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귀갓길 (1)
가든의 밖.
발로르가 입구를 막기 전 일찌감치 에너미를 처리하고 탈출한 이들이 있었다.
마주 보고 잠시 실랑이를 하던 둘은 곧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퍽!
곧 우렁찬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주먹을 날린 쪽은 검은 정장 차림의 여성, 흑마였다.
가슴 쪽을 얻어맞은 서돌은 딱히 아픈 티는 내지 않았지만, 순간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흑마가 이능파를 실지 않고 때리는 대신 서돌도 방어하지 않고 맞아 주기로 했는데, 서돌은 뒤늦게 후회했다.
‘……진성늑골에 금이 가고 그 주변 근육이 완전히 파괴된 거 같은데. 힘 조절할 생각이 없었나 보군.’
서돌은 지나친 힘 탓에 구겨진 옷을 툭툭 털며 파괴된 근육과 뼈를 수복시켰다.
흑마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서돌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우린 오랜 기간 동맹을 맺은 사이인데, 이렇게 무자비하고 무식하게 때리다니. 말발굽에 차여서 아프고 기분이 더러워.”
“내기를 하자고 한 건 당신이었잖아? 진 주제에 말이 많네. 쥐가 원래 시끄럽게 울어서 그런 걸까.”
둘은 태평스럽게도 이계화한 공간에서 에너미를 누가 더 잡나 내기를 했다.
내기의 결과는 흑마의 승리.
승자인 흑마는 서돌을 한 대 팰 권리를 얻었고, 흑마는 변명을 늘어놓는 서돌에게 ‘일단 약속대로 한 대 맞고 얘기하자.’라는 말로 일축했다.
흑마는 서돌의 입을 다물게 할 생각으로 후려쳤는데, 아쉽게도 그 정도의 가격으로는 서돌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없었다.
“원래 내가 이길 수 있었어. 말발굽에 걷어차일 예정은 없었다고.”
“그렇게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이야. 벌써 얻어맞았는데.”
서돌은 주먹으로 맞아 놓고 끝없이 말발굽 운운했지만, 흑마는 관대하게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
지금 흑마는 서돌을 때려서 몹시 기분이 좋아 마음이 넓어진 상태라 싫은 얼굴 없이 서돌의 말을 받아쳤다.
하지만 동시에 흑마는 머리 한구석으론 냉정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망스러울 정도로 격차가 났어. 서돌은 쥐새끼지만 12지의 수장인데.’
12지 동맹은 일부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면 교류도 적고 사이도 별로 좋지 않다.
12지 동맹이 오랜 기간 유지되는 건 각 진족이 가진 힘을 경계하고 존중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방금 내기에서 서돌이 보인 모습은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한때 12지 동맹에서 서돌을 제외하자는 말도 있었는데.’
그 이야기가 거론된 건 12지 동맹이 결성되기 직전의 일이었다.
서돌은 반감을 사기 쉬운 성격으로, 속되게 표현하면 ‘어그로꾼’ 성향이 있었다.
거기에다 서돌이 극단적인 인간 찬가론자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언젠가 진족이나 12지 동맹보다 인간을 우선시할지도 모른다는 게 그 의견이었지.’
그런 맥락에서 동맹의 자리에 서돌이 아닌 다른 진족을 넣자는 말이 나왔다.
대부분의 12지 진족들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지만, 저강렵과 어느 진족의 수장이 크게 목소리를 내었다.
서족이 동맹에 들어가 있거나 말거나 별 상관이 없는 이들이 귀찮은 마음에 알아서 하라며 손을 뗄 때, 몇몇 이들이 반대 의사를 표했다.
―서돌의 능력은 성가시다. 12지 동맹의 불가침 조약에 묶을 필요가 있다.
황호는 서돌이 초래한 돌림병을 목도한 적이 있었다.
산천초목을 다 말려 죽였던 힘을 본 황호는 서돌을 골칫거리로 여겨 동맹으로 묶고 싶은 듯했다.
―한반도에서 12지의 상징성과 인지도는 결코 작지 않아. 해가 바뀔 때마다 12지의 존재가 언급되잖아? 지력을 기반으로 한 결계 구축에 12지의 이름이 필요해. 서족이 빠지면 결계가 약해지겠지.
