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89화 (388/925)

60. 파티 (12)

푸른 가면을 쓴 마족의 말을 잘못 이해했나 싶어서 성국언 쪽을 봤다.

성국언 역시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건지 정중하게 되물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다누 신족의 신보를 파괴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푸른 가면의 마족은 처음 제안했을 때보다 느리고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다른 표현을 사용했지만, 똑같은 내용의 말이었다.

처음부터 마족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 같았다.

이 주변에 온 이후 느꼈던 위화감이 머릿속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배지가 푸른색으로 바뀐 이후부터 뭔가 이상했어.’

푸른빛 장막을 통과한 직후, 유독 딱딱하게 느껴졌던 바닥.

이능파 폭죽 소리에 묻혔던 바닥을 밟은 후에 들린 어떤 소리.

그중 가장 이상했던 건, 성국언에게 켈트인의 피가 섞여 있지 않다고 단정 지은 마족의 말이었다.

‘성국언의 위장은 완벽한 상태야. 인종이 드러나지 않게 신경 썼고 여기에 오기 전까지 눈에 띄는 행위를 한 적도 없어.’

성국언은 이 주변에 오자 갑작스레 당첨자가 되어 알렉산드라이트 왕관을 받아 주목받게 되긴 했다.

그런데 그 과정도 뭔가 이상했다.

‘걸린 상품에 비해 당첨자로 선정된 과정이 뭔가 허전해.’

파티 게임의 주목적은 간단한 여흥을 제공하고 파티의 분위기를 띄우는 것.

단순히 선물을 나눠 주기 위한 목적이라 해도 최소한의 과정은 준비하는 법이다.

게임을 하지 않더라도 다트를 하나 던지거나 룰렛을 돌리거나 하다못해 포춘 쿠키라도 까거나.

그러니 입장하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성국언이 당첨자로 선정된 건 파티 게임의 목적과 어울리지 않았다.

어딘가 의심스러웠던 정황을 하나하나 조합해 본 결과, 어느 결론에 다다랐다.

‘설마, 부수어 달라는 다누 신족의 신보는……!’

나는 방금 우리가 통과했던 장막 쪽을 봤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우리가 밟았던 그 바닥을 봤다.

“동행하신 분께서는 눈치채신 것 같군요.”

푸른색 가면을 쓴 마족은 가면 너머로 우리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나 보다.

성국언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한 건지 바닥 쪽을 보다가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나는 거의 확신하긴 했지만, 확인차 물어보기로 했다.

“확보 중인 신보는 하나가 아니었나 보군요.”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푸른 가면의 마족은 짐짓 모르는 척 그렇게 말했다.

다누 신족의 신보를 부수어 달라는 대범한 소리를 한 주제에 자신의 패를 다 드러내고 싶진 않은가 보다.

그저 우리를 시험해 보고 싶어서 저러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에 오신 분들 대다수가 다누 신족의 신보를 보기 위해 오셨어요.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주최 측에서 신보를 부수어 달라는 건, 파티 참석자분들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예요.”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파티에 초대된 이들은 다누 신족의 신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

초대장에 다누 신족의 신보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지만, 포모르 마족은 의도적으로 은밀히 주요 경매 매물에 관한 이야기를 흘려 손님을 끌어모았다.

괴도 네온의 예고장이 날아온 상황인데, 경매가 시작되기 건 신보를 부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만약 경매에 신보가 등장하지 않고, 괴도 네온이 ‘이무기의 귀천’의 탈환에 성공하면 내년부터 아무도 포모르의 마족이 여는 파티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 신보가 하나가 아니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하지만 경매에 내놓을 신보와 부수고 싶은 신보가 따로 존재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죠.”

“훌륭하십니다. 짧은 문답으로 거기까지 파악하시다니.”

푸른 가면의 마족이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저 마족의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으니, 단서를 얻을 겸 더 떠보기로 했다.

“왕관을 가져갈 ‘당첨자’가 등장하지 않으면 그 신보를 부술 예정은 없었죠?”

