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파티 (11)
성국언, 조의신과 따로 행동 중인 전무영.
그는 포모르 마족이 곳곳에 설치한 마법진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육지 쪽에는 생각보다 마법진의 숫자가 적어. 심해의 마족들이라고 불린 적이 있는 이들이니 바다를 중심으로 방비한 건가.’
이것도 예상한 대로였다.
전무영은 아쉬워하면서도 사전에 협의한 대로 육지 쪽의 마법진 위치를 철저히 살폈다.
임무를 완수한 그는 남는 시간을 이용해 추가 작업도 실행했다.
전무영은 기척을 죽이고 교량 주변의 이능파 수치를 측정하고 파티 초대객들의 가면과 위장 정도를 두고 정체를 가늠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이제 예정대로 가장 마지막으로 입장하면 되겠군.’
보통 주차를 담당하는 운전사는 차에서 대기했지만, 전무영처럼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성으로 향하는 이도 몇몇 있었다.
전무영은 이들 사이에 섞여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교량과 성의 위용에 감탄하는 척, 호박 등불에 시선을 빼앗긴 척 전무영은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며 뒤로 갔다.
그러나 전무영은 좀처럼 맨 뒤에 서지 못했다.
전무영보다 더 느긋하게 이동하는 파티 참석자가 있던 탓이다.
‘유독 느리게 움직이는 이가 있군. 성가신데.’
그 누군가는 전무영이 걸음을 멈추면 함께 멈추고, 이동하기 시작하면 동시에 발걸음을 뗐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무영을 의식한 움직임이었다.
‘설마 잠입이 들통난 건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구체적인 잠입 계획을 세운 건 영국에 도착한 이후다.
전무영은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기로 했다.
전무영이 긴장을 숨기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파티 참석자를 돌아봤을 때였다.
“왜 자꾸 걸음을 멈추는 거야. 빨리 좀 가지 그래? 슬슬 짜증 나는데.”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가면을 쓴 누군가는 슬슬 짜증이 난다고 하긴 했으나 이미 잔뜩 짜증이 난 듯했다.
가면 너머로 이능파가 부글부글 피어오르는 게 보였는데, 상대는 보통내기가 아닌 듯했다.
전무영을 경악하게 한 건 그 강렬한 이능파가 아닌 다른 것이었다.
‘……한국어로 말하고 있어!’
이계 충돌이 처음 발생해 지력이 충만한 한반도는 ‘어둠의 시대’라고 불리는 암흑기를 거쳤으나, 대영웅 무쇠팔 송만석에 의해 가장 먼저 플레이어계의 여명기를 맞이한 곳이기도 했다.
그만큼 걸출한 플레이어를 많이 배출했는데, 세계 10대 이계 공략 플레이어 팀 중에 한국인이 팀 마스터 자리에 오른 팀은 총 네 곳이나 된다.
붉은 사자, 영원의 호수, 절흑풍림, 수국향기.
거기에 더해 팀 마스터는 한국인이 아니나, 에어 소사이어티, 화이트 템페스트처럼 주요 간부진 자리에 한국인 플레이어가 있는 팀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플레이어 용어 중에는 아예 한국어가 영어보다 먼저 정착한 경우도 있었고, 한국에 유학 오는 플레이어들도 많았다.
고명한 플레이어가 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포모르 마족이 비밀리에 주최하는 파티다.
이런 곳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상대방의 저의를 파악할 수 없어 전무영이 대답을 망설였다.
“아, 혹시 한국말 몰라? 그래도 배려하기 싫으니까 한국말로 말할게.”
저의고 뭐고 상대방은 그저 무례할 뿐인 듯했다.
전무영은 고민 끝에 영어로 답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싫은데.”
상대는 영어도 할 줄 아는 듯했으나 꿋꿋하게 한국어로 답했다.
그에 덧붙여 짜증 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공은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잖아? 양보하기 싫어.”
상대는 이상한 논리를 들어 말했다.
전무영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은광고 0반 아이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군.’
마치 은광고의 0반 소속 학생들이나 주장할 법한 괴상한 말이었다.
