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라이벌 (1)
토요일, 은광고.
영국과 9시간의 시차가 있는 한반도는 현재 오전이었다.
토요일이지만 은광고는 동아리 활동을 하러 온 학생, 과제를 하거나 자습하는 학생 혹은 주말을 맞이해 머리를 비우고 멍하니 학교를 배회하는 기숙사생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탁거산의 아침 훈련을 마친 맹효돈과 방윤섭도 그사이에 섞여 있었다.
“에이씨, 오늘은 아침 훈련 빠지려고 했는데 그 0반 호구 때문에…….”
탈의실에서 가방을 챙겨 나온 방윤섭이 툴툴거렸다.
평소 같으면 훈련으로 지쳐서 제대로 투덜거리지도 못했는데, 입이 산 걸 보니 오늘은 여유가 있는 듯했다.
옆에서 종이 팩 우유를 흡입하던 맹효돈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방윤섭을 보며 말했다.
“훈련 빠질 거면 학교를 오지 말았어야지. 우리 반 그 새끼한테 도인…… 선생님이 일 잘한다고 보너스 줘서 의욕이 넘치던데.”
“아, 오늘 학교에서 약속 있었다고. 다른 알바 놔두고 왜 사이비 도인의 잡일을 하냐.”
“그 새끼 다른 알바도 하고 있을걸.”
화제는 목우람에 관한 것으로 바뀌었다.
목우람은 방윤섭의 탈주를 여러 차례 저지하며 탁거산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었다.
탁거산은 목우람이 방윤섭을 잡아 올 때마다 약속한 보수에 더해 보너스도 얹어 줘, 이에 깊게 감동한 목우람은 일을 더 열심히 했다.
조의신이 의뢰했다는 흡연 적발 부업을 하는 것도 그렇고, 최근 들어 방윤섭은 목우람을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목우람의 집요한 추적 탓에 기척을 감지하는 능력이 좀 향상됐긴 했으나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학교 정문 앞이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 호구 새끼는 어떻게 거기까지 알고 와서…….’
방윤섭은 예기치 못하게 기다리게 만든 약속 상대를 떠올렸다.
목우람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처참한 모습을 그 약속 상대에게 보인 것도 짜증 났고, 탁거산과의 아침 훈련을 빼먹고 약속을 잡은 게 그 약속 상대에게 걸린 것도 짜증 났다.
제일 열 받는 건 그 약속 상대를 기다리게 만든 것이었다.
방윤섭은 화풀이하듯 맹효돈에게 소리 질렀다.
“넌 왜 이쪽으로 오는데, 기숙사는 저쪽이잖아! 따라오지 마!”
“학교 앞 편의점에서 빵 사 먹고 다시 훈련하러 갈 거다. 기숙사 매점은 맨날 3학년 0반에서 빵 다 사 가서 먹을 게 없어.”
“그놈의 빵! 아오!”
2학기에 들어 3학년 0반은 강한 담임 임연화에게 패배할 때마다 쌓인 스트레스를 빵을 폭식하면서 풀었다.
평소에도 많이 먹어 댔지만, 우기환 일당의 패배가 거듭될수록 빵 소비량이 점점 늘었다.
임연화는 귀여운 제자들의 고칼로리 고탄수화물 섭취 행태를 보고 청소년 비만을 염려한 나머지 더욱 가혹한 훈련을 시켰다.
그 결과 그만큼 3학년 0반은 강해졌고 더 자주 담임에게 도전해 패배했고, 더 많이 먹어 댔다.
하여튼 그런 연유로 맹효돈은 기숙사 매점에 가는 대신 편의점에 들러 간식을 사 먹고 개인적으로 자율 훈련을 더 할 생각인 듯했다.
방윤섭은 저 천재 놈이 벌써 파생 스킬 습득 직전에 다다른 주제에 시간이 날 때마다 훈련을 하려 든다는 게 배알이 꼴렸다.
그걸 보고 배알이 꼴리긴 해도 노력할 생각이 들지 않는 자기 자신에게도 실망했다.
‘……그래도 오늘은 놀려고 그 약속을 잡은 게 아니니까 괜찮겠지. 나는 노는 게 아니야!’
방윤섭은 약속 상대와 오늘의 일정을 생각하며 부정적인 생각을 억눌렀다.