황호만큼 결계에 일가견이 있는 견족의 수장도 그렇게 덧붙이니 여론은 서돌을 12지에 넣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서돌이 반감을 사고도 12지 동맹의 일각으로 남아 있는 건 그 힘을 존중받아서다.
‘내기라곤 하지만, 그리 자신만만하게 굴어 놓고 이 꼴이라니. 서족 대신 다른 종족을 동맹에 끌어들이는 게 나았을까.’
흑마는 제 생각을 숨기고 물었다.
“당신, 디자이너 노릇을 하다가 감이 많이 죽은 거 아냐? 이 정도로 많이 차이가 날 줄 몰랐어.”
흑마와 서돌이 잡은 에너미의 숫자는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서돌이 먼저 제안한 내기인 만큼 손을 늦췄을 리도 없는데, 이게 서돌의 실력이라면 같은 동맹의 일원이라고 하기엔 못마땅했다.
떠보는 말에 서돌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어쩔 수 없잖아요? 가던 길에 까마귀를 하나 만나서 인사를 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시간이 금방 지나서요.”
“……까마귀?”
포모르 마족의 가든에 또 누가 있었단 말인가.
흑마가 의문을 표하는 와중에도 서돌은 신나게 존댓말을 써 대며 이야기했다.
“네, 까마귀 마왕의 산하에 있는 인간이 웬 돌을 찾고 있더라고요. 저와 먼저 친해졌으면 가호를 줬을 텐데, 아깝게 됐어요.”
* * *
두 사람은 곧바로 마족의 영역을 벗어나기로 했다.
괴도 네온은 여전히 제손으로 ‘이무기의 귀천’을 되찾지 못한 게 안타까운 눈치였지만,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다.
“내가 확보한 도주 루트를 소개하지. 남쪽으로 뻗은 해안선을 따라가면 비교적 안전한데, 마족의 권속의 감시가…….”
“내가 이쪽으로 왔어. 그 권속이라는 거 파란 장갑 말하는 거지? 그거 거슬려서 내가 해치웠는데. 시체를 두고 가는 거 같아서 모아 뒀다가 파티장 안에 던져 놨어.”
“……과격한 괴도로구나.”
처음에 연회장에 장갑 뭉치를 던져 넣은 게 구슬비였나 보다.
두 사람은 서로가 모은 정보를 기반으로 순식간에 도주 루트를 다시 짰는데, 괴도에 관한 이야기를 빼면 의외로 손발이 맞는 듯했다.
내가 가진 정보도 더해 완벽한 탈출 루트를 짠 후.
두 사람이 내게 물었다.
“너는 같이 안 가?”
“같이 가지 않겠나. 괴도로서 나누고 싶은 말이 많다. 아직 네게서 괴도의 철학, 논리, 의지에 관해 듣지 못했…….”
“……나도 따로 갈까.”
그놈의 괴도 소리가 빠지질 않았지만, 어쨌든 처음 보는 나를 배려하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마음은 바람직했다.
아쉽게도 또 다른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함께할 수는 없었다.
일행이 있어서 곤란하다는 말을 하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만나서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은데.”
“괴도는 작별에 미련을 남겨선 안 된다!”
“그럼 넌 미련 남기지 말고 가든지.”
두 사람이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해서 내가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괴도 네온은 작별 운운했지만, 조만간 다시 만날 거라고 믿으며 인사를 남겼다.
“학교에서 보자.”
* * *
어느덧 새벽이 지나 동틀 무렵.
포모르 마족의 파티는 어중간한 상태에서 끝나 버렸다.
발로르의 눈이 루의 창에 당한 것도, 가든이 생겼다가 사라진 것도 표면상 드러나지 않았다.
이상 현상이라곤 경매가 일어나지 않은 채 끝나 버린 것 정도였다.
푸른 가면을 쓴 마족이 핏발이 선 눈을 애써 감추며 일일이 파티 참가객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돌아다녔다.
사과를 할 때 가면 너머로 마주친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손님들 앞에선 억누르고 있는 거겠지.’
까마귀 가면을 쓴 나를 본 순간 푸른 가면을 쓴 마족이 일순 경계했다.
