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라이벌 (8)
조의신과 헤어져 ‘이무기의 귀천’을 탈환하기 위해 움직이던 성국언과 전무영.
두 사람의 짧은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괴도 네온이 사전에 ‘이무기의 귀천’을 노리겠다고 예고한 바람에 온갖 종류의 함정을 준비한 탓이었다.
고차원적인 결계부터 강력한 마족의 권속, 까다로운 기믹을 가진 함정까지.
‘당선 후에도 이계 공략을 계속하겠다는 공약이 도움이 될 줄이야.’
성국언은 국회의원 당선 후에도 ‘일주일에 한 번 반드시 SR급 이상의 이계 공략에 나서 최대공헌자가 되겠다’라는 내용의 공약을 걸었다.
성국언은 그 공약을 늘 지켜 왔는데, 공약의 최저선인 SR급을 넘어 SSR급 이계 공략에도 나서 전무영을 비롯한 보좌진의 골머리를 썩이곤 했다.
희귀도가 높은 이계 공략을 할 때 간혹 부상을 입긴 했으나 그 덕에 성국언은 현역 플레이어로서의 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일반적인 이계와 달리 시간 왜곡, 공간 압축 등 온갖 괴현상이 산재한 SSR급 이계 공략 경험은 포모르 마족이 준비한 기상천외한 함정을 돌파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무기의 귀천’이 도품(盜品)이라는 건 마족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도품을 도둑맞는 게 그리 싫었나.’
성국언은 핼러윈 분위기가 물씬 나는 사탕과 호박으로 장식된 문을 냉담하게 흘겨봤다.
신화에 등장하는 마족이 준비한 마지막 함정까지 무사히 돌파했으나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을 뽑아 준 지지자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계 공략을 할 때는 이런 성가신 감정이 들진 않았는데.
성국언은 포모르 마족, 진족 탓에 손이 번거로워졌다는 생각에 혀를 차고 싶었다.
성국언은 그런 감정을 숨기고 전무영의 노고를 위로했다.
“목적지에 도달한 것 같군. 고생했어. 사전에 파악한 것보다 구조가 많이 바뀌었는데 짧은 시간 내에 이만큼 조사를 마치다니.”
“아닙니다.”
이번 여정에서 기믹을 파훼한 건 주로 성국언이었으나 전무영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전무영이 사전에 이동 루트를 확보하고 기믹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했으면 더 시간이 걸리거나 아직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칭찬을 들은 전무영은 무뚝뚝한 얼굴로 답하긴 했으나 입꼬리가 평소보다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긴 했지만 뭔가 이상합니다. 포모르 마족과 전혀 마주치지 못했으니까요.”
전무영과 성국언은 알지 못했으나, 현재 핼러윈 파티를 준비한 포모르 마족 중, 둘을 제외하고 전원 대피 중이었다.
현재 이 구역에 남은 것은 포모르 마족이 보유한 가든의 주인인 푸른 가면의 마족.
그리고 포모르 마족의 우두머리 외눈 거인 발로르.
이 둘만이 가든 안에 남은 상태였다.
발로르의 죽음의 눈, 사안(死眼)은 유효 범위가 넓고 피아를 가리지 않고 발동했기에 자칫하다간 침입자를 말살하는 과정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는 탓이었다.
‘포모르 마족이 하나도 없다는 건 변수가 존재한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건 아마…….’
성국언은 아는 사람을 만났다며 단독 행동을 하겠다던 후배, 조의신을 떠올렸다.
정말로 그저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갔을 뿐인지도 모르는데, 어쩐지 이 상황엔 후배가 한몫하고 있으리란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성국언은 모르는 척 웃어넘겼다.
“모처럼 준비한 진족 제압용 아이템을 써 볼 기회가 없어서 아쉽군. 하핫!”
“전 그냥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끼이익……!
성국언은 호쾌하게 웃으면서도 함정을 경계하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은 성국언이 힘을 주는 대로 가볍게 열려 두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 문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군. 문에 새겨진 문양이나 위치를 고려해 봤을 땐 여기가 보물고인 게 틀림없을 텐데.’
성국언과 전무영이 만일의 사태가 닥치면 곧바로 이능을 발동할 준비를 하며 문 저편을 응시했다.
이윽고 문이 전부 열려 문 너머의 광경이 들어온 순간, 두 사람은 일순 말을 잃었다.
문 너머에는 수백 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액자의 종류는 제각각이었으나, 그 안에 들어 있는 그림은 전부 ‘이무기의 귀천’이었다.
