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귀갓길 (10)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용제건이었다.
황지호가 대놓고 저렇게 말을 하니 자신이 말을 아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동하는 어떻게 안 거야?”
“…….”
천동하가 침묵했다.
천동하의 숨겨진 이복동생이 사실은 호족이었고, 그러다가 황지호와 엮였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천동하를 대신해 황지호가 처웃으며 답했다.
“하하하하!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 궁금한가?”
“궁금한데, 물어봐도 돼?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안 알려 준다.”
안 알려 줄 거라고 답할 거면 왜 말한 건가.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듣고도 용제건은 굴하지 않고 계속 물었고, 황지호는 꿋꿋하게 처웃었다.
합산 나이 1만이 넘어가는 두 진족이 하찮은 대화를 나누느라 나와 염준열, 천동하가 남겨졌다.
염준열은 그 광경을 보니 눈앞이 아득해졌는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건이 형…… 아니, 용제건 선생님은 1학년 0반 부담임이지. 그리고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건 1학년 0반 소속으로 되어 있는 진족이고…….”
‘하하하하!’ 하고 처웃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듣자 학생회장이자 선배인 염준열은 내가 걱정되었는지 거듭 당부했다.
“의신아,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해. 제건이 형은 좋은 용이지만, 유희계라서 그런지 엮이면 가끔 난감한 상황에 놓일 때도 있으니까.”
용제건은 좋은 용이지, 유희계 용이긴 하지만.
염준열의 말에 십분 동의했다.
그때, 디바이스 이어링에 알람이 왔는지 천동하가 잠시 홀로그램을 열어 메시지를 체크하다가 말했다.
“……저기 두 진족은 놔두고 일이나 할까. 방금 진승이가 서문 근처에서 기자를 발견했대.”
“사전에 취재 협력 요청은 없었던 걸로 아는데. 은광고 출입 허가증이 없는 기자지?”
“응. 학교 결계에 관한 이해가 부족한지 출입증을 가진 학생과 함께 입장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무차별로 학생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데.”
함근형 선생님과 선도부가 우려한 대로 기자들이 독고미로의 첫 등교를 앞두고 귀찮은 짓을 벌이려는 것 같다.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연이어 은광고 각지에서 기자나 몰지각한 팬들의 습격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수가 많은데. 은광고 근처에도 이렇게 몰려오다니…….”
“은광고는 그간 반응이 물렀잖아. 재단 측에선 거의 손을 안 댔지. 플레이리스트 PD 건이 있긴 하지만, 한 번뿐이었잖아?”
아무래도 지금 이 사태는 황지호의 태만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다들 여태까진 은광고에서 다소 선을 넘어도 큰 문제가 없었으니 그러려니 한 거다.
나는 황지호에게 눈치를 주기 위해 여전히 처웃으며 용제건과 떠들고 있는 황지호를 바라봤다.
천동하의 말이 계속되었다.
“준열이 네가 1학년일 때도 귀찮게 구는 기자나 팬이 많았지. 은광고 내 네 팬클럽 애들하고 붉은 사자 측에서 대응을 잘해 줘서 수습됐잖아.”
“그랬지……. 그때 나 때문에 학교에 피해를 준 것도 있었어.”
천동하의 솔직한 팩트 공격에 염준열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학생의 안전이 걸려서 그런지 곧바로 둘은 은광고의 학생회장과 선도부장다운 얼굴을 했다.
염준열과 천동하는 진중하게 대처 방안을 논의하고 파견할 인원을 정했다.
용제건과 황지호의 나잇값 못 하는 대화와 달리 영양가 넘치고 진지한 화제에 귀를 기울이다 반사적으로 말했다.
“저도 도울까요?”
기껏해야 더미를 만들어서 기자와 팬들을 낚는 역할밖에 못 하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면서 제안했는데, 두 사람은 곧바로 거절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우리한테 맡겨 줘. 1학년 후배에게 일을 떠넘길 수는 없어.”
염준열은 지금 이 자리에선 나를 철저하게 후배로 대하기로 한 것 같다.