실제로 2학년 0반에 재학 중인 반장과 부반장, 금찬솔과 왕찬솔이 이와 같은 주장으로 학생회와 선도부의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으나 전무영은 그것까진 알지 못했다.
전무영은 이 이상한 자와 엮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행동 방침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전무영은 시간을 질질 끌던 게 언제였냐는 듯 빠르게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쥐 가면을 쓴 인물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 * *
산산이 부수어지는 유리 조각 사이로 흰 덩어리가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하얀 장갑을 뭉친 덩어리였다.
그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기 전에 연단 위에 서 있던 푸른 가면의 마족이 손을 움직였다.
파아앗! 휙!
상대의 뺨을 날리는 듯한 빠른 손놀림에 푸른 바람이 일었다.
마족이 부리는 바람은 단숨에 유리 조각과 마족 권속의 잔재를 창밖으로 날려 버렸다.
빠른 대처에 창가에 서 있던 파티 참석자가 유리 조각이나 장갑 뭉치에 맞는 화를 면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누군지 몰라도 일종의 경고를 한 모양이군.’
괴도 네온일까?
어쩐지 이렇게 행동하는 건 괴도 네온답지 않은 수단 같았다.
괴도 네온이 유리창을 깬다면 이 정도 선에서 끝나지 않았을 거다.
괴도 네온은 위험을 감수하고 오글거릴 정도로 화려한 이펙트와 함께 BGM까지 준비해 뒤에 깔고 나타날 놈이니까.
‘아직 파악하지 못한 누군가가 개입한 걸까?’
초대객들을 인도하고 서빙을 하던 마족의 권속들, 하얀 장갑들이 무참히 뭉쳐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은 밖에 내던져져 유리 조각과 함께 처참히 굴러다닐 텐데, 보기 좋은 꼴을 하고 있진 않을 거다.
아무리 봐도 파티의 시작과 동시에 흥을 깨기 위한 일종의 야유나 경고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의도를 읽은 건지 푸른 가면의 마족은 몹시 기분이 나빠 보였으나 기분이 나빠 보이는 건 일순이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합니다!”
푸른 가면의 마족이 손뼉을 한 번 치자 파티장 안에 있던 장갑들이 ‘펑!’, ‘펑!’ 하는 소리를 내며 이능파를 뿜었다.
가지각색의 빛에 파티 참가객들이 짧게 환성을 뱉었다.
이능파를 뿜어내는 것을 마친 하얀 장갑들은 색이 변해 있었고, 변한 장갑 색과 같은 빛을 두르고 있었다.
일종의 배경처럼 존재하던 장갑들이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
색이 변한 건 장갑뿐만이 아니었다.
아까 배부했던 배지도 색이 변해 있었다.
“지금부터 여러분의 배지 색에 맞는 구역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홀 곳곳에 여러 색의 호박 등이 설치되었다.
어떤 호박 등은 홀 내부에 있었고, 어떤 호박 등은 다른 복도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호박 등 아래에는 유리 상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는데, 아마 마족이 말한 게임의 경품 같았다.
경품을 본 파티 참석자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저기에 있는 건 팬시 컬러 다이아몬드, 저쪽에 있는 건 SSR급 아이템 카드…… 예상했던 것보다 경품의 레벨이 높아. 방금 있던 해프닝 탓에 수준을 높인 걸까.’
여기에 올 만한 파티 초대객들이 저 정도 경품에 좌지우지될 수준의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래도 파티 주최자의 성의가 느껴지는 선물 앞에 다들 찬사를 보냈다.
맹렬한 경품 공세 덕인지 분위기는 다시 살아났다.
“저희가 준비한 놀이를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행운을 빕니다!”
푸른 가면의 마족은 어느 사이엔가 벨벳 커튼으로 가려진 깨진 유리창을 한번 보고는 연단 아래로 내려갔다.
아마 원인 파악을 위해 직접 나선 것 같았다.
‘초대장에 파티 게임 참가는 자유라고 했지만, 다들 참가하는 분위기면 맞춰서 움직이기로 했지.’