“네! 그 신보는 그 신보가 선택한 자에 의해 부수어져야 의미가 있지요.”

‘선택’이라는 단어까지 나왔으니 확실해졌다.

푸른 가면의 마족은 더 숨길 생각도 없는지 당당히 그 신보의 정체를 밝혔다.

“여기에 묻어 둔 것은 ‘리어 팔(Lia Fáil)’. 증오해 마지않는 다누 신족의 대관석입니다! 오늘 파티장에서 수많은 이들에게 짓밟힌 비운의 신보지요.”

켈트 신화 속, 왕은 즉위할 때 거쳐야 할 의식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다누 신족이 팔리아스에서 가져온 신보의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그 신보의 정체는 왕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대관석 혹은 운명석이라고 불리는 ‘리어 팔’.

이 신보는 기록이 거의 없는 켈트 신화에 등장하니 소재나 형태, 행방이 불분명했다.

누군가는 하늘을 향해 뻗은 기둥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고도 한다.

어떤 이는 타라의 언덕 깊숙이 묻혀 있다고 주장한다.

혹은 성지에 존재하는 평평한 발판이라고도 묘사되기도 한다.

‘그 리어 팔이 파티장 바닥에 깔려 있던 거구나.’

리어 팔은 왕의 자격을 가진 자가 만지면 소리를 질러 왕의 존재를 널리 알린다고 한다.

에린 피어너의 핀 막 쿨이 섬긴 콘 왕이 밟자 그 땅을 지배할 이들의 수만큼 비명을 질렀다고도 한다.

그리고 성국언이 ‘당첨’되었다는 건 분명 리어 팔의 비명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돌은 왕의 재목을 판별하는 신보. 워낙 비명을 지른 지 오래되어 왕의 자질을 가진 이를 보자 곧바로 소리를 질러 댔지만, 비명을 지르던 도중에 당신이 자기 나라의 왕이 아니란 걸 알아챈 건지 입을 다물더군요.”

푸른 장막을 통과했을 때 발밑에서 느껴진 위화감과 이상한 소리.

그리고 성국언의 존재와 자질.

장난스럽게 건네진 왕관.

다누 신보의 존재.

이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마족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 분쯤은 왕의 자질을 가진 이가 방문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한 나라의 왕이 될 만한 재목입니다.”

성국언이 왕이 될만한 재목이라는 말에 환성이 터지려는 걸 참았다.

현대에 들어와 대부분의 국가에서 왕의 존재는 거의 사라졌고, 한반도도 군주제를 채택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 나라의 대표, 수장의 개념은 남아 있다.

그러니 왕의 재목이라는 단어에 감격스러워졌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나라의 대표가 될 재능을 타고났다니, 과연 다누 신족의 신보는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신화급이다.’

한반도를 대표하는 존재가 성국언이 될지도 모른다.

아직 성국언이 출마하지도 않았는데 머릿속에서 대통령 선거 포스터 속의 성국언, 가두연설을 하는 성국언, 토론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성국언, 성국언에게 한 표를 행사하러 투표에 참가하는 나, 당선되는 성국언의 모습 등등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니, ‘아직은’ 그렇게까지 가는 건 불가능해.’

물론, 머리 한구석에서 냉정하게 ‘아직은’ 성국언이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헌법 제67조에 의하면 대통령으로 선거될 수 있는 자는 국회의원의 피선거권이 있고 선거일 기준 40세에 달해야 한다.

성국언은 아직 30대이므로 대통령 선거에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출마 자격이 있다고 해도 현재 플레이어 인식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고, 성국언 본인도 국회의원으로서 하고 싶은 일이 많으니 아마 대통령 선거에 나서진 않을 거다.

‘그래도 성국언이 이대로 정치 경험을 쌓고, 플레이어의 인식이 변한다면 언젠가는…….’

그러나 신화나 전설 속에서 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받고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영웅은 수도 없이 많다.

