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98화 (397/925)

61. 라이벌 (9)

풀의 벽이 사라지고 드러나는 고성의 정경.

그 사이로 허름한 천 뭉치로 덮인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경매에 올라가야 할 물품이니 먼지가 타지 않도록 최소한의 처치를 했지만, 다누 신족의 신보를 정중히 대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신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신보와 마주한 순간 운명력으로 인한 무언가가 일어나리라는 내 예측은 빗나갔다.

‘신보가 아니라면 운명력은 어디에 개입한 거지?’

그 대답은 옆쪽에서 나왔다.

촤르륵!

괴도 네온이 들고 있던 이능 트럼프 카드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괴도 네온이 황급히 이능파를 전개해 바닥에 카드가 흩어지진 않았지만 여전히 허공에 어지러이 카드가 펼쳐진 상태였다.

허둥거리는 괴도 네온을 보고 구슬비가 한심해했다.

“야, 뭐 하는 거야.”

“실수로 놓친 게 아니야. 괴도는 실수를 하지 않는 법!”

딱히 괴도라고 실수를 안 하는 건 아닐걸.

괴도 네온은 스토리 상 실수를 해서 낭패를 보는 장면이 있으니까.

그리고 차마 인정하기 싫지만 ‘그 단어’의 나도 실수를 범해 나의 천사 올무를 괴롭게 한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이건…… ‘그분’이 개입한 거야!”

괴도 네온의 트럼프 카드에는 스페이드, 하트, 다이아몬드, 클로버 같은 무늬나 숫자가 그려져 있었지만, 한 장의 카드는 달랐다.

그 카드에는 백조와 피드헬, 체스 피스가 새겨져 있었다.

다른 문양이 새겨진 탓인지 몰라도 그 이능 트럼프 카드는 유독 신묘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파아아……!

카드에서 뿜어져 나온 이능파가 주변을 감싸고 시야가 급변했다.

검게 변한 시야 속, 주변이 조용해졌다.

괴도 네온과 구슬비가 투닥거리는 소리도, 풀의 벽이 남긴 잔해와 남루한 천을 뒤집어쓴 신보도 보이지 않았다.

‘또 여기에 온 건가…….’

이제는 친숙하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얼마 전에도 이곳과 비슷한 공간에서 용왕신과 마주했으니까.

‘괴도 네온이 가진 카드를 통해 발동한 걸 보니, 괴도 네온과 인연이 있는 상위 존재인가 보구나.’

괴도 네온이 착용한 백조 가면과 카드에 새겨진 백조 무늬.

그 옆에 그려져 있던 체스 피스와 유사한 형태의 피드헬의 피스.

그리고 켈트 신화의 영향권에 있는 이 장소와 상황.

둘을 고려해 봤을 때, 떠오르는 상위 존재 이름은 하나였다.

‘흑마가 예상한 대로 미처르가 괴도 네온과 엮여 있었나.’

휘이이……!

위쪽에서 빛이 그윽하게 일렁이다 점점 밝아졌다.

빛을 머금고 등장한 건 눈이 막힌 백조 가면과 하얀 옷을 착용한 남자였다.

미처르는 세 마리의 학이 그려진 옷깃을 가다듬고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안녕하세요.”

정중하게 인사했더니, 은은하던 빛이 생기를 되찾은 것처럼 밝게 빛났다.

미처르의 답인사가 돌아왔다.

[그래, 안녕. 정말 예의 바른 아이구나.]

나와 마주치는 상위 존재는 매번 그런 소리를 하는 것 같다.

평범하게 인사를 했을 뿐인데, 왜 그런 말을 덧붙이는 걸까.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우리는 인간을 만나기 힘들어졌지. 인간에게 인사를 받는 일이 오랜만이라서 네가 유독 예의 바르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라.]

내가 의문을 품은 걸 알아챈 건지 미처르는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그늘 한 점 없는 태도를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미처르는 에탄과 재회했겠구나.’

미처르에 관한 설화의 결말은 모험을 마친 후 연인과 맺어졌다, 맺어지지 못했다 둘로 갈렸다.

이 세계의 미처르는 연인 에탄과 무사히 재회하여 맺어진 것 같다.

