파 형상이 찍혀 있었다.
‘회수할 때는 이능파가 드러나진 않지만, 처음에 물체를 이동시킬 땐 흔적이 남지. 잘 잡아냈네.’
매지션 플레이어는 비단 모자 형태의 이능파 흔적을 가리키며 결론지었다.
―트릭의 정체는 괴도 네온 고유의 능력, 광림으로 추정됩니다. 이 실크해트는 괴도 네온의 시그니쳐로 간주해도 되겠죠.
워낙 대담한 범행을 했으니 누군가 하나는 알아보리라 생각했는데, 영상만으로 여기까지 알아내다니.
과연 영국을 대표하는 매지션 다운 분석이었다.
매지션이 인터뷰를 마치자 그다음 뉴스가 나왔다.
켈트 해에서 희귀 동물이 대거 이동하는 게 목격되었다는 내용이었는데, 북해에서 목격됐던 희귀 동물들이 저리로 간 듯했다.
‘대체 어떻게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한 거지?’
늘 이동 과정, 중간 과정이 목격되지 않는 게 신기했다.
희귀 동물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단체와 거기에 소속한 플레이어들의 수가 적지 않은데 어떻게 그들의 추적을 떨쳐 내는 걸까.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전무영이 브리핑 준비를 마친 듯 뉴스 화면을 껐다.
“초대장을 새로 받았습니다.”
인쇄할 시간이 없었는지, 전무영이 인쇄한 자료 대신 홀로그램을 하나 전송했다.
홀로그램에는 붉은 사자의 전용기 안에서 봤던 포모르 마족의 초대장과 유사한 초대장과 봉투가 보였다.
언뜻 보기엔 저번에 봤던 것과 유사해 보였으나 봉투의 입구를 붙인 봉랍의 모양이나 색, 휘갈겨 쓴 듯한 글씨체가 미묘하게 달랐다.
‘내용은 비슷해 보이는데…….’
홀로그램 화면에 나온 초대장 첫 페이지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내용과 일치했다.
“포모르 마족이 새로 보낸 초대장에 적힌 장소와 시간은 바뀌지 않았다.”
“그럼 초대장은 그대로인가요?”
“아니. 일정표가 공백으로 바뀌었어.”
성국언은 두 번째 페이지를 보여 줬다.
페이지는 텅 비어 있었는데, 의도는 짐작이 갔다.
‘일정표를 비워 뒀네. 일정 조정은 했지만, 공개할 생각이 없다는 거구나.’
성국언과 전무영이 보여 준 초대장에는 주요 일정이 적혀 있었다.
내빈 안내, 만찬, 파티 게임을 비롯한 이벤트, 티타임 그리고 경매.
우리는 그 일정표에 맞춰 계획을 짰지만, 새로 받은 초대장의 일정표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괴도 네온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더구나. 경매를 취소할 생각은 없지만, 경계는 하겠다는 뜻이겠지.”
“괴도 네온은 이능파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원격으로 물질을 이동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매를 진행하는 입장에선 경계하는 게 당연하죠.”
“하핫, 마족의 일화 중에는 인간을 얕보고 오만하게 굴다가 허를 찔리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성국언이 가리키는 오만하고 어리석은 마족의 일화는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잠입에선 그런 식의 전개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우리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야겠구나.”
성국언이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지도에는 파티장의 위치와 내부 구조가 나와 있었다.
“내부 구조는 변형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능을 써서 어그러뜨리지 않는 한 면적은 그대로일 거고,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는 위치에 있는 기둥을 없애거나 옮기진 못할 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었기에, 성국언의 말대로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 이후, 우리는 핼러윈 파티 일시까지 한숨도 자지 않고 대책을 강구하고, 시뮬레이션을 반복했다.
그리고 10월 31일로 넘어가는 자정, 핼러윈 파티가 시작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