“……포모르 마족은 사전에 가짜 ‘이무기의 귀천’을 수백 점 준비한 것 같군요. 예고장을 받고 철저하게 대비한 것 같습니다.”
이곳에 있는 그림 중 진짜 ‘이무기의 귀천’은 단 하나.
혹은 아예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눈썰미가 좋은 두 사람의 눈에도 이 가짜 그림들은 완벽에 가까웠다.
홍경복 화백 특유의 노련함, 붓을 처음 든 민그린의 거침없는 붓놀림이 완전무결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건 오랜 시간 국립 현대 한국화 미술관에서 사람들의 눈을 속인 가짜보다 훨씬 우수한 가짜들이었다.
“겉보기에는 도저히 분간이 가지 않는군요…….”
“단순히 그림 그 자체만으로 구분하려면 홍경복 화백님이나 민그린이 직접 와야 할 것 같군.”
두 사람은 여러모로 행동이 제한되어 있어 수백 점에 달하는 그림을 전부 회수해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둘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홍경복 화백님께 진품을 구별하는 법을 들어 두길 잘했군.”
‘이무기의 귀천’에는 비밀이 있었다.
이 그림은 한반도에서 어둠의 시대라 칭한 암흑기를 끝낸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장의 의뢰를 받아 그려진 그림이었다.
또한 고명한 화가이자 플레이어였던 홍경복 화백이 직접 만든 염료로 독특한 가공을 하여 ‘이계 종이’에 그린 그림이기도 했다.
그 결과, 이 그림은 보통 그림과 달리 이능파에 반응해 특별한 작용을 일으켰다.
“‘이무기의 귀천’이 인간의 이능파에만 반응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보통 미술품 앞에서는 이능파를 뿜을 일이 없으니 알 길이 없지.”
옛 한국 지부장의 의뢰에 따라 만들어진 그림은 인간의 이능파가 닿으면 특별한 반응을 일으킨다고 한다.
단순한 우연의 산물인지, 의도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무기의 귀천’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게 되었다.
이계에 등장하거나 플레이어가 이능을 통해 제작하여 만들어지는, 카드화가 가능한 타입의 아이템이 된 것이다.
“‘이무기의 귀천’이 카드화가 가능한 아이템이라는 게 알려지면 타락한 플레이어에 의해 도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니까, 그동안 숨긴 거겠지.”
만일 카드화가 가능하다는 게 알려졌다면, 더 이르게 도난당하고 그 이후의 탈환 계획이 더더욱 까다로워졌을 것이다.
‘복사 이능을 쓰면 진품과 가품의 구분이 쉬워지니 수작업을 했겠지. 그 수고가 모두 무위로 돌아가겠군.’
포모르 마족이 헛수고를 한 게 유쾌해 성국언은 기분 좋게 웃었다.
전무영은 그 미소를 보고 아까워했다.
지금 상황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면, 성국언의 홍보 자료로 써먹어도 괜찮을 수준의 표정이었던 탓이다.
전무영이 아쉬움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제가 할까요?”
“아니, 너는 이능파를 아껴 둬라. 네 광림은 이능파 연비가 안 좋잖아.”
성국언이 전무영이 나서기 전에 순도 높은 이능파를 발산했다.
파아앗!
성국언을 중심으로 이능파가 서서히 방을 채워 가고 수많은 ‘이무기의 귀천’을 밝혀 갔다.
이능파의 빛이 천장 가까이 차올랐을 때였다.
크르르……!
수백 점의 그림 중 단 하나의 그림에서 어느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무기가 꿈틀거리며 이능파를 쐬려는 것처럼 움직였다.
바위와 구름 사이에 가렸던 몸체가 그림 표면을 향해 스르르 움직였다.
거장과 신예의 붓질로 생명을 얻은 이무기가 하늘로 돌아가기 위해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그림을 보며 성국언이 감탄했다.
“멋지군……!”
이 진짜 그림은 성국언이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했던 가짜와 달랐다.
홍경복 화백이 정교한 가짜를 두고 ‘조잡한 낙서’라고 칭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잠시 손끝이 저릿저릿해지는 것 같은 감상에 젖었던 성국언이 진짜 ‘이무귀의 귀천’을 향해 손을 뻗었다.
펑!
그러자 그 그림은 기다렸다는 듯이 카드화가 되어 성국언의 손에 빨려 들어갔다.
성국언은 UR급 아이템 카드 특유의 색이 섞인 테두리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목표는 완수했다. 그럼 철수하지.”
생각보다 수월하게 그림을 손에 넣었다.
