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라이벌 (2)
켈트 신화를 배경으로 하는 아서 왕 전설.
그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이들 중 가장 강력한 드루이드를 꼽는다면 누구나 멀린의 이름을 댈 것이다.
전설의 드루이드, 왕의 조언자, 브리튼의 대 예언자 멀린.
다양한 내용과 해석이 붙어 전해지는 아서 왕 전설 속, 그의 최후는 늘 불분명했다.
그의 마지막에 과한 가장 대표적인 설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아서렛 전투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광증이 생긴 후 천문 관측소에 들어가 계속 별을 관찰했다는 설. 둘째는 형제와 친우를 잃고 슬퍼하다 동생이 지은 궁전에 은거했다는 설. 마지막 하나는…….’
멀린의 제자, 호수의 여인 니뮤에가 멀린보다 강력한 드루이디스가 되어 그를 바위 밑에 봉인했다는 설.
위대한 예언자이기도 했던 멀린은 언젠가 자신의 제자, 호수의 여인 니뮤에가 자신을 봉인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멀린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멀린의 최후에 관해선 이처럼 여러 종류의 설이 존재하지만, 이 세계의 멀린은 세 번째 설을 따른다.
그는 호수의 여인 니뮤에에 의해 봉인된 후 지금까지 존재해 왔다.
‘멀린은 이 세계의 법칙에 의하면, 멀린은 ‘후예’니까.’
멀린은 몽마(夢魔)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멀린은 마족의 후예인 셈이고 이 세계에서 후예는 불사(不死)는 아니되 불로(不老)의 존재다.
멀린은 전설의 시대를 지나 생존해 있으나 계속 봉인된 상태였던 그는 새 제자를 받았다.
육신은 갇혀 있었으나 웬만한 마족보다 강력한 힘을 지닌 몽마의 핏줄을 타고난 멀린은 이계 충돌 이후, 꿈을 통해 제자를 가르쳤다.
그리고 그 멀린의 제자가 저기에 있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
저 멀린의 제자는 괴도 네온 못지 않게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걸 좋아했다.
관심을 얻기 위해 귀찮고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위험을 얼마든지 감수할 정도로.
“칫……!”
“질 수 없다!”
둘은 등장 대사가 겹친 게 화가 나는지 분노를 숨기지 않으며 서로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이능파의 출력을 올렸다.
괴도 네온 뒤를 밝히는 네온사인 같은 이능파의 빛은 더더욱 강렬해지고, 멀린의 제자 뒤를 지키는 짐승의 그림자는 더욱 커지고 수가 늘어났다.
두 사람의 이능파 총량과 컨트롤 능력이 돋보이는 장면이었지만, 왜 굳이 이 상황에서 저런 짓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졸지에 자존심 강한 두 관종의 대결 사이에 낀 파티 참석자들이 박살 난 양쪽 창문을 번갈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그사이에도 저 둘은 자신 쪽에 더 시선을 모으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눈가에 이능파를 모으고 둘을 관찰하던 성국언이 씨익 웃는 게 보였다.
둘이 인간이라는 걸 알아챘나 보다.
저 두 사람이 말은 길게 하지 않았지만, 이능파를 저렇게 뿜어 대고 있으니 성국언의 능력으로 저 둘의 정체를 꿰뚫어 본 것 같다.
“포모르 마족이 준비한 여흥은 아닌 것 같구나. 저 둘은 진지해. 학창 시절이 생각나네.”
과연 0반 출신, 재선 국회의원 성국언은 온갖 아수라장을 겪어 봐서 그런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게다가 저 말에는 성국언의 통찰력도 드러나 있었다.
‘저 드루이드의 제자는 0반이니까 학창 시절이 생각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플마고에서 정체불명의 괴도 짓만 하다가 퇴장한 괴도 네온과 달리 저 멀린의 제자는 나름대로 일상생활을 보내는 장면도 등장하긴 했다.
은광고 0반 학생으로서.
‘은광고에 입학하는 게 멀린이 낸 과제라고 했던가…….’