염준열에 이어 천동하가 조금 장난스럽게 말했다.
“굳이 돕고 싶다면 선도부에 들어와.”
천동하는 아직 선도부 권유를 포기하지 않았나 보다.
연구소 인턴 제안을 생각해 보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았나.
적당히 거절하는 말을 고르고 있었는데, 염준열이 놀란 목소리를 내며 끼어들었다.
“선도부? 의신이를 선도부로 데려오려고?”
“응, 2학년 때에도 임원과 고문 동의가 있으면 중도 가입이 가능하잖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염준열이 급히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의신아, 학생회에 들어올 생각은 없어?”
친구는 서로 닮는다더니, 염준열과 천동하가 같은 제안을 했다.
염준열은 학생회의 장점과 비전 등을 간략하게 소개했는데, 학생회장이 직접 소개하는 은광고 학생회는 멋지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순 없었다.
둘의 제안은 고맙지만, 앞으로의 전개를 생각하면 어렵지 않을까.
거절의 말을 하자 둘은 아쉬워하는 얼굴로 물러났다.
이렇게 거절까지 하고 나니 둘을 돕는다는 말을 꺼내기 더욱 어려워졌다.
‘염준열과 천동하와 합류해서 직접적으로 돕는 건 어렵게 됐지만, 민그린 때처럼 반 아이들과 마중을 가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일단 이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1학년 0반 교실로 향하기 전, 염준열과 천동하가 다시 한번 내 생일을 축하해 줬다.
“의신아,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한다.”
천동하는 어제 메시지를 보냈는데도 염준열에게 맞춰서 또 축하 인사를 해 줬다.
선배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으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이야기는 끝났나? 이만 교실로 가도록 하지.”
황지호도 용제건과 입씨름을 마친 건지 나와 합류했다.
노친네의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는 게, 아침에 기묘한 만남을 가진 게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어, 의신이랑 지호 일찍 왔네! 의신아, 피곤하진 않아?”
아침에 도착하니 우리 반 아이들이 거의 등교해 있었다.
반 아이들은 김유리의 주도로 교실을 꾸미고 MITRON의 로고가 새겨진 케이크와 쿠키 박스를 정렬하는 중이었다.
분홍색을 기조로 한 장식물이나 독고미로의 이름이 투사된 홀로그램을 보니, 지금 뭘 하는지 짐작이 갔다.
‘독고미로의 환영 파티를 할 예정인 건가.’
우리 반 아이들은 우승을 놓친 독고미로를 격려할 겸, 등교를 시작한 걸 환영할 겸 파티를 준비한 것 같았다.
‘같이 마중 가는 건 어렵겠네.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나는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는데.
우리 반 아이들은 이유 없이 나를 빼고 파티를 준비할 아이들이 아니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이유를 묻기로 했다.
“연락해 주면 나도 도우러 왔을 텐데.”
그 말에 대답한 건 전자 칠판에 독고미로 초상화를 그리고 있던 민그린이었다.
“의신이는 내 그림을 찾느라 고생했잖아. 좀 더 쉬었으면 했어. 미리 말하면 안 쉬고 도우러 왔을 거 아냐.”
그거야 그렇지만, 반 아이들에게 파티 준비를 떠맡긴 것 같아 미안했다.
명색이 부반장인데 반 아이의 환영 파티에 뭔가를 해야 하지 않나?
“그린이가 배려해 준 거니까 고맙게 생각해…… 억!”
송대석이 한마디 덧붙이다가 민그린에게 옆구리를 걷어차였다.
이젠 송대석이 쓸데없는 말을 하다가 중간에 말이 끊기는 건 당연시되는 일이라 별 관심을 받지 못했다.
“……넌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상황을 두고 별로 놀란 기색이 없는 황지호에게 묻자 예상대로의 답을 했다.
“하하하하! 당연히 알고 있었지. 여기부터 저기까지는 내가 고르고 산 케이크다.”
황지호는 다 알고도 말을 안 한 것 같다.
노친네는 내가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 좋은 건지 아주 신나 했다.
아침부터 노친네의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 좋아 보였다.