그러나 나는 성국언과 헤어진 직후 다른 디자인의 까마귀 가면과 의상을 착용한 데다 광림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거기에 까마귀 가면을 쓴 손님은 나 혼자만이 아니기에 이 일로 트집 잡을 순 없을 거다.
‘파티 초대객들의 소지품을 전부 뒤져 보는 방법도 있는데.’
그러나 마족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하면 정말로 이번 경매가 열리지 않은 원인이 ‘경매품을 빼앗겨서’로 확정되는 셈이니까.
이유를 밝히지 않고 경매를 끝내 버리면 의심을 사고 파티 초대객의 불만을 사겠지만 변명의 여지가 남긴 했다.
‘뭐, 파티 초대객을 붙잡고 소지품을 뒤져 봤자 찾지 못하겠지만.’
나에게는 아이템창이 있었고, 전무영은 호족의 수장도 속일 수 있는 광림을 쓸 수 있었다.
우리가 아이템을 얻고 무사히 그 자리를 벗어난 시점에서 이미 게임은 끝난 거다.
그렇게 포모르 마족의 고성을 벗어난 직후.
나와 성국언과 전무영은 무사히 합류한 후 에어 리무진에 타 호텔로 돌아왔다.
우리는 일절 포모르 마족의 경매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호텔에 다다라서야 이야기를 꺼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이무기의 탈환’을 축하하며 건배할까.”
건배라곤 하지만 성국언과 전무영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귀국할 때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겠지.’
두 사람의 마음가짐에 뿌듯해졌다.
우리 셋은 알코올 대신 탄산수가 담긴 락 글라스로 건배했다.
카드화된 ‘이무기의 귀천’을 감상하며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과 마셔서 그런지 아무 맛이 없을 탄산수가 달게 느껴졌다.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던데, 무슨 일 있었니?”
이무기의 귀천을 탈환하는 과정의 이야기가 끝나자 화제가 내 쪽으로 돌아왔다.
성국언과 전무영이 의문을 품는 건 당연했다.
‘갑작스러운 이계화, 가든화에 관해선 나중에 이야기해야겠지만 다른 건…….’
결국 두 사람의 의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별일 없었어요. 동행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핫! 사과를 받으려고 이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야. 그런데 별일 없었다라…….”
성국언은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성국언은 추궁할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추측은 계속할 모양이었다.
“우리는 끝까지 발로르와 마주치지 않았지. 그렇게 화려하게 예고를 하고 파티장에 나타난 괴도 네온과도 만나지 못했어. 나중에 등장한 멀린의 제자도 못 봤지.”
성국언은 내가 겪은 일을 거의 짐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성국언은 웃기만 할 뿐, 그걸 나한테 확인받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성국언은 내 손에 쥐고 있는 락 글라스를 향해 다시 건배하며 말했다.
“의신아, 고생했다.”
그 말만 들어도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처음엔 발로르의 눈이 남긴 죽음의 잔상이 아직 아른거렸는데, 괴도 네온과 구슬비, 성국언과 전무영 이 넷과 얘기하다 보니 점점 흐려져 갔다.
축하하는 자리를 마치고 우리는 귀국을 앞두고 잠시 쉬기로 했다.
‘시차를 고려하면 계속 깨어 있다가 귀국한 후에 시간에 맞춰 자는 게 좋겠지.’
요 며칠 동안 잠들지 못한 두 사람 대신 나는 줄곧 깨어 있었다.
침대 위에서 플마고 설정집을 읽고 있을 때.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일어난 성국언과 전무영이 말을 꺼냈다.
“그럼 공항으로 가 볼까.”
“좀 더 쉬다 갈 예정 아니었나요?”
“급한 일이 생겨서 바로 공항에 가야 할 것 같구나.”
한국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두 사람은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는데, 성국언이 정치인이라는 걸 고려해 나도 깊게 묻지 않았다.
“염방열 선배님께는 양해를 구했다. 전용기들이 대기 중이야. 같이 돌아가자.”
성국언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는데, 그 말을 하는 얼굴 어딘가에서 장난기가 느껴졌다.
또 성국언이 한 말 중에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방금 성국언이 전용기‘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 위화감은 공항에 도착한 후에 확인할 수 있었다.
전용기 전용 터미널.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 이가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조의신.”
황지호가 영국에 와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