‘꿈속에 등장해 저를 가르쳐 주시는 스승님께서 은광고에 입학하라고 하셔서요.’라는 말을 했다가 0반 행이 결정되긴 했지만.
어쨌든 저 멀린의 제자는 스승이 내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2학년이 되어야 등교를 시작한다.
그 과제에 관해선 자세하게 나오지 않지만, 지금 저 멀린의 제자가 끌고 온 짐승들을 보니 그 과제의 정체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실루엣을 보니 평범한 짐승의 형태가 별로 없어. 다 희귀한 동물이거나 지금은 이미 멸종된 걸로 알려진 동물일 가능성이 커.’
이계 충돌이 발생한 이 세계에서는 기존의 상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괴한 사건이 많이 터졌고 그중에 몇몇은 기사로 다루어지기도 했었다.
그 시작은 2학년 0반과 신문부의 여름 방학 취재 여행에서 있었던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희귀 동물들과 ‘거북의 대이동’의 목격이었다.
러시아의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하기 전에 있었던 목격담은 이후 문새론이 읽은 어느 기사로 이어졌다.
그 기사는 덴마크의 언론이 발표한 것이었는데, 희귀 동물의 이동은 덴마크의 이윌란 반도와 영국 사이의 북해에서 계속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영국에 온 이후엔 켈트 해에서 그 희귀 동물들이 목격되었다.
‘희귀 동물의 이동 루트는 말이 안 되는 게 많았지.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어.’
희귀 동물의 이동을 이끈 게 저 멀린의 제자였고, 목적이 이 경매의 습격과 저지라면 납득이 갔다.
봉인되어 있다고 하나 멀린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지닌 몽마의 후예였고, 다누 신족의 신보를 되찾기 위한 여정이었다면 상위 존재들도 멀린과 그 제자에게 힘을 빌려줄 것이다.
멀린과 상위 존재의 힘을 동시에 빌릴 수 있다면 아주 제한적이지만 다른 이들의 꿈속에 몸을 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이동한 지역의 사람 중에 희귀 동물이 대거 등장하는 꿈을 꾼 이가 있다면 그들의 개입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대다수는 희귀 동물의 대이동 뉴스를 본 여파로 그런 꿈을 꾸었겠거니, 하고 넘어갔을 가능성이 컸겠지만.
‘내가 꿈을 안 꾸니 저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힘을 빌리는 건 어렵겠지.’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어도 나는 꿈 자체를 안 꾸니 저 멀린의 제자의 힘을 사용하긴 어려울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사고하는 중에도 상황은 계속 흘러갔다.
“괴도 주제에 예고장도 없이 파티의 흥을 깨다니. 괴도에게도 지켜야 하는 도리와 규칙이 있는 법!”
“난 스승님의 의지를 계승하는 위대하고 멋진 드루이디스야. 나는 괴도가 아니야! 고상한 척하는 좀도둑 주제에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좀도둑이라니! 그런 과격한 폭언은 태어나서 처음 들었어……! 기품이 없는 존재에게는 아름답지 못한 말이 나오는군.”
“뭐 눈엔 뭐밖에 안 보인다고, 너한테 기품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수준 낮은 말싸움이 오갔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싸움 사이에 끼게 된 나는 자꾸 오그라들려는 손가락을 펴기 위해 애썼다.
금찬솔과 왕찬솔이 제갈재걸이라는 구심점 없이 만나 서로의 관종력을 두고 대결했다면 이 꼴이 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유치함이었다.
그리고 파티의 주최자는 그 유치한 대결을 계속 지켜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우리의 둥지에 오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스산한 목소리와 함께 이능파가 일렁였다.
푸른색의 가면을 쓴 마족이 손뼉을 치며 말하자 무기를 손에 든 장갑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났다.
저들이 떠드는 사이에 포위를 마쳤는지 괴도 네온과 멀린의 제자가 바깥쪽을 보며 혀를 차는 게 보였다.
사아아아……!
깨진 유리창 사이로 습기와 이능파가 몰아쳤다.
희미하게 바다 특유의 비린내가 흐르는 게 바다 안개의 결계가 가동한 것 같았다.