주변을 둘러보니 전원 배지와 호박 등불의 색을 비교하며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에선 게임에 참가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성국언과 내 배지는 다행히 같은 색이었다.
“그럼 가 볼까. 이기면 선물은 양보하마. 저 커프 링크스는 너한테 더 잘 어울릴 것 같구나.”
성국언이 붉은 호박 등불 아래에 높인 체스 무늬 커프 링크스 세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 우리가 한 게임은 주사위 게임이었는데 성국언과 나 둘 다 지고 말았다.
딱히 상품을 탐낸 게 아니라 참가에만 의의를 두었기에 나나 성국언 둘 다 그리 아쉬워하지 않았다.
나와 성국언이 게임을 마치니 배지 색이 바뀌어 있었다.
“그럼 다른 곳으로 가 볼까. 푸른색에 걸릴 때까지 게임을 하자.”
성국언은 연단 쪽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처음 연단에 섰던 마족은 푸른 가면을 썼고, 그가 자리를 비운 지금 그 주변엔 푸른 등불이 설치되어 있었다.
‘주최자의 색이 걸린 등불이 있으니 뭐가 있을 가능성이 크겠지.’
바뀐 배지 색은 초록색.
곧바로 푸른색에 걸리진 않았다.
초록색 호박 등불을 찾아 이동하는 사이, 붉은 호박 등불 아래쪽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누군가가 주사위의 수를 완벽히 맞힌 것 같았다.
‘확률로 따지면 1%도 안 됐는데, 벌써 당첨자가 나오다니.’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 있는가 보다.
조기에 당첨자가 나올 것을 대비해 상품을 여러 개 준비했는지, 진행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음은 카드 게임이군. 아이템 카드가 걸린 카드 게임이라니.”
우리를 비롯한 대다수의 파티 참가객들은 여기저기 이동하며 게임을 즐겼다.
파티 게임을 위해 이동할 일이 많았는데 슈트나 드레스, 구두를 착용한 이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성 곳곳에 안락 소파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예 게임을 포기하고 자리 잡고 쉬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런 이들은 발코니에 테이블 쪽으로 안내받았다.
휴식하는 이들은 야경을 보며 느긋하게 만찬이나 티타임을 즐길 수 있었다.
“드디어 푸른색으로 바뀌었군. 아까 연단에 선 마족의 색이다.”
나와 성국언이 착용한 배지가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주변은 푸른빛의 장막 탓에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무슨 게임 중인 건지 알 수 없었다.
‘단서를 잡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와 성국언이 푸른빛의 장막을 통과했을 때, 위화감을 느꼈다.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어 차이점을 느끼기 어려웠지만, 장막 안은 유독 바닥이 딱딱한 것 같았다.
‘바닥에 뭐가 있는 것 같은데 게임과 관련이 있는 건가……?’
성국언도 위화감을 느꼈는지 걷는 속도가 조금 느려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우우웅……! 펑!
푸른 장막이 걷히고 우리 위로 이능파 폭죽이 터졌다.
높은 홀 천장 가까이 왕관을 쓴 호박이 나타나 성국언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이능파 폭죽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어.’
성국언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성국언 주변에 시선이 쏠린 탓에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푸른 장갑의 권속은 바삐 손뼉을 치며 축하 인사를 보냈다.
“축하합니다! 당첨자가 나왔습니다!”
성국언은 알렉산드라이트가 박힌 왕관을 건네받았다.
성국언은 왕관을 건네받아 머리 위에 써 보는 등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리 기분이 내키는 것 같지 않았다.
불필요하게 이목을 끌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박수 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푸른색의 가면을 쓴 마족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유리창 건은 수습한 건가? 그런데 이쪽을 보는 것 같은데.’
정확히 말하면 성국언 쪽을 보고 있었다.
그는 기쁨 반, 아쉬움 반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아쉽게도 켈트인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았군요.”
이 말에는 어떻게 반응해야지?
성국언이 대응하기 전에 마족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오해하지 마십시오. 나쁜 일은 아니니까요. 그저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푸른 가면의 마족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다누 신족의 신보를 하나 부수어 주셨으면 합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