[후후후, 괴도에게 힘을 빌려주길 잘한 것 같구나. 잃어버린 걸 되찾고 되갚아 주는 건 언제나 통쾌하지. 그 과정에서도 좋은 만남이 있었고.]

미처르와 괴도 네온이 인연을 맺게 된 건 이번 경매가 계기가 된 것 같았다.

플마고 속에선 홍경복 화백이 제자를 잃고 무기력하게 지내니 ‘이무기의 귀천’이 도난당했다는 사실도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세계에선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 언론과 접촉해 ‘이무기의 귀천’의 도난 사실을 공표했다.

‘그래서 플마고와 달리 괴도 네온이 여기에 왔고, 미처르와 연을 맺게 되었구나.’

잃어버린 연인을 되찾은 모험을 통해 신화 속에 이름을 남긴 상위 존재라면, 이 탈환극에 손을 내밀 법했다.

켈트 신화에선 복수로 이름난 상위 존재 모리안도 있는데 어쩌면 까마귀 마왕을 통해 이미 개입 중일지도 모르겠다.

[포모르 마족은 우리를 욕보이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지. 우리는 이에 대응해 복수를 안배했다.]

“……복수요?”

다누 신족은 이번 건을 손 놓고 지켜보고 있던 게 아니었나 보다.

상위 존재로서 그들이 이 세계에 개입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어 둘 수 있는 수는 몇 개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 손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나 보다.

[열세를 가장해 대국 중에 상대를 방심하게 하는 건 나의 특기 중 하나야. 에카 아이렘도 이런 내 수에 당했지.]

에카 아이렘이라면 신화 속에서 미처르와 내기 체스를 둔 상대 아닌가.

피드헬의 귀재로 이름난 그가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허술해 보이는 수를 정교하게 짜 내 에카 아이렘을 낚았다는 일화는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들은 이번 건에 있어서 진족과 우리를 경계했지만, 인간에 관해선 신경도 쓰지 않았지. 괴도와 몽마의 제자, 까마귀 마왕의 아이 그리고 왕의 재질을 타고 난 인간 일행과 너. 다들 우리가 직접 안내하거나 정보를 제공했단다.]

왕의 재질을 타고 난 인간 일행은 성국언을 말하는 건가?

이들은 성국언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보를 흘린 모양이다.

“인간의 손으로 신보를 탈환하게 하는 게 목적이었나요?”

[그래, 포모르 마족이 얕보는 인간의 손으로 신보를 탈환하는 것만큼 후련한 일이 없지. 다른 경매물을 빼앗기는 것도 마찬가지야.]

포모르 마족은 성국언에게 신보를 그 손으로 부수어 달라며 부탁했는데.

둘 다 어떤 의미론 하는 생각이 비슷했다.

두 진영 다 서로에게 망신과 굴욕을 주기 위해 인간의 손에 신보를 맡기려 했다.

미처르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내가 가호를 내린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용이 되지 못한 천재의 산물은 네 일행의 손에 들어간 것 같구나.]

성국언과 전무영은 무사히 ‘이무기의 귀천’을 손에 넣은 모양이었다.

신보가 아니라고 하나 포모르 마족이 당한 게 기분이 좋은지 미처르는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면 다누 신족들은 간접적인 수단을 동원했지만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셈이 되는데.’

처음부터 다누 신족들은 거대한 판을 짜고 신보를 탈환할 계획을 짰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다누 신족은 포모르 마족의 전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공간을 이계화시키는 능력의 존재는 모를 수도 있지만, 외눈 거인 마왕 발로르의 존재는 다누 신족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발로르의 시선에 닿으면 죽을 수도 있어……!’

다누 신족이 뿌린 정보 덕분에 ‘이무기의 귀천’을 찾을 실마리를 얻고, 탈환 과정도 쉬워졌다고 해도 마음에 걸렸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괴도 네온과 멀린의 제자는 발로르의 눈앞에 노출되어 위험한 일을 겪을 뻔했어요.”

상위 존재를 탓하는 말을 입에 담았는데, 미처르의 미소가 짙어졌다.

화를 내긴커녕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예의 바를 뿐만 아니라 다정한 아이로구나.]