“이 새끼 맛있는 것만 골라 왔네.”
“지호가 지정한 순서대로 먹으면 단맛에 질리거나 목이 메지 않을 것 같아요. 케이크와 음료의 배치가 절묘해요!”
접시와 음료를 나르던 맹효돈과 사월세음이 한마디씩 덧붙였다.
노친네가 골랐다는 테누아바니유와 홍차들의 조합만 봐도 얼마나 신경 썼는지 짐작이 갔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노친네는 철저하게 독고미로 환영 파티를 준비한 듯했다.
한편, 파티 준비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레나? 무슨 일 있습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야.”
마치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듯, 권레나는 홀로그램을 통해 메시지 수신 화면을 멍하니 보다가 황급히 창을 껐다.
또, 평소보다 말수가 훨씬 줄어든 한이는 복잡한 얼굴로 정문을 계속 주시했다.
독고미로가 오길 기다리는 듯했다.
“종합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니 교문 앞이 좀 어수선한 것 같아요. 학생회와 선도부의 활약 덕에 금방 정리되고 있는 것 같지만요.”
“이제 곧 미로 오겠다. 마무리하자!”
반 아이들이 폭죽을 하나씩 쥐고 문을 주시했다.
그때, 황지호가 기척을 감지하고 문 너머를 응시했다.
“누군가가 교실 문 앞으로 오는 것 같군.”
“어느 쪽? 앞문? 뒷문?”
“흐음…….”
황지호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눈을 반짝이는 게 또 노친네가 기분 좋아할 만한 일이 일어나려는 듯했다.
황지호의 얼굴을 본 아이들이 황지호에게 묻는 걸 그만두고 상의를 시작했다.
“누가 오는 건 맞는 것 같은데.”
“함근형 선생님은 아니에요. 지금 교문 지도 하고 계시대요.”
“지금 교실 문 잠가 뒀으니까 들어올 수 있는 건 1학년 0반하고 선생님들뿐이야. 기다리자!”
그리고 잠시 후.
나를 비롯한 반 아이들이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누군가의 기척이 가까이 접근했다.
그런데 황지호의 말대로 무언가가 이상했다.
곧 그 위화감이 현실이 되어 문이 열렸다.
위잉!
“이리 오너라! 루이스 페레나(Luis Perenna) 첫 등교, 첫 등장 했도다!”
“멀린의 제자, 위대한 드루이디스. 오늘부터 등교 시작!”
앞문과 뒷문으로 각각 1학년 0반 소속 관심종자들이 등장했다.
관종들은 은밀하고 빠르게 접근하느라 서로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나 보다.
‘앞문에서 등장한 저 루이스 페레나 운운한 건 괴도 네온이고, 후문에 등장한 건 구슬비구나.’
괴도 네온이 댄 루이스 페레나는 가명이 분명했다.
루이스 페레나(Luis Perenna)는 괴도 네온이 모티브로 삼는 괴도 뤼팽, 아르센 뤼팽(Arsene Lupin)의 철자를 재배치해서 만든 가짜 이름이니까.
뒤늦게 서로를 알아본 관종들이 서로를 극혐하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칠판을 보고 경악한 얼굴을 했다.
“독고미로의 환영 파티……? 내가 아니라?”
“아, 오늘 다른 애가 등교하나 보네! 날을 잘못 잡았어!”
위잉!
두 관종은 절규한 후, 이를 부득부득 갈며 빠르게 문을 닫고 퇴장했다.
괴도 네온과 구슬비가 사라진 후, 교실은 조용했다.
나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관종력에 공연히 부끄러움을 느끼며 오그라드는 손을 펴기 위해 애썼다.
잠시 후.
함근형 선생님이 직접 독고미로를 마중 간 듯 두 사람이 같이 교실에 도착했다.
함근형 선생님은 무언가를 찾는 얼굴로 교실을 둘러보다 아쉬워하며 물었다.
“오늘 두 사람 더 등교한다고 들었는데. 아직 안 왔나?”
“오긴 왔는데요, 음…….”
김유리는 등교자가 두 명 더 있었는데 없어진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11)