맹효돈과 방윤섭은 서너 걸음 떨어져 걸었지만, 가끔 대화인지 말다툼인지 뭔지 모를 말을 나누곤 했다.
대화의 주제는 목우람이 펼치는 포획 스킬 파훼법이었다.
“윤섭아.”
뒤에서 누군가가 방윤섭을 불러 세웠다.
얘기하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정문을 지나쳐 있었다.
사정을 설명하자 상대가 양해해 주었지만, 방윤섭 때문에 저 약속 상대는 훈련 시간 내내 기다렸다.
그런 주제에 맹효돈과 이야기하다 정신이 팔려 약속 상대를 또 기다리게 할 뻔했다.
“어…… 많이 기다렸냐?”
약속한 상대는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 평범한 인상의 여학생은 방윤섭과 그럭저럭 친해진 후에도 도통 말수가 늘지 않았다.
방윤섭의 약속 상대는 한때 은광고를 뒤흔든 부정 입학 사건에 휘말린 선의의 피해자였다.
방윤섭은 중간고사 때 우연히 이 여학생이 앉은 열람석 주변에 앉아 공부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마주쳤고 이를 계기로 어쩌다 보니 스터디 그룹 비슷한 걸 같이하게 되었다.
오늘도 아침에 만나 학교 근처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할 예정이었다.
“…….”
“……아, 미안하다고.”
방윤섭은 찔리는 게 많아 일단 사과하고 봤다.
여학생은 속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자세히 보니 그리 화가 난 표정은 아니었다.
맹효돈은 괜히 작별 인사를 한답시고 분위기를 깨는 짓을 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맹효돈이 방윤섭과 여학생을 돌아봤을 때, 둘은 무언가 대화하며 나란히 걷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방윤섭이 말하는 것 같긴 했지만.
‘저 새끼한테 여친이 있었나?’
방윤섭과 자주 만나긴 했지만, 제대로 된 대화를 한 적이 없어 맹효돈은 그의 주변 사정은 잘 몰랐다.
또, 맹효돈은 여학생이 한때 학교에서 부정 입학 스캔들에 엮인 선의의 피해자라는 건 알아봤으나 방윤섭과 교류가 있는 줄은 몰랐다.
‘잘 보니까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맹효돈은 그 여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 부정 입학 사건이 터졌을 땐 맹효돈은 등교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남에게 관심을 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새삼 그 여학생의 얼굴을 보니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좀 익숙한 얼굴 같은데, 어디서 봤지?’
맹효돈은 돌머리를 열심히 굴려 봤지만,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다.
맹효돈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학교, 집, 스포츠 경기장만을 전전했기에 또래 아이와 교류를 나눌 곳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같은 중학교 출신은 아닌데……. 근처에 있는 학교 중에서 은광고 간 애도 없고.’
탄래중학교에서 은광고에 진학한 건 맹효돈뿐이다.
인근 중학교를 다 포함해 봐도 플레이어 특목고 합격생은 맹효돈 하나뿐이다.
탄래중 측에서 그리 박대한 맹효돈의 이름을 현수막에 걸고 자랑질을 할 정도였다.
‘플레이어들한테 더 못되게 구는 거 같았어.’
맹효돈은 중학교 시절 생각을 하며 씁쓸해했다.
대충 던진 돌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듯 어느새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으나 맹효돈은 인지하지 못했다.
맹효돈이 편의점에서 빵과 음료수를 한 아름 사 들고 나가려 할 때였다.
“야.”
누군가가 맹효돈을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맹효돈과 마찬가지로 편의점 봉투에 먹을 걸 가득 채운 남학생이 보였다.
맹효돈이 아는 인물이었다.
“부반장 친구잖아.”
맹효돈에게 말을 건 이는 유상훈이었다.
유상훈은 옆 반 소속이기도 하고 조의신과 교류가 있어 자주 놀러 오다 보니 안면을 튼 상태였다.
또 야구장 건을 계기로 알게 된 말 많은 장남욱이 몇 번 유상훈에 관한 이야기를 해서 머리 나쁜 맹효돈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맹효돈이 유상훈에게 농구부 훈련하러 왔냐고 묻자 유상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어. 3학년 0반이 중앙 구역 매점도 다 털어 가서 편의점으로 나왔다.”