“…….”

[발로르가 가진 죽음의 눈은 우리도 경계하고 있었단다. 그래서 그 아이들에게는 선물을 하나씩 준비해 뒀지.]

미처르의 손끝에서 이능파가 흘러나와 뭉글거리며 어떤 모양을 이루었다.

하나는 카드 모양이었고, 하나는 떡갈나무 지팡이였다.

괴도 네온과 구슬비가 소지한 무기 아이템을 형상화한 것 같았다.

[발로르의 눈을 한 번 정도는 막을 수 있도록 우리가 직접 축복해 뒀지. 가호를 내린 아이를 걸고 얄팍한 수를 둘 생각은 없었단다. 그리고…….]

미처르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지금 너희들이 손에 넣을 신보는 그 마왕의 눈을 격파한 신화 속의 창이다. 염려 말아라. 네 손에 그 창이 있는 한, 발로르는 허튼짓을 할 수 없다.]

발로르의 눈을 저지한 무기.

다누 신족 4대 신보 중 하나.

여기에 해당하는 무기는 하나뿐이었다.

투어허 데 다넌의 수장이었던 빛의 신 루, 그가 가졌던 승리를 보장하는 다섯 갈래의 창.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신중하게 고르고 있을 때, 미처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착한 아이인 것 같으니 안심하고 네게 신보를 맡길 수 있겠구나.]

“네? 신보를 맡겨요?”

[시간이 되었구나. 두 아이를 잘 부탁한다.]

신보를 맡기고 둘을 부탁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당연히 신보를 탈환하면 구슬비의 손을 통해 멀린에게 전할 생각이었는데!

[나는 에탄을 되찾았지만, 그녀와 보낼 수 있었던 추억과 시간들은 영원히 되찾지 못했다. 내 아이가 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도와다오.]

미처르의 그 말에는 후회가 넘쳐났다.

모험과 시련을 반복하며 홀로 시간을 보내야 했던 미처르는 연인을 되찾아도 그 시간만은 되찾을 수 없었을 테니, 당연한 소감일 것이다.

‘괴도 네온이 놓칠 수도 있는 추억과 시간이라면, 혹시…….’

내가 미처르의 말에 답하거나 인사라도 하기 전에 미처르는 자신이 할 말만을 마치고 떠났다.

순식간에 미처르의 존재감이 흐려지고 그 대신 귓가에 따가운 목소리가 닿았다.

어느 사이엔가 나는 다시 고성에 와 있었다.

그리고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은 건지 구슬비와 괴도 네온이 논쟁 중이었다.

“괴도가 실수를 안 한다면서 그럼 이건 뭔데.”

“실수는 아니지만, 실수에 가까운 무언가다.”

“그냥 실수했다고 하면 안 돼?”

괴도 네온이 꿋꿋하게 주장하며 이능 트럼프 카드를 회수하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운명력의 개입과 미처르의 의지로 그가 축복한 아이템이 멋대로 움직인 거니까 괴도 네온의 실수가 아니긴 했다.

‘어쨌든, 지금은 미처르의 말에 따라 신보를 가지고 후퇴하는 게 좋겠어.’

혼란스러웠지만 우선 미처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의 말대로 저 신보가 ‘루의 창’이고, 괴도 네온과 구슬비에게 발로르의 눈을 막을 수단이 있다면 발로르는 절대 우리를 뒤쫓지 못할 테니까.

나는 신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 경보 같은 게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르잖아!”

“신보가 만약 무기류라면 닿는 것만으로도 거부 반응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루의 창, 누아다의 검.

두 신보는 켈트 신화에 등장하는 상위 존재 중에서도 한 시대에서 가장 위대한 신으로 꼽혔던 신들의 손에 있던 무기였다.

거기에 이 땅은 켈트 신화의 영향력이 큰 땅이다.

감히 그 무기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 천벌이 떨어질 법한 무기였다.

그러나 문제없었다.

‘상위 존재 미처르가 직접 신보를 맡긴다고 했고, 내게는 그 스킬이 있으니까.’

모든 무기와 방어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능력.

이 세계에 온 순간부터 나는 그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스킬 ‘만물 사용’이 발동했습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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