괴도 네온은 그렇게 대응할 걸 예상한 듯 손가락을 튀기며 창틀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딱! 파아앗!
그러자 파티장의 조명이 일시에 꺼졌다.
괴도 네온의 강렬한 네온사인 이능파의 광원에 눈이 익숙해진 상황에서 주변이 갑자기 어두워진 탓에 시야가 완전히 막혀 버렸다.
그 한순간을 놓치지 않고 괴도 네온과 멀린의 제자는 파티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둘은 초면일 테니 짠 것도 아닐 텐데 호흡이 척척 맞았다.
파앗!
파티장에 다시 조명이 들어왔다.
깨진 유리창 바로 앞까지 바다 안개 결계가 휘몰아친 와중, 마족의 권속이 무기를 들고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침입자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아직 경매 매물은 훔쳐 가지 못했다고는 하나 이미 포모르 마족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 둘은 이 고성 안에 있으니, 만회할 기회는 있었다.
푸른 가면의 마족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경매장을 방문해 주신 신사 숙녀 여러분, 주최자로서 이 참상에 깊이 사과드립니다. 주변 정리가 될 때까지 경매 시작을 잠시 미루고자 합니다.”
연단에 올라선 푸른 가면의 마족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숨기지 못한 수치심과 분노가 이능파의 형태로 드러났다.
어두운 빛의 이능파가 그의 주변에서 뭉글거리는 게 보였다.
“침입자를 처리할 때까지 경매가 연기되오니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말은 정중했으나 이능파 탓에 그 말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이런 곳에서 당할 일은 없겠지만, 저 음침한 살기를 느끼니 마음 어딘가가 싸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 *
성안의 휴게실과 오락실.
마족의 권속들은 파티장이 정결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파티 참석자들을 이쪽으로 안내했다.
휴게실, 오락실은 각각 흡연 구역과 비흡연 구역으로 나뉘었는데, 나와 성국언은 비흡연 구역의 휴게실로 이동했다.
원형으로 된 휴게실 안에는 사용 여부가 표시되는 개인실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인실 안으로 이동하자 성국언이 말을 걸었다.
“네 예상대로 괴도 네온의 등장으로 경매 시작 시간이 연기되었구나.”
괴도 네온의 성격이라면 경매가 열리는 것 자체를 환영하지 않았을 테니까.
천재의 첫 작품이 도품이 되어 품격 없는 경매에 올라가는 건 괴도의 미학과 철학에 맞지 않는다는 소리를 했을 건 안 봐도 뻔했다.
“거기에 있지?”
성국언이 그렇게 묻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전무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무영은 괴도 네온과 멀린의 제자 등장 이후 합류해 계속 우리 주변에 있던 상태였다.
“구경은 잘했어?”
“네, 훌륭한 작품이 많더군요.”
“성안이 넓던데 길을 잃진 않았고?”
“물론입니다.”
언뜻 듣기엔 뜬구름을 잡는 것 같은 말이었지만, 성국언이 만족한 얼굴을 했다.
도청을 의식해 돌려서 표현하긴 했지만, 지금 이 대화에서 전무영이 주어진 임무를 모두 완수한 게 확인되었다.
‘구경’은 ‘이무기의 귀천’의 수색을 의미했다.
전무영은 ‘이무기의 귀천’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듯했다.
전무영은 말로 설명하는 대신 이능파로 지도와 자신이 이동한 경로를 그려 보였다.
전무영은 비밀 통로를 발견한 건지 파티장을 둘러봤을 때 보지 못했던 루트를 통해 이동한 게 눈에 띄었다.
지도와 이동 루트를 머리에 담고 말했다.
“합류도 마쳤으니 저는 혼자 구경해도 될까요? 잠깐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확인? 여기서 혼자 움직일 생각이야?”
전무영과 합류했고 그의 잠입 임무는 일단 일단락됐으니 그가 홀로 움직일 일은 없다.
그러니 나는 잠시 빠져도 될 거다.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요.”
나는 무모한 짓을 벌이고 있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