3학년 0반이 기숙사 매점을 넘어 중앙 구역 매점도 털어 간 모양이다.
맹효돈은 편의점에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걸으면서 딸기 크림 빵을 하나 뜯어 먹었다.
유상훈도 그걸 보자 배가 고팠는지 새우 핫바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먹으면서 학교로 향하던 중, 유상훈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조의신 기숙사에 있냐? 연락이 안 되던데.”
“기숙사에 없을걸. 왜?”
“아니, 그냥.”
유상훈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금세 입을 다물었다.
맹효돈은 잠깐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조의신의 생일 때문에 물어봤나 싶어서 그냥 그리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 이후로 두 사람 다 말없이 간식을 먹으며 걸어갔다.
* * *
여러 색의 호박 등불이 불을 밝힌 파티장.
백조 가면을 쓴 파티 참석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백조 가면을 쓴 인물은 언뜻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하얀 블레이저를 입고 있었는데, 잘 보니 아주 작은 사이즈의 크리스털이 촘촘히 장식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보타이의 무늬도 섬세해 개성이 넘치면서도 기품이 느껴졌다.
‘짐작 가는 브랜드가 없어. 오더메이드한 옷인가?’
오더메이드한 옷.
이 말에서 뭔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아는 어느 괴도가 소위 말하는 괴도 짓을 할 때마다 손수 제작한 옷을 입고 등장했던 탓이다.
“안녕하세요, 좋은 밤입니다. 까마귀 가면을 착용한 신사분께 물어볼 게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정중했지만 조금 낯이 간지러울 정도로 과장된 인사였다.
인사도 인사였지만, 저 인사말이 한국어였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점점 더 불길했다.
성국언은 상대가 한국어를 사용하자 경계하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무시할까 고민하다가 평정을 가장해 영어로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제게 귀한 시간을 할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까마귀 가면의 신사분, 당신은…….”
백조 가면을 쓴 누군가가 입이 열리기 전이었는데, 본능적으로 몸과 정신이 위험을 감지한 건지 나도 모르게 손끝이 움찔거렸다.
“적벽괴도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단어’가 들리기 무섭게 손끝이 오그라들었다.
이 파티장에서 눈에 띄는 수제 정장을 착용하고, 까마귀 가면을 발견하자마자 ‘그 단어’에 관해 물을 인물은 하나밖에 없었다.
괴도 네온.
그 오그라드는 놈이 지금 백조 가면을 쓰고 내 앞에 서 있었다!
“……적벽괴도? 환몽 게이트 건을 무너뜨린 그 의적 말하는 건가.”
눈앞이 캄캄해졌다.
손끝을 넘어 세계와 시공간이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괴도 네온에 이어 성국언도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동행분께선 잘 알고 계시는군요. 네, 그 적벽괴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건지 물어본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긴, 오그라든다고 생각한다.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으나 차마 그렇게 대놓고 말해 정체를 밝히는 실책을 범할 순 없었다.
내가 애써 말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땡…… 때앵…….
종소리가 길게 파티장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푸른색 장막으로 가려진 연단 쪽으로 향했다.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다.”
그 순간 파티장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
일종의 연출인가 싶었는데, 괴도 네온이 갑자기 혀를 찼다.
“안 돼! 선수를 빼앗길 순 없어!”
괴도 네온은 경악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곤 창문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건가.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와장창!
쨍그랑!
연단을 기준으로 좌우에 위치한 유리창이 일제히 깨졌다.
한쪽에서는 네온사인의 이능파 폭죽이 펑펑 터져 나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무수한 수의 짐승의 그림자가 보였다.
폭죽의 빛을 등진 소년, 짐승들의 그림자들을 등진 소녀는 각각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둘은 목소리에도, 주변에도 화려한 빛의 이능파를 싣고 있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신예 괴도 네온, 등장!”
“켈트에서 가장 위대한 드루이드인 멀린의 제자, 여기에!”
몹시 눈에 띄는 이들이 동시에 등장하여 동시에 대사를 뱉는 바람에 묻히고 말았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둘이 뭔 소리를 하는지 못 알아들었을 거다.
둘은 가면 너머로 눈을 부릅뜨고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 둘의 정체를 아는 나는 머리가 아파졌다.
둘 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었으니까.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