플마고에서 대통령 피선거권을 얻기 전에 사망한 성국언처럼.

하지만 내가 전개를 바꾸면 분명 성국언이 한반도의 대표가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이 경매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수행해야 해.’

나는 아직도 뿌듯한 마음을 억누르고 냉정하게 사고하려 애썼다.

하여튼 푸른 가면의 마족이 말하는 걸 보니 마족들은 처음부터 경매에 리어 팔을 올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파티 게임으로 가장한 선정을 거쳐 리어 팔이 반응을 보이는 이를 찾았던 거겠지. 왕의 재목을 가진 이가 리어 팔을 부수게 하려는 걸 거야.’

왕의 자격을 가진 이가 다누 신족이 인정한 수많은 왕들의 흔적이 남은 대관석을 부순다.

포모르 마족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다누 신족 얼굴에 가장 크게 먹칠을 하기 좋은 방법 중 하나일 거다.

번거로운 파티 게임을 준비하고 이만한 리스크를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누 신족은 상위 존재로 이 세계에 간섭할 수 있습니다. 상위 존재의 노여움을 사는 건 꺼려지는군요.”

성국언이 성국언답지 않은 소리를 정중하게 했다.

성국언이 상위 존재의 노여움 같은 걸 걱정해 몸을 사리는 플레이어라면 ‘국언무쌍’ 같은 별칭은 붙지 않았을 거다.

진짜 하고자 하는 일 앞에선 진족이건 후예건 상위 존재건 신경 쓰지 않는 게 성국언이다.

‘지금 성국언의 말을 해석하면 ‘귀찮으니까 거절한다.’ 정도 되겠지.‘

정치가답게 그걸 그럴싸하고 예의 바르게 포장해서 말한 거고.

푸른 가면의 마족은 그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는지 자신이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그에 합당한 보수는 지불할 예정입니다.”

그 무언가가 상위 존재의 노여움을 각오할 만한 가치가 있는 보수일까?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고 있었는데, 포모르 마족은 과연 그것에 걸맞은 보수를 제시했다.

“포모르 마족은 당신이 왕좌에 오르도록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겠습니다. 왕좌가 아닌 국가수반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다누 신족의 대관석을 부순 자가 한 나라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면, 우리에겐 그것만 한 기쁨이 없습니다.”

포모르 마족의 무조건적인 지지.

성국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제안 자체에 혹한다기보다는 ‘그 돌멩이 하나 부수자고 거기까지 한단 말이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답은 언제라도 상관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장 부수어 달라는 건 아닙니다.”

드디어 리어 팔이 비명을 지른 대상을 찾아 기분이 좋은 건지, 푸른색의 가면을 쓴 마족은 생각해 본다는 말에 아쉬워하면서도 물러났다.

마족은 디바이스 코드가 적힌 명함을 건네고 순순히 사라졌다.

그 후,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주의하면서 성국언과 대화를 나눴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구미가 당기지만, 선거 운동에 진족의 힘을 빌릴 생각은 없어.”

성국언은 디바이스 코드를 암기한 후 명함을 처분했다.

성국언은 손을 떠난 명함에 시선도 주지 않았다.

“마음은 정해졌지만, 적당히 망설이는 척 상대를 떠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성국언은 시선을 느꼈는지 한쪽을 돌아보며 입을 다물었다.

백조 가면을 쓴 파티 참석자가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파티 참석자는 시선이 마주치자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아는 사람인가? 아니야, 까마귀 마왕이라면 계약자에게 반드시 까마귀 가면을 착용하도록 지시하겠지.’

여기 어딘가에 MITRON의 파티시에가 와 있는 건 확실했지만, 백조 가면을 쓰진 않았을 거다.

결국 가면이나 체격만으로 누군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착용한 것 중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아까 주사위 게임에서 커프 링크스를 딴 사람인가?’

백조 가면을 쓴 누군가는 붉은 호박 등불 아래에 전시되어 있던 체스 무늬 커프 링크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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