아직 이 그림의 비밀은 다 밝히지 못했지만, 이능파에 반응하던 이무기를 보니 실마리는 대충 잡힐 듯했다.
“……그 아이는 어떨 것 같습니까?”
철수하던 중, 전무영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전무영은 조의신을 걱정하는 듯했다.
‘포모르의 마족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 그건 아마 괴도와 관련이 있을 거다.’
포모르의 마족들은 괴도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에 성공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곳에 조의신이 있을 것이다.
성국언은 짐짓 모르는 척 말했다.
“글쎄, 이쪽이 쉬운 걸 보니 그쪽은 어떨지 모르겠군.”
* * *
괴도 네온과 구슬비와 나.
우리는 이동 중에 몇 번이나 에너미와 마주쳤다.
마진승의 광림으로 대규모의 초원을 소환할 때 말려든 에너미들이었다.
평소라면 그리 반갑지 않은 조우였겠지만, 에너미가 등장해 전투할 때에는 그놈의 괴도 논쟁이 일지 않았기에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우리 일행은 전력 면에서는 문제가 없어 전투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천동하의 광림을 쓸 수 없어서 외부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는데, 이 점은 구슬비가 해결해 줬다.
“외눈 거인은 계속 우리를 쫓고 있는 것 같아.”
구슬비가 양해를 구하고 잠시 멈춰 섰다가 말했다.
“통찰계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건가?”
“통찰계 스킬은 아니야. 같이 여기에 온 아이들의 시야를 빌리고 있어. 발로르의 시선을 벗어나기 위해 대부분 꿈으로 철수시키는 중이지만…….”
처음 등장할 때 데려온 짐승들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성을 수색시키고 있나 보다.
구슬비는 괴도 네온에 비해 정보력이 부족했을 테니 직접 와서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을 택한 것 같다.
‘구슬비는 1학년 시절에도 광림을 잘 다루었구나.’
구슬비의 우수함에 흐뭇해하고 있을 때였다.
“아, 네가 부른 그 희귀한 생물들 말인가? 처음 봤을 땐 조금 당황스러웠지. 괴도는 몸이 가벼워야 하는 법인데 지나치게 동료가 많았으니까.”
“친구가 없는 핑계로 괴도를 대네.”
“괴도의 친구는 낭만과 예술이지.”
“……너 진짜 친구 없어?”
그렇게 말하는 구슬비도 현재 시점에선 동물 친구는 있어도 또래 인간 친구는 없을 거다.
넓게 보면 스승인 멀린도 친구 같은 사이긴 하지만, 멀린은 후예에다 나이도 천년 단위로 차이가 나니까.
‘그래도 구슬비는 주수혁과는 친하게 지냈는데.’
괴도 네온은 플마고에서도 친구가 없긴 했지만, 2학년 0반에 등장한 구슬비는 달랐다.
방윤섭 건으로 크게 의기소침했던 주수혁은 2학년 0반에서 여러 사건을 겪고 다시 일어선다.
그 과정에는 구슬비도 있었다.
‘그러다가 주수혁의 팬들한테 구슬비가 견제당하는 일도 있었지.’
2학년 0반은 워낙 숫자가 적다 보니 더 그랬다.
구슬비가 그 팬들을 역으로 혼쭐을 내 주긴 하지만 통쾌하다기보다는 씁쓸한 에피소드였다.
구슬비에게 한마디 했던 아이가 주수혁과 같은 중학교 출신이었는데, 주수혁이 그걸 알고 몹시 실망하던 게 마음에 걸렸다.
“지금 우리가 있는 위치 말인데, 다누 신족의 신보와 아주 가까이 있는 것 같아.”
구슬비가 풀로 된 벽을 만지며 말했다.
벽 너머에 신경을 쏟아 보니 희미하게 포모르 마족이 뿜는 것과 다른 이질적인 이능파가 느껴졌다.
“다누 신족의 신보에는 크게 흥미 없는데.”
“아, 그래. 그럼 넌 빠지든가. 잠깐 확인하고 싶은데 이 벽 좀 열어 줄 수 있어?”
그 정도야 이능파로 쉽게 조절이 가능하긴 하지만, 풀의 벽을 열기 전 확인했다.
“주변에 다른 마족은 없어?”
“응. 괜찮을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광림을 발동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해당 캐릭터의 광림, ‘초원을 부르는 함성’을 사용합니다.〉
목소리를 높여 풀의 벽을 해제한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들렸다.
〈스킬 ‘운명력